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일상] 폭력의 흔적, 그리고 발현.
[책과일상] 폭력의 흔적, 그리고 발현.
  • 김영웅
  • 승인 2017.08.31 11: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채식주의자 | 한강 | 창비 | 2007년
채식주의자 | 한강 | 창비 | 2007년

폭력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문신처럼 영원히 남아 자신이나 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야 만다. 다만 그 시기가 개인마다 다를 뿐, 뒤늦게 발현되는 형질을 가진 유전자처럼, 폭력이란 실체는 어떻게든 발현이 되어 결국은 그 파괴성을 드러내고야 마는 것이다. 영원불멸한 힘을 가진 것만 같은 치명적인 암세포처럼,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영혜에게 각인된 폭력의 흔적은 그녀가 성인이 되고 나서 느지막이 찾아온 어느 날 밤 그녀의 꿈에서 마침내 깨어났다.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그녀의 작품을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은 2004년과 2005년에 ‘창작과비평’, ‘문학과 사회’, 그리고 ‘문학 판’에 독립적으로 실렸던 3개의 중편 소설이 한데 묶여서, 각각이 하나의 챕터가 되어 전체적인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들려주는 하나의 장편 소설이다. 3개의 이야기 모두 영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흥미로운 점은 각 이야기를 풀어가는 시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 ‘채식주의자’의 화자는 영혜의 남편이다. 그는 눈치 보며 사는 적절한 기회주의자 같은 캐릭터를 가지고 있으며, 정신적이고 영적인 측면보단 물질적인 세계관에 물들어 있고, 별 특별할 것 없는, 이 시대에 부유하고 있는 수많은 평범한 직장인 중 하나로 표현된다. 그는 아내의 자해 사건 후, 별 미련 없이 아내를 떠나 버리고, 그 이후로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남자의 캐릭터 덕분에 주인공 영혜의 그로테스크하다고 할 수 있는, 비정상적으로 상처 입은 생각과 행동의 변화는 더욱 도드라진다. 아마도 작가는 영혜의 남편에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투영시켜 직접적인 관찰자로서 영혜의 변화를 바라보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날 밤, 나무처럼 서 있던 영혜를 직접 보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고기가 가득한 냉장고 앞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어쩌면 영혜의 남편은, 폭력의 피해자를 들어주고 도와주진 못할망정 자신의 삶을 훼손시킨 가해자로 치부하는, 공감불능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나도 당신도 어쩌면 모두 영혜의 남편인 셈이다. 당신은 주위의 상처 입은 영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가족이 모처럼 모인 자리에서 또다시 폭력을 휘두르는 영혜의 아버지처럼 폭력의 피해자의 뺨을 때리진 않는가? 아니면 그런 폭력의 피해자가 재폭력을 당하는 순간에도 사회에 잘못 뿌리내린 관행이나 예절, 권위 따위에 짓눌려 입을 다물고 바라보고만 있진 않는가?

두 번째 이야기, ‘몽고반점’은 영혜의 언니, 인혜의 남편 관점으로 쓰여 졌다. 영혜 남편과는 달리 인혜 남편은, 비록 경제적인 도움이 되진 못하지만, 월급쟁이 직장인이 아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다. 그가 가진 강박관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어느 날 아내로부터 들었던, 처제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손가락 크기만큼 아직도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묘하게도 그는 그 사실에 성적인 충동까지 느끼게 되고, 끝내 자신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영혜를 개입시킨다. 자해 시도 후 육신의 상처는 회복되었지만 영혼의 상처는 더욱 깊어져만 가는 영혜의 상태도 그에겐 별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건 후 영혜가 남편과 이별한 뒤 혼자 산다는 것이 그에겐 기회로 작용했다. 

몽고반점으로 시작된 그의 비뚤어진 강박관념과, 그로부터 파생되어 자신의 예술가적인 관점과 교묘하게 결합된 그의 바람은 결국 영혜와 몸을 섞는 극단의 상황까지 연출시키게 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피카소의 그림처럼, 그의 비디오 예술 작품의 극단적인 독특함만으로 그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생각과 계획, 그리고 행동으로 옮겨진, 그의 점진적이고 성실한 실천은 예술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어 영혜 남편과는 다른 인간의 또 다른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몽고반점에서 시작된 그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미 상처받을 대로 받은 영혜라는 존재까지도 이용해먹는, 비겁하고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이 별로 없고 일상과는 다른 그만의 섬에서 살아가는 예술가라는 점도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껍데기는 결국 자신의 사적인 욕구를 치장하는 도구이자 변명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럴듯한 명목 하에 숱하게 저지르는 불의를 우린 얼마나 덮어버리고 모른 체해버리며 합리화시켜 버리는가? 그런 이기심과 위선의 행위들이 벼랑 끝에 한 손만을 걸치고 매달려 있는 영혼의 그 남은 한 손마저도 밟아버리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가?

