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하지 않는 연주가 백혜선
안주하지 않는 연주가 백혜선
  • 뉴스 M
  • 승인 2018.05.05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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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음악원 백혜선 교수, 데뷔 30주년 앞두고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회 도전

한국인 최초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입상, 29세 최연소 서울대학교 교수. 11년 후 서울대 교수직을 버리고 도미. 피아니스트 백혜선 교수(뉴잉글랜드음악원)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다. 작년 9월에는 그의 모교인 뉴잉글랜드음악원의 교수가 됐다. 뉴잉글랜드음악원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 음악대학이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명성은 모르더라도, 뉴잉글랜드음악원은 처음 들어봤더라도,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사회에서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안다. 명예와 안정이 주어진 삶을 살 수 있었던 백 교수가 서울대를 박차고 나온 이유는 단 하나. 음악인으로 살기 위해서였다.

“저는 모든 면에서 대한민국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었어요. 텔레비전에도 많이 나오고 여성잡지도 많이 나왔죠. 그런데 전 그게 편하지 않았어요. 사람이 가장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고 생각했지요. 보통은 30년 동안 자기 분야에 경력을 쌓아야 서울대 교수가 되는데, 저는 30대에 가졌어요. 한국사회에선 서울대 교수가 최고인 것처럼 여겨지지요. 하지만 저는 음악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려면 삶이 힘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했어요. 예술 하는 사람이 삶이 쉬우면 안 된다고.”

좋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쉽지 않게 살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나 보다. 백혜선 교수는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의사인 부모님 밑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자랐다. 바쁜 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워줬던 아르바이트 학생은 백 교수를 피아노 소녀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그 아르바이트 학생은 보스톤으로 유학을 가며, 중학생이었던 백혜경을 데리고 가겠다고 한 것이다. 아버지는 보수적인 대구 사람이었다. 여자가 무슨 유학이냐며 끝까지 반대했다. 얌전히 있다가 시집이나 가라며 항공권까지 찢은 아버지였지만 자식을 이기진 못했다.

피아노와 결혼하다

아버지는 백 교수가 교회 반주자로 만족하길 바랐다. 다소곳이 있다가 24살이 되기 전에 결혼을 하는 게 여자로서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백혜선 교수는 미국에 가서도 교회 반주를 열심히 하겠다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만나게 될 변화경 교수(뉴잉글랜드음악원)가 백 교수의 아버지와 선후배인 것도 아버지 마음을 움직이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허락하시는 순간에도 유학 가면 하버드대 출신 남자를 만나 결혼하라는 말을 하셨다.

아버지가 백혜선 교수를 인정하게 된 것은 1989년 윌리암 카펠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이다. 1위 부상이 링컨센터에서 독주회는 여는 것이었다. 당시 암 선고를 받으신 아버지는 독주회에서 백 교수의 연주를 들은 후, 딸의 실력을 인정했다.

“1위라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도 너 혼자 나가서 1등 한 거 아니냐고 하셨어요. 그런데 연주회와 연회를 참석한 아버지께서 생각이 바뀌셨어요. 아버지께서 한국에 돌아가시며 우리 딸이 교회 반주만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성장할지 몰랐다 하시며 네가 결혼하는 것은 못 볼 수 있으니까 네가 피아노랑 결혼했다고 생각하겠다고 하셨죠. 그리고 6개월 안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며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건 피아노랑 사는 거니까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변화경 교수와 러셀 셔면 교수 부부는 백혜선의 삶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스승이다. 러셀 셔면 수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쳤지만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러셀 셔면 교수는 ‘음악은 1%의 음악적 요소와 99%의 비음악적인 요소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로 기교를 익히기 전 인간이 될 것을 강조하며 음악 외적인 부분에도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지고 공부할 것을 요구했다.

