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농단의 시대, 법이란 무엇인가?
법 농단의 시대, 법이란 무엇인가?
  • 이범진
  • 승인 2018.10.18 02: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독법률가회 신임 사무국장 이병주 변호사 인터뷰
바야흐로 법 농락의 시대. 정화(淨化)의 물꼬가 꽉 막힌 이때, 가장 기본적인 질문 ‘법