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세상을 심각하지 않게 바라보기 - 영화 '박열'을 보다
심각한 세상을 심각하지 않게 바라보기 - 영화 '박열'을 보다
  • 정브라이언
  • 승인 2017.07.02 0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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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없는 아나키스트의 독립운동은 어떤 모습?

아나키즘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무정부주의’라는 어감이 주는 공포가 아나키즘을 무법천지의 맘 내키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허황된 망상처럼 느끼게 하는 건 그 동안 아무도 아나키즘에 대하여 친절하게 얘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뉴스나 다큐멘터리나 정치에 관심이 있었으면 모를까 보통 사람이 아나키즘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이토록 관심 밖에 아나키즘이 놓여 있었던 이유는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조차 아나키즘은 도움도 해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박열과 아내 후미코가 감옥에서 찍은 사진, 영화에서도 이 장면은 그려진다. 감옥에서 두 사람이 동거 생활을 한다는 기사가 흥미롭다.

나는 아나키스트인가? 그 대답을 선뜻 말하기가 어렵다. 나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내가 아나키스트에 대하여 잘 이해하고 있어야 되고 나의 대답을 듣는 사람도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난 본인이 의식하지도 못한채 아나키스트일지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하게 되었다.

 영화 ‘박열’(이준익 감독, 2017년)을 통해 우리 모두 아나키즘에 대하여 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준익 감독은 2000년 유영식 감독의 영화 '아나키스트'에 제작을 맡으면서부터 박열을 머리 속에 두었다고 한다. '아나키스트'의 각본은 지금 명감독 대열에 올라선 봉준호가 썼다. '아나키스트'에서 세르게이(장동건)는 러시아로부터 독립군 후원 금괴를 운반하다가 배달사고를 내는데 영화 '박열'에서도 이를 살짝 언급한다.   

영화가 되었건 현실이 되었건 아나키스트가 바라는 세상은 현재 존재하고 있지 않다. 노동절 행진과 같은 대규모 시위에 오랫 동안 참여해 온 지인의 전언에 따르면 아나키스트들의 집회 참여 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점들 때문에 이상향을 꿈꾸는 허황된 생각이라고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나키즘이 존재하는 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고 아나키즘은 현재도 우리 사회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가 원하는 세상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독교를 부정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박열’ 영화는 아나키스트였던 박열과 그의 아내의 이야기다. 자칫 독립운동가였던 박열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민족주의 영화로 치부되는 것을 감독은 깊이 고민하였던 것 같다. 한국과 일본의 감정 대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아나키스트 박열과 그 아내의 삶을 보여주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을 이해시키기는 정말 쉽지 않은 문제였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진지함보다는 자유로움을, 강권, 강압보다는 정치적 책략과 그 정권을 지지하는 법의 모순을 드러내려 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자들이 박열과 그의 아내를 목 조여 올 때 그 이면을 바라볼 수 있었던 그들의 너무나 차분하면서도 자신 있는 행동들은 우리에게 묘한 웃음을 준다. 그 웃음이 익숙해질 때쯤 영화는 왜곡된 현실 속의 깊은 슬픔을 마주하게 만들고 그들과 같은 눈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신이라 불리는 천황 아들의 죽음을 통해 민중이 현실을 깨닫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랬던 그들의 행동을 이야기하면서 정권유지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권력자들의 비열하고 어두운 면을 영화는 블랙코미디로 그려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지만 민족주의자나 권력자들이 보기에는 좀 많이 못 마땅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이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 아나키즘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감독의 의도는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한 영화라면 중요한 사실이 될 수 있는 박열이 북한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왜 영화는 말하지 않았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아마도 감독은 박열이 사회주의자로 낙인이 찍히는 것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르고 있고 그 단어에 익숙하지 않지만 행동하고 깨어 있는 시민이 바로 ‘아나키스트’일지 모른다. 영화 속 법정 밖에서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외치는 함성처럼 우리도 지금까지 외치고 있지 않은가? 민족주의와 권력에 희생당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아나키스트’인가 확인하고 싶다면 자신에게 물어보아라! 지금 나는 스스로의 행동에 자신 있고 웃음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지를… 영화 속 그들의 웃음과 자신감의 원천은 그들의 행동이 누구를 위한 희생이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택한 결정과 삶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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