뉴일글랜드음악원에서 공부를 할 때 러셀 셔면 교수는 매주 에세이 한 편을 쓰게 했다. 백 혜경 교수가 한 주 받은 에세이에는 항상 빨간 줄이 가득했다. 그리고 고어 같은 어려운 단어를 30개씩 외우게 했다. 백교수는 중학교 때 유학을 왔기 때문에 소통하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스승 앞에만 서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 전공자에게 단어 시험에 에세이라니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러셀 셔면 교수는 음악도 표현 작업이기 때문에 글로도 표현을 잘 해야 연주할 때 자기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백혜선 교수가 자신이 얻은 것에 안주하지 않고 피아니스트로 새로운 목표를 세우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은 이 스승들의 가르침 덕일 것이다. 지금도 변화경 교수와 러셀 셔면 교수는 아직도 백 교수가 게을러지지 않는 원동력이다.

“저는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에요. 어느 정도만 하면 좀 쉬어볼까 생각하죠. 그런데 선생님들은 그렇게 못하게 하세요. 지금도 통화를 하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다시 마음을 잡지요. 진실된 예술가 앞에선 저도 평범한 아줌마에요. 러셀 셔면 교수님이 88세이신데 매일 연습을 하세요. 일요일에도 연습을 하시죠. 얼마 전 일요일에 선생님 연주를 듣고 울었어요. 저 나이에도 저렇게 연마를 하시는데, 나는 힘들다고 투정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엔터테이너가 아닌 음악인으로

“음악을 하려면 어떤 경우에도 음악을 버리지 않을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음악은 부귀영화를 주는 직업이 아니에요. 그래서 성공에 목을 매면 음악을 할 수 없어요. 그건 종교인들과 같지요. 위치는 자기 연마를 한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엔터네이너가 됩니다. 유명세를 따라가게 되면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을 넘어갈 수 없어요.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자기 연마를 통해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시간이 행복한 시간이고 축복이라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두 스승 덕에 백혜선 교수는 학생들에게, 자녀를 말로 가르치기 전 삶으로 본을 보이는 것을 배웠다. 교수로 연주자로 부모로 또 일요일에는 교회 성가대 음악감독으로서의 삶을 모두 감당하는 것은 오로지 먼저 행함으로 가르친다는 철학 때문일 것이다. 백교수는 스스로 열심히 하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하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자녀도 그렇게 길렀고 학생도 그렇게 가르쳤다고 했다.

“아이들은 부모가 책을 보면 따라 책을 본다고 하잖아요. 말하지 않아도 부모가 먼저 행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는 거죠. 그러면서 습관이 들어요. 아들이 음악을 합니다. 저는 처음에 반대했어요. 그 길을 잘 알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오더니 음악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본인이 성공을 하지 않더라도 행복하게 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그게 음악이더래요. 전 아들에게 앞으로 음악하며 만나는 어려움은 너만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 줬어요.”

백혜선 교수의 걸음이 본이 된 것일까. 그의 아들은 얼마전 미국 영아티스트 프로그램에서 첼로 부분 우승을 했다. 주로 시니어 참가자들이 선발되는데, 주니어로 참가해 우승을 한 것이다.

‘지금부터 새로운 시작이에요’

본인 스스로를 극복하며 살아가는 삶은 그의 신앙에서도 드러난다. 백혜선 교수는 오랫동안 뉴욕한인교회에서 음악감독을 했다. 처음 교회를 다닐 때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백 교수는 그것이 목사 탓, 다른 교인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는 다른 사람 탓하는 곳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며 내가 책임지는 성가대를 통해 사람들이 은혜받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나를 알아달라고 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것은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본인이 작아져야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되지요. 저는 그래서 어떤 곳에도 그냥 머물려고 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정점이라고 이야기할 때도 언제나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지요.”

안주하지 않는 연주가 백혜선 교수. 그는 데뷔 30주년을 앞두고 또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한다. 2년 반 동안 ‘베토벤 소나타·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하는 것이다. 한 곡당 30분~1시간 되니 한 공연 당 4~5개씩 연주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 베토벤 음악은 널리 알려진 곡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음악으로 해석하여 연주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백혜선 교수는 우울할 때 베토벤을 듣는다고 했다. 어려움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작곡가, 그의 노력이 백혜선 교수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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