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 속의 그 사람, 김정남
영화 1987 속의 그 사람, 김정남
  • 김기대
  • 승인 2018.01.0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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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가 맡았던 그는 어떤 사람인가

1978년 고 조영래 변호사는 오랜 자료 수집 끝에 ‘전태일 평전’을 완성했다.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전에 이야기하던 전태일, 그는 평화시장의 살인적인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운동을 조직하다가 1970년 11월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를 외치면서 분신했다.

서울법대생이었던 조영래는 전태일에게 근로기준법을 읽어주고(당시 법전은 모두 한문으로 표기되어 있었기에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읽기 어려웠다) 설명해 줄 지식인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자책하면서 평전을 위한 자료를 장기표(재야 활동가, 그는 전태일의 소식을 듣고 시신이 있던 성모병원으로 제일 먼저 달려 갔다)와 함께 수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신정권이 최후의 발악을 하던 시대상황에서 완성된 원고의 출판이 국내에서는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불꽃이여, 나를 감싸라 –어느 한국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제목으로 일본에서 출판했다. 당시 수배중이던 조영래를 저자로 올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김영기’라는 가명으로 책을 출판하는데 ‘영’은 조영래의 ‘영’, ‘기’는 장기표의 ‘기’, ‘김’은 바로 영화 1987에서 설경구가 연기한 김정남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조영래와 장기표에 비해 김정남의 지명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영화 1987을 본 젊은 세대들 가운데 김정남이 실존인물이었는지 묻는 사람이 많지만 운동권 내부에서 김정남은 뛰어난 지략가였다. 조영래가 완성된 원고를 처음으로 보여주었다는 사실이 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일본 출판 역시 김정남이 주선을 할 정도로 기획력에 있어서도 김정남은 독보적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나온 김정남은 1964년 6•3 한일회담반대투쟁의 배후 인물로 구속되었고 여기서 ‘전환시대의 논리’의 저자 리영희와 함께 감옥생활을 하게 된 계기로 그와 오랫동안 교분을 나눈다.

김정남은 ‘민주회복국민회의’의 결성,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활동을 비롯해 한국 민주화운동 해외 지원 세력과의 연대를 담당한 기획통으로 알려져 있다. 그뿐 아니라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사건, 인혁당 사건 진상조사 요구 등에 함께 한 실질적인 '배후 조종자'였다.

이번 영화에서도 나왔듯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 후 대학가에는 간헐적인 시위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가 불을 질렀고 명동성당의 5.18 추모 미사에서 터져 나온 고문 경찰 은폐 폭로로 시국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이 과정에서 김정남은 재야 세력을 한 데 모으는 기획자였다. .

김정남은 선동적 글쟁이이기도 했다. 김영삼의 단식 선언문도 그가 작성했으며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김영삼의 명언도 실제로는 그의 ‘저작’이었다. 현재 현충원에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 묘소 비문도 그가 썼다. 리영희 선생의 딸 미정이 시위로 구속되자 리영희의 부인은 남편의 구속보다 딸의 구속을 더 아파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김정남은 부인을 대신해 탄원서를 썼고 옛 동료들(그러나 5공화국 하에서 변절한) 중 고위 공직에 있던 이들을 찾아 다니며 탄원을 한 결과 미정은 며칠 만에 풀려났다. 변절자들을 찾아 다니는 일이 그에게는 수모였으나 리영희 선생을 생각해 마다할 수가 없었다는 게 그의 회고다.

6.29 선언으로 김대중과 김영삼이 분열하자 김정남은 많은 재야 활동가들과 달리 김영삼 진영에 가담한다. 그가 김영삼 진영에 서자 이재오 김문수 제정구 손학규 이부영(영화에서 감옥에서 활동을 지원하던 김의성이 맡은 역할) 등 명망가들이 뒤따라 김영삼과 함께 한다.

