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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변호사 최영수

[뉴스M=신기성 기자] 플러싱 159가 할렐루야 서점 건너편에 위치한 최영수 법률사무소에서 그를 만났다. 최변호사는 2001년에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현대 그룹에서 1년 반 근무한 후 1999년 6월에 결혼을 하고 한 달 만에 이민을 오게 된다. 그의 아내 장진숙씨는 샌 안토니오 텍사스 주립대에서 학비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 받으며 생리학 분야 박사과정을 시작했고, 최 변호사는 그 도시에서 유일한 법학 대학원이었던 St. Mary's University 로스쿨을 진학했다. 로스쿨을 마친 최변호사는 뉴욕 주 면허 시험을 통과한 후 뉴욕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재정적으로 도움이 없이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샌 안토니오에서의 로스쿨 재학시절, 같은 학년 200여 명의 학생 중 유일하게 차가 없이 버스로 통학을 했다는 최변호사는 100도가 넘는 더운 날씨에 혼자 버스를 기다리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런 계기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최변호사는 주로 이민법, 상법, 형법 전문 변호사다. 이민법을 주로 다루고 있고, 상법은 주로 매매를 다룬다. 상가, 주택, 코압, 콘도미니엄, 비즈니스를 사고파는 일을 대리한다. 회사 설립과 임대차 계약서도 다루고, 퇴거 소송도 대리한다.

형법을 다루게 된 계기는 특별하다. 그는 뉴욕에서 검사 출신이 아닌 변호사로서는 유일하게 형법을 다룬다. 최변호사는 변호사 시험을 보던 중에 우연히 만난 박승환 전 부산 금정구 국회의원과 인연이 되어서, 부산의 법무법인 신성에서 1년간 근무하게 된다. 고국에서의 근무를 마친 후 뉴욕에 돌아온 최변호사는 한 로펌에서 취직한다. 미국에서 처음 변호사로서의 업무를 시작한 최변호사는 경험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로펌 특성상 각종 다양한 분야의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로펌에 입사한 지 한 달 만에 형사법에 저촉된 한인 유학생의 변호를 맡았다. FBI와 NYPD가 함께 함정수사를 해서 위조품을 만들어 판매하던 일당을 체포한 유명한 사건이었고, 한인유학생은 친구와 함께 우연히 그 곳을 방문했다가 체포된 경우였다고 한다. 피의자는 중범죄 혐의로 기소가 되었다. 재판에 관한 절차도 모른 체 이른 아침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법원에 머무르며 기소 여부에 관해 변호했던 적이 첫 번째 경험이었다고 한다. 이 후로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계속해서 중범죄와 경범죄 등 형사법을 대리해 오고 있고, 관련 추방재판 등도 대리하고 있다.

로펌에서 근무한 지 1년 반 만에 개업을 했다. 미국에서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개업을 하는 경우는 드문 경우이다. 그 1년 반 동안 9개 분야의 수백 개의 사례를 처리하며 배운 과정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대리 후 고객의 신뢰도가 높아서 다시 찾는 비율이 높다고도 했다.

오픈 포럼에서 DACA의 운명이라는 주제로 발제하고 있는 최용수 변호사 (사진출처: 오픈 포럼 유투브 갈무리)

시민참여센터 등 한인동포사회를 위한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계기가 있었습니까?

시민참여센터는 우연히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마 토요일 오후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살던 플러싱 집에 있었는데, 밖에서 풍물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호기심에 나가 보았죠. 그 때 건너편에 시민참여센터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풍물소리에 이끌려 나갔다가 현 시민참여센터 김동찬 대표를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동문 선후배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가깝게 지내게 되고 시민참여센터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유학생활로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했고, 그 후에 부산에서 1년간 로펌 근무를 한 후 뉴욕에 돌아 와 1년 반 동안 일에만 매달렸기 때문에 그 전에는 동포 사회의 실상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2007년에 플러싱 한인회와의 만남을 계기로 부회장직을 2년 맡게 되었고 뉴욕한인사회를 위한 봉사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인사회를 접하면서 미주 동포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죠. 현재 시민참여센터 이사장과 이민자보호교회 테스크포스의 일원으로 섬기고 있고, 수년간 뉴욕 주재 한국총영사관 고문 변호사로 일하였고, 2017년에는 1년간 낫소 카운티 감사원의 변호사로근무하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 제가 살고 있는 그레잇넥 주민들을 위한 봉사 등 몇개의 비영리단체에 몸담고 있습니다. 제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적은 단체에는 잘 나서지 않지만, 동포사회를 위해서 꼭 필요한 곳이고 그 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가능한한 참여하려고 합니다.

 

노래하는 변호사로 유명하신대요. 음악을 하게 된 동기가 있었나요?

초등하교 때부터 하모니커를 불러보며 음악을 즐겼고, 기타를 배우게 된 계기는 고등학생이던 형이 사 놓고 안 쓰던 기타를 가지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혼자 배우며 지냈습니다. 이광조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제가 연습하던 노래책의 첫 페이지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경남 함양의 작은 시골 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에서 제가 유일한 기타 연주자였기 때문에 소풍을 가서 기타를 치면 친구들이 무척 좋아하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다섯 명이 통키타 동아리를 만들어서 발표회도 하고 티켓도 팔고 공연을 했습니다. 불법써클에 제재가 많았던 때였지만, 다행이 같이 한 친구들이 공부를 잘해서 특별한 제재가 없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그 마을에서 공연은 처음이었다고 했습니다. 대학 때에는 고시 공부하느라고 연습을 많이 못했습니다.

미국에 와서는 그레잇넥에 집을 사면서 다시 기타를 칠 수 있었습니다. 처음 3-4년 동안 골방에서 혼자 노래를 하면서 악기와 앰프 등 장비를 하나씩 구입을 했죠. 그러던 중에 2016년에 한대수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대수 선생이 68세 이었죠. 한 대수 선생을 만난 후 은퇴후에 만들려고 했던 밴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기타로 박사학위를 하는 후배와 2016년 12월에 The Young Acoustic Band 라는 어쿠스틱 락밴드를 결성했습니다, 제가 기타와 보컬, 하모니카를 맡고, 나머지 분들은 다 전공자들입니다. 기타, 드럼, 키보드, 콘트라 베이스 등 다 학사, 석사 등의 학위를 가진 전문가들이죠. 그 분들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고 2017년에 5번 공연을 했습니다. 작년 12월에는 1주년 기념 공연을 한 적도 있고, 보통은 비영리 단체의 요청이 있을 때  가서 공연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시작했으니 햇수로 40 년이 걸렸다고 할 수도 있지만, 밴드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후에는 그 꿈이 굉장히 빨리 진행이 된 셈입니다.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하는 일이 있다고 하지만, 하지 않고 후회하는 일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했는데,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삶의 소중한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족이 제일 중요하고요, 밴드멤버들과 함께 관객들과 호흡하며 함께 노래할 수 있는 것, 제가 변호사로서 조금이나마 한인커뮤니티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현재 제가 직업으로 하는 변호사 업무가 제 삶의 가장 큰 부분이 되었네요.

Young Acoustic Band 창단 1주년 기념 콘서트 장면 (사진 출처: Young Acoustic Band facebook)

광고는 어떻게 하시나요?

2011년부터 상업광고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한인록에 3개 광고를 하고 미주 한인 신문에 광고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비영리 단체 활동을 하게 되면서 광고비로 내는 돈을  비영리단체에 기부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 더 보람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후로는 비영리단체의 행사에  후원을 하며 광고비로 처리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비즈니스 측면에서는 손해라고 볼 수 있지요. 광고를 안하니까 의뢰인 수가 조금 떨어지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광고는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연락처 등을 통해 대신합니다. 제 SNS에 연결된 사람들이 4천여 명이 됩니다. 이 분들은 과거에 대리했던 분들이나 지인들이고 이 분들이 맺은 인연으로 다시 찾아오거나 고객들을 소개시켜 주시지요. 제가 갖고 있는 소중한 비지니스의 원동력이지요.  물론 상용 광고를 내던 시절보다는 못하지만 대신 보람과 기쁨이 있습니다. 또한 제가 좋아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장기적인 계획이 있습니까?

큰 계획은 없이 현재 진행되는 삶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만, 제 아이들이 대학을 가고 성장해서 사회에 진출할 때가 되면 새로운 변화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사무실을 지금처럼 운영하지 않고, 대신 이동 주택 형식의 차량을 구입할 계획입니다. 변호사 업을 계속 하기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시스템에서 사무실 운영비로 들어가는 고정비용을 절약해서 더 저렴한 수임료로 변호사 업무를 제공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거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동 가능한 사무실입니다. 제가 원래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죠. 차에 기타도 싣고 다니며 연주도 할 수 있고, 고객이 원하는 곳에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한인 동포 중에 차 없는 분들도 계시고 거동이 불편해서 사무실까지 나오기 힘든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인 동포들이 많이 살지 않는 주나 도시에 사는 분들은 변호사와 상담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직접 방문해서 서비스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 주나 도시를 방문해서 교회 등을 통해 법률 상담이나 이민 상담을 할 수도 있고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보고 있습니다.

클래스 비 모터홈(Class B Motorhome)이라는 차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차 안에 사무실을 만들어서 말 그대로 이동 사무실을 꾸미는 거죠. 훗날 저의 변호업무는 이런 식으로 진화할 것 같습니다.

 

최영수 변호사가 지난 이민생활 동안 보여주었던 행보에서 그가 미주한인사회를 위해서 얼마나 애써왔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시민참여센타와 이민자보호교회 등 동포 사회의 권익 신장과 영향력 확대를 위해 땀 흘려 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이민 생활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변호와 도움의 손길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그는 봉사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했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동포사회를 위해서 함께 일하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동포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좋은 분들을 아주 많이 만났고 그 분들과의 만남이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분들 덕분에 자신이 성장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또한 많은 한인 동포들이 그와의 만남을 통해, 그리고 그의 봉사를 통해 도움을 받고 있고 한인 동포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최영수 변호사는 한인 2세들이 의사나 변호사 등의 직업을 갖는 것도 좋지만 동포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서는 지방 정부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각 도시나 카운티 정부에 한인 공무원들이 있으면 이민사회의 어려움들을 해결하고 도움을 주는 일들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감사원 근무를 통해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한인 동포들이 지방 정부에 적극적으로 들어가기를 추천하며, 실제로 각 기관장이 임명할 수 있는 임명직 공무원들도 있으므로 관심을 가지고 진출하기를 권면했다.

신기성  shin@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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