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보지 못한 자들의 영웅 서사- 군함도
이겨보지 못한 자들의 영웅 서사- 군함도
  • 김기대
  • 승인 2017.08.0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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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겨본 자들의 민중서사 - 덩케르크

차라리 역사 그대로 만들었더라면. 영화 '군함도'(류승완 감독)를 보고 나오면서 든 생각이다. 군함도로 불리는 하시마 섬 탄광에 끌려갔던 조선인 징용자의 실제 최후는 고국으로 돌아오던 배가 침몰함으로써 모두 수장되는 비극으로 끝났다. 일본인들이 저지른 고의적인 침몰인지 진짜로 풍랑이나 기관 고장으로 인한 것인지는 '설'만 난무하지만 자연적인 침몰이라 할지라도 그만한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해방이 되어서 제 나라로 돌아가려던 이들의 비참한 최후, 이것이야 말로 가공되지 않은 비극이고 신파 없는 리얼리티다.

하지만 감독은 익숙한 서사로 영화를 만드는 안전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선인 징용자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우여 곡절 끝에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탈출에 성공한다. 역사 속에서 이겨보지 못한 자들의 '한'이  영화에 투영되면서 관객들은 감동에 빠져들고 일본의 만행에 불끈한다.

하지만 이런 감동은 건강한가? 영화는 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출구를 찾아줄 영웅을 소환한다. 독립군 소속의 박무영(송중기분), 종로 주먹 최칠성(소지섭분),  악단장 이강옥(황정민분), 말년(이정현 분)의 네 영웅에 의하여 민중은 구출된다. 그리고 반대 지점에 변절한 영웅 윤학철(이경영 분)이 있다. 이들이 왜 영웅이냐고? 독립군 소속의 박무영은 당연히 영웅일 터이고, 최칠성은 옛날 깡패들은 그래도 낭만이 있었다는 근거가 불투명한 회고처럼, 즉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올법한 의리있는 주먹 영웅이다. 이강옥은 한국 문화에서 가장 공감하기 쉬운 '부성'을 통해 아버지=영웅이라는 공식을 비켜가지 않는다. 종군 위안부로 모진 시련을 견뎌낸 말년 또한 여성 영웅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제 역할을 해낸 배역도 당대 최고의 엘리트인 경성제대 학생이다.

그리고 영화는 가짜 영웅 윤학철에게 열광하는 민중들을 보여준다. 가짜에 열광했던 민중들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새 영웅 박무영의 지시를 순순히 따른다. 일본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믿어보자던 소수의 무리들은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친일 세력들이 한줌 밖에 안 된다는 희망을 제공한다. 실제로 한국 사회는 친일의 논리가 변함없이 득세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조선인 감시자, 조선인들간의 갈등,  도박, 음화를 거래하는 장면들이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논리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많았지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에 나올법한 조선인에 대한 폄하도 많이 거슬리지 않는다.

제 민족을 감시하고 학대하는 일은 이미 아우슈비츠 소재 영화에서 수없이 보아 왔던 캐릭터였다. 동료 유대인 수감자들을 가스실로 몰아넣고 그들의 시체를 치우는 일을 떠맡은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 같은 직책도 있었다. 심지어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병든 동료들을 '이슬람'이라고 불렀다. 초점 없는 눈과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던 환자 집단을 그렇게 불렀다. ‘껍데기만 남은 인간’을 뜻하는 독일어 ‘무셸만(Mushelmann)’이 무슬림으로 변했다고도 하고, 쇠약한 상체를 떨고 있는 그들 모습이 마치 무슬림들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들에 비하면야 환자와 여성, 아이를 먼저 구출하려는 조선인들은 훨씬 '우수한 민족'이다.

영화는 나름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이른바 '국뽕'영화가 되지 않기 위해) 이런 장면들을 삽입했지만 마치 20부작 드라마의  1,2회에서 등장 인물과 갈등구도에 대한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든 장면처럼 지루하고 과도했다. 말없는 표정으로, 특정 사건의 전개 방식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사실을 굳이 이강옥의 입을 통해 확인하는 장면은 거슬린다.

탈출에 성공한 이들이 탄 배에서 멀찌감치 나가사키의 원자탄 폭발현장이 보인다. 조선인들이 탄 배는 흑백으로 처리되지만 원자탄의 폭발장면은 칼라로 처리된다. 영웅들의 활약으로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영웅(미국)이 만든 화려한 색은 조선인들의 미래에 기다리고 있는 분단과 독재같은 암울함과 대비된다.   

덩케르크(Dunkirk,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역시 탈출에 대한 영화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40만여 명의 영국,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병력을 영국 본토로 탈출시키는 작전인 다이나모 작전을 소재로 삼았다.

덩케르크에는 '적(독일)'을 악마로 모는 과도한 전투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유일한 영웅적 구조자인 전투기 조종사들은 물에 빠져 피구조자가 되거나 적에게 생포된다. 반면 전쟁에서 늘 피보호자인 비무장의 주민들이 무장한 군인들을 구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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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가 영웅 서사라면 덩케르크는 민중서사다. 민간인의 유일한 희생자였던 청년은 신문에 한 번 나오는 게 소원이었던 철없는 청년이었다. 그는 선상에서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당했지만 신문은 그를 영웅으로 호명한다. 영웅이 될법한 두 명의 고위 지휘관이 영화에서 하는 일이란 하늘을 쳐다보는 일밖에 없다. 주인공 역할인 두 명의 병사가 하는 일이라고는 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온갖 수를 다 써서 탈출해 보려다가 실패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밖에 없다. 병사들을 구하는 어민들의 표정에도 비장함이 없고 그저 쳐 놓은 그물을 회수하러 가는 듯한 표정으로 일관한다. 그렇지만 영화는 인간이 만든 가장 추악한 '오락'인 전쟁의 무의미함을 잘 묘사한다.

영국으로 돌아온 '탈출된' 군인들은 낙오자가 아니라 용사처럼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이겨본 자들이 보여주는 여유고 이겨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 만들 수 있는 영화다. 실제로 이들 병사 대다수가 훗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자원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에 비하면 군함도는 허구에서라도 이겨보고 싶은 조급함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때문에 이기는 장면에서 민중의 역할은 축소된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는 출구없는 현실 세계의 민중들은 변함없이 구출을 기다리고 있다. 이 구출 작전에서 주체는 누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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