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이들 어떻게 양육해야할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이들 어떻게 양육해야할까?
  • 신순규
  • 승인 2018.02.08 0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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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도전, 사랑 중
신순규 이사장 @ <미주뉴스앤조이>

아홉 살에 시력을 잃고 시각장애인으로서 하버드와 MIT를 나온 후 월스트릿에서 공인재무분석사(CFA)로 활동하고 있는 신순규씨의 칼럼이다. 그는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 월가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가 전하는 일상의 기적』의 저자이기도 하다. JP 모건과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에서 20년 넘게 근무한 베테랑 애널리스트의 이력뿐만 아니라 결혼 후 9년 만에 어렵게 아이를 낳은 후 또 한국의 보육원에 살던 아이를 입양하여 돌보는 기적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신앙인이다. (편집자 주)

나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다. 앞을 못 보는 것은 물론 영어도 못 하는 15살의 아이가 어떻게 혼자 미국에 유학 올 수 있었는가하는 질문을 받곤 한다. 게다가 시각장애애인 학생이 어떻게 일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와 앰아이티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는가하는 질문도 받은 적이 있다. 또 일의 속도도 빠르고 경쟁도 심하다는 월가에서 애널리스트로 23년 넘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분들 중에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다.

어머니의 목표

2015년 10월에 출간된 나의 에세이집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 - 월가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가 전하는 일상의 기적>을 읽으셨거나 내가 가끔 했던 간증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 독자님들은 아시겠지만, 나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만이 설명할 수 있다. 100일도 되기전에 녹내장이란 진단을 받은 후 만7살때 망막 박리를 얻어 9살이 되던 해에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하지만 실명을 막기 위해 또 나의 교육을 위해 최선을 다 하신 부모님의 노력이 있었다. 또 내가 태어난 집안은 불교를 믿었지만 나는 초등학교 시절 복음을 접하고 예수님을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을 올 수 있었고 상상치 못했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한 사람의 간단한 아이디어를 통해 시작하셨다. 나의 어머니께서 생각해내신 나의 진로에 대한 아이디어가 바로 그 것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1970년대 한국에는 시각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이 아주 제한되어 있었다. 서울 맹학교를 비롯한 시각장애인 특수학교에서는 고등부 교육으로 안마와 침술을 가르쳤다. 그래서 대개 시각장애인들은 안마와 침술로 진로를 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안마와 침술 외에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만이라도 더 준비해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실명한 직후부터 피아노 레슨을 고집하셨다. 피아노를 가르쳐서 나를 음악 선생님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어머니의 목표는 지극히 음악 소질이 부족했던 나에겐 괴로움이었고 부담이었다. 그래도 어느정도 어머니의 목표를 위해 협조했다. 매일 레슨받고 열심히라기보단 자주 연습도 했다.

 

여름 캠프에서 얻게 된 날개

1980년 여름, 하나님께서는 연합 세계 선교회라는 단체에서 주최하는 여름캠프로 나를 인도하셨다. 처음 가보는 여름캠프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비가 많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실내 공간에서 시간을 많이 보낼 수밖에 없었다. 캠프에서 만난 친구들 앞에서 뽐을 좀 내볼까하는 생각에 나는 피아노를 쳤고 이를 보고 듣게 된 배리 플리트크로프트 선교사님의 관심을 얻게 되었다.

시기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처럼 완벽했다. 내가 다니던 서울맹학교 학생들로 조직된 남성 사중창단과 함께 미국으로 fundraising 투어를 가기 위해 준비하고 계셨던 선교사님께서는 나를 반주자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셨고, 이 것이 나를 결국 미국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계획의 직접적인 시작이었다.

그 다음 해 1월부터 3월까지 캘리포니아를 시작으로 플로리다에서 보스턴까지 콘서트 투어를 하던 중 나에게 풀 장학금 유학 기회를 준 오버브룩 맹학교 교장 선생님을 필라델피아에서 만났다. 1982년 여름에 오른 유학길, 나를 도와주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님의 소개로 만나게 된 오머셔씨 부부와 자녀들은 나를 그들 가족의 하나로 받아드려주기까지 했다.

 

Mom과 선생님들이 준비한 도전

유학 첫 해에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오버브룩 맹학교를 다녔다. 그 다음 해부터 4년동안은 북서 뉴저지에 있는 오머셔씨 댁에서 살면서 일반 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시각장애 학생들을 한 번도 교육해본 적이 없는 선생님들은 9학년때 honors 수학과목이었던 geometry 즉 기하학 공부로 나에게 도전을 주셨다.