세 번째 이야기, ‘나무 불꽃’은 인혜의 관점에서 쓰인 이야기다. 영혜와 자신의 남편이 저지른, 겉으론 예술적일 수도 있겠지만 속으론 추하기만 했던, 그 사건은 그 동안 인내와 성실로 줄기차게 살아온 그녀도 버텨낼 수 없는 범위의 것이었다. 운명일까? 불행히도 그녀는 그 날, 그 사건 현장에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부른 구급대원이 들이닥쳐 두 정신병자를 호송하려는 순간 마주친 남편의, 오직 공포로 가득 찬 눈을 기억한다. 영혜와는 달리 그녀는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유연한 처세술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안위를 위해 비겁하게 불의와 폭력에 무릎 꿇은 침묵이 가져다 준 유익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사건 이후 남편과 헤어지고 자신의 아이 덕분에 근근이 삶을 유지해오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영혜를 정신병원에 살도록 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과 이 지경이 되도록 자신이 아무 손도 쓰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때문에 무너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녀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고 있는 셈이었다. 가장 가까웠던 남편도, 동생도, 동생 남편도 모두 자신에게서 떠났기 때문이다. 왜 죽으면 안 되냐는 영혜 앞에서 그녀는 그저 어릴 적 길을 잃어 숲을 헤맬 때 영혜가 집에 돌아가지 말자는 말을 떠올릴 뿐이다. 폭력이 가득하고 일상이 되어버린 그 집에 돌아가는 것보단 차라리 길을 잃고 헤매는 편이 더 좋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비겁함을 자책한다. 영혜와 함께 길 잃은 그 날, 운 좋게 얻어 탄 경운기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본, 저녁 햇빛에 불타는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나무 불꽃은 또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책의 마지막 부분, 나무가 되어가는 영혜의 육신적 생명을 연장시킬 목적으로 강제로 음식을 식도로 집어넣으려 하는 과정 중 예기치 않게 진정제를 놓으려고 했던 간호사를 제지시키려고 시도하고 나서 더운 피를 토하는 영혜를 싣고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다.

어릴 적의 나무 불꽃이 폭력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면, 책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나무 불꽃은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병원으로 긴급히 실려 가는 장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나무 불꽃의 장면에서 공통적으로 희생당하는 존재는 늘 그녀 자신이 아닌 영혜였다. 비록 예전과는 달리 가만히 있지 않고, 또 다른 폭력을 연상시키는 간호사의 행위를 제지시키려는 행동을 보였지만, 그녀는 결국 또 혼자 살아남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말한다. 만약 남편과 영혜가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랬겠노라고. 혼자 살아남은 슬픔. 그녀의 숙명인 것만 같다.

이 책 전체에 흐르는 여러 상징적인 의미들은 폭력을 대변한다. 대표적인 것이 육식이다. 영혜는 고기를 즐겨 먹는 가족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릴 적 영혜는 그녀를 물었던 개를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끈으로 묶어 여러 바퀴를 돌며 잔인하게 죽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개로 만든 고기를 먹었다. 그리고 권위와 무력으로 지배했던 그녀의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두 폭력의 잔인함과 비인간성을 의미하며, 영혜의 잠재의식과 무의식에 각인되는 폭력의 흔적을 남기는 이유가 된다. 그녀가 채식을 선택한 표면적 이유는 그녀가 꾼 꿈이지만, 그 꿈은 그녀의 심연에 각인된 폭력의 흔적의 발현일 뿐이었다.

책을 덮고 나니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영혜가 폭력의 피해자를 대변한다고 쳐도, 그녀의 반응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한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도 되겠지만, 결국 폭력의 피해자가 자기 자신에게는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것 같은 인상이 남는다. 자기파괴 역시 폭력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혜도 중요하지만, 난 작가가 3개의 이야기의 시점을 달리하여 쓴 이유에 대해서 궁금했는데, 나는 그것을, 이 책이 폭력의 피해자의 가슴 아픈 독백으로 남지 않고 그 주위 사람들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의 시선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려는 숨은 의도로 해석했다. 이론이 아닌 현실에서 손과 발로써, 마음을 담은 관심으로써, 공감함으로써, 먼저 다가감으로써, 상처 입은 영혼들을 도와주는 것.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당부하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글쓴이 김영웅은, 하나님나라에 뿌리를 두고, 문학/철학/신학 분야에서 읽고/쓰고/묵상하고/나누고/배우는 것을 좋아하며, 분자생물학/마우스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가난한 선비/과학자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