이들은 왜 김대중에게 가지 않았고 김영삼에게 갔을까? 문익환 문동환 형제, 김근태 등이 김대중과 함께 한 것과 대비된다.

이것은 한국 진보세력의 고질병인 통일인식의 차이, 지역색, 엘리트 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김영삼에 가담한 이들은 진보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와 전두환이 만들어 놓은 ‘김대중=빨갱이’라는 등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들은 한국 사회가 진보세력에게 덧붙였던 빨갱이 이름표를 지우기 위해서는 김영삼이 더 안전하다고 보았다. 지리산 빨치산 조직인 ‘남부군‘을 소설로 극화하면서 대장 이현상을 알리는데 공헌했던 작가 이태 역시 김영삼과 함께 갔다. 이들은 빨갱이로 호명되는 터무니 없는 시대 상황과의 맞대결을 피해갔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진보신당이 분당되고 마침내 통진당이 해산되는 장면에서도 되풀이 되었다.

김정남이 김영삼 정부 첫 비서실에서 교육문화 수석을 맡았을 때 언론에서는 그를 가리켜 좌익 세력의 청와대 위장 잠입이라고 몹시도 흔들었다. 그 때 김정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에 비해 김근태는 가족의 대부분이 월북자였음에도 빨갱이 호명과 맞서 싸우면서 김대중과 함께 하는 ‘모험’을 감당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김정남과 그의 벗들의 노고는 인정하지만 그들의 시대정신은 딱 그까지였다. 어쨌든 그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정체시킨 3당 합당의 부역자들이었다.  3당 합당에 분연히 맞섰던 노무현의 시대 정신이 새롭게 부각되었지만 진보 세력 내에서조차 노무현 흔들기에 나섰던 현상도 재야 세력의 엘리트 주의와 닿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시대는 노무현의 시작과 함께 끝났어야 했다.

남은 이들의 현재 모습은 아쉽다. 이재오는 이명박의 방패막이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장기표는 어디서 무얼하는지 알 길이 없고 김지하는 이상해져 버렸다. 김문수는 뒤늦게 친박이 되는 실기를 범하면서 일선 소방관과 말싸움이나 하는 신세가 되었고 손학규는 만덕산 손학규로 희화화되면서 여전히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조용히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이부영만이 정상적인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부영은 지난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김부겸과 함께 신한국당을 떠났다는 점에서 과거를 참회한 듯 하다.

김정남은 그의 화려한(?) 경력에 비해 교육문화수석이 최고의 직책이었다. 숨어서 ‘배후 조종(?)’하는데 익숙해서였을까? 장관을 지낸다거나 국회에 진출하지 않았다. 김영삼과의 지나친 밀접함이 IMF이후 정치 지형에서 그의 설자리를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난 2005년 8월 김정남은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 독선·분열·무능·부패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당시는 노무현 정부 시절, 물론 운동권이 지고선은 아니고 비판받을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월간 조선과의 1994년 6월 인터뷰에서 김영삼을 추켜 세우던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조갑제의 질문에 대해 김영삼을 아주 위대한 대통령으로 칭송하며 울먹였다. 그는 "조국을 위해 불면의 밤을 지새며 고민하지 않은 사람은 나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면서 과거의 무용담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동아 인터뷰는 일선 후퇴 후에 그가 가진 세계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는 앞으로 몇 년간이 우리 민족이 웅비할 것인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가를 결정하는 갈림길이라고 봅니다. 그 해답은 해외로 적극 진출하는 것입니다. 굳이 명명하자면 ‘환(環)차이나 벨트’라고 할까. 옛날 우리 민족이 진출한 것처럼 연해주, 몽골, 중앙아시아, 동남아 등지로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재외동포의 수는 이스라엘이나 이탈리아보다 적지만, 이른바 4대 강국에 동포가 고루 배치된 구조를 가진 나라는 우리밖에 없어요. 저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홍익인간 이념으로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고 솔선하라는 하늘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지하의 냄새가 많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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