'오월 영령 후손들이 차별 받지 않는 세상 만들고 싶다"
'오월 영령 후손들이 차별 받지 않는 세상 만들고 싶다"
  • 서상희
  • 승인 2017.05.31 04: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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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장현 광주광역시 시장 인터뷰

강단 있는 말투와 형형한 눈빛의 윤장현 광주광역시 시장을 처음 만난 곳은 광주 민주 항쟁 37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던 유엔본부였다. 정치인답게, 시민운동가답게, 그는 예의 바르고, 정중했으며, 공식적이었다.

기념 리셉션 장에서 지인의 소개로 인사를 하고 난 후, 구겐하임 미술관에 가는 오후 일정에 동행했다. 바쁜 여정과 시차로 피곤함이 온 몸과 목소리에서 풍겨져 나왔지만, 짐짓 모른척하며 인터뷰를 강행했다.

계속 예의 바르고 공식적인 대답으로 일관하는 윤 시장을 보면서, 좀 편안하게 대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이미 고인이 된 광주의 선배들을 어쩔 수 없이 소환했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표준어를 사용하던 윤 시장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기 시작했고, 경직돼있던 자세도 풀어졌다.

윤 시장은 광주 민중 항쟁의 산 증인이다. 1980년 오월 광주에서 그는 부상자를 돌보던 거리의 의사였다. 의사와 시민운동가로 수십 년을 올곧게 살아온 윤 시장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구호로만 외치던 이상적인 정책을 현실 세상에서 실질적으로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정계에 입문한 지 어느덧 3년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정치인이라는 호칭을 낯설어 한다.

“정치인은 무슨…….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윤 시장은 한국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언제나 모티브를 제공하는 광주 정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광주의 후손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5.18을 경험하지 않았고, 5.18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아이들에게 광주의 후손으로서 자랑스럽게 살라, 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한국 사회에서 편견과 차별을 받으며, 먹고 살 산업 구조도 없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가, 라는 그들의 물음에 우리 세대가 응답을 해주어야 합니다.

이 아이들이 일자리가 없어서, 광주를 떠나 경인지역 어느 옥탑 방에서, 또는 반 지하 방에서 인생을 시작하고 서울에서 자란 아이들이 한국 사회를 이끌 동안, 광주의 아이들은 유럽의 유태인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에 책임과 분노를 동시에 느낍니다.

광주 정신의 계승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아이들이 최소한 이런 차별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4차 산업 혁명의 시대에서 어떤 사업의 아이템을 미리 준비하느냐가 지역이나 국가의 운명을 가른다고 보는데, 광주는 전기 자동차 등 에너지 신 산업을 준비해가고 있습니다.”

그는 살아남은 후손들이 최소한 오월을 당당한 역사라고 느끼려면 차별 받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윤 시장은 후손들이 광주에서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한다면 “오월이 흔들린다.”는 두려움이 있다.

윤 시장은 5.18 진상 규명과 5.18 정신 계승 등 광주가 어느 정도 명예 회복이 되어갈 즈음 오히려 광주 정신이 잊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조바심이 생겼다.

그는 시야를 넓혀서 고통 받는 나라들과 우리의 경험과 희망을 나누고 연대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캄보디아와 스리랑카, 동티모르 등 아시아의 어려운 나라를 돕기 시작했다.

2016년 캠브리지 대학 아시아중동연구단과대에서 윤 시장을 초청했다. 그는 ‘아시아 민주화와 인권신장을 위한 광주의 역할’을 주제로 5.18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설명하고 민주·인권·평화의 가치를 담은 광주 정신이 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 강연했다.

윤 시장은 캠브리지 대학이 자신을 어떻게 알고 초청했는지 궁금해서 알아보니, 동티모르에서 행한 연대 활동 때문이었다고.

“신생 민주 국가 중에서 어느 곳이 가장 안정적이고 민주적 절차를 제대로 밟는 국가인지를 연구했더니 동티모르였답니다. 민주화 과정을 추적하다가 닥터 윤이 독립 운동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저를 추적해왔다고 하더군요.”

윤 시장은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사비로 국제청년캠프를 열었고, 그곳에서 만난 한 참가자를 통해 동티모르의 실상을 알게 됐으며, 결국 동티모르의 독립 운동을 돕게 되었던 것.

“캄보디아에서 광주 진료소를 운영하고, 네팔 지진 발생 때 긴급 의료 구호단을 꾸려 현장으로 달려갔던 것은 남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측은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광주는 인권과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핍박 받는 민중과 꾸준히 연대를 모색하며 지원하고 있습니다.”

윤 시장은 한 사람이, 한 사회가 각성하고 나서서 인권과 평화의식을 확산시키면 역사에 변혁을 가져온다는 확신이 있다. 

윤장현 광주시장은 바쁜 일정을 쪼개어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그는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며, 의대시절 뒤렌마트의 희곡 ‘황혼 녘에 생긴 일’을 연출하던 때를 떠올렸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아요. 고속버스를 타고 예술의 전당에 가서 공연을 보기도 합니다.”

문화적 소양과 사람에 대한 존중이 몸에 밴 윤 시장은 미완의 역사 5.18을 완성시키는 역할자로서 시장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윤 시장은 광주가 더 큰 연대와 협력의 사명을 감당해낼 수 있도록 끊임없는 관심과 지지, 그리고 응원을 부탁했다.

윤장현 시장(가운데)과 광주시 관계자들이 구겐하임 미술관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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