한국에서 배운 것들을 많이 다루었기때문에 큰 도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미국 엄마, 오머셔부인, Mom과 선생님들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또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0학년이 되던 해 American Achievement라는 클래스에 나를 넣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 것은 honors 역사과목인 동시에 타프하기로 유명했던 Burkhardt 선생님의 과목이기도 했다. 미대륙이 유럽인에게 발견된 15세기말부터 현대까지 미국역사를 가속도로 공부하는 클래스였던 것이다.

나에게 이 과목을 강요하다시피한 Mom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10학년까지 미국에서 공부한, 어느정도 미국 역사를 아는 학생들에게도 부담이 되는 클래스였다. 나의 10학년 한 해는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책에 빽빽하게 적힌 역사 챕터 하나하나를 나의 말로 그 것도 에세이형태로 요약하는 일로 다 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에 5-6 챕터를 요약해야하는 날도 자잤다. 미국 역사를 처음 접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언어의 도전도 큰 문제였다.

대화 영어야 힘들지 않았지만 녹음된 교과서를 듣고 나의 말로 챕터 요약을 능률적으로 하기에는 나의 독해력과 글쓰기 스킬이 아주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향한 Mom의 소망 중 하나는 내가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보다 더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 것이었다. 대화할 때나, 글로 쓸 때나, 또 남들 앞에서 발표할 때도. 나는 10학년 역사과목을 통해 미국 역사를 배웠다기보다 독해력과 표현력을 배웠다. 그 것은 하버드나 MIT에서 공부한 모든 클래스를 합친 그 어떤 과목보다 나의 삶에 도움이 되었다. 책을 내고 칼럼을 쓰는 것도 그 때 습득한 글솜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사랑으로 아이를 설득

지난 칼럼을 읽으신 독자님들은 기억하실 것이다. 예진이가 10학년이 된 지난 9월 하루, 퇴근 후에 울고 있는 아이와 나의 집 사무실에서 2시간 넘게 대화했던 것을.

예진이는 2014년 4월에 미국으로 왔고 우리가 호스팅하게 된, 딸처럼 키우게 된 아이다. 10학년이 되면서 나는 문학 클래식과 역사 그리고 철학 등을 복합하는 인문과목 (Humanities course)를 예진이에게 권했었다. 영어를 한 지 3년이 좀 넘는 예진이에게는 어렵겠지만 독해력과 표현력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스킬을 습득하기에는 너무 좋은 기회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이는 너무 늦기전에 클래스를 drop해야한다는 주장을 했다.

영어도 딸리고, 문학 클래식, 철학, 역사 등은 익숙치 않아 너무 힘들고. 게다가 다른 학생들은 9학년때부터 Humanities track에 들어가 있었기때문에 자신이 그 아이들을 따라잡기가 불가능하다고 고집했다. 나는 나의 10학년때의 경험을 얘기해주었다. 아이는 “난 아빠가 아니예요”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이런 약속을 해주었다. 내가 많이 도와주겠다고.  Humanities program 선생님들께 이메일을 써서 예진이의 상황과 걱정 등을 설명해주겠다고. 필요하다면 tutor를 고용해주겠다고. 그래도 너무 힘들어서 F학점을 받으면 대학원서 에세이 쓸 때 그 경험에 대해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아이는 결국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기분은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았다.

4개월이 지난 지금, 예진이는 이 클래스를 즐길뿐만 아니라 클래스에서 성적이 제일 좋은 학생들 중 하나다. 그리고 내가 기대하지 못했던 혜택까지 얻고 있다. 독해력, 표현력, 생각하는 습관뿐만 아니라 그룹 프로젝트를 하면서 다른 학생들과 같이 일하는 방법까지 배우고 있다. 그 아이의 말이 맞았다. 예진이는 “아빠”가 아니다.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예진이도 몰랐던,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주신 달란트를 찾아냈다는 생각.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두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이 레슨을 기억할 것이다. 힘든 선택, 좁은 길, 남다른 노력 등을 아이에게 강하게 추천할 때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 나라에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양육하기보다 사랑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신순규 이사장 / YANA 선교회, 월스트릿 재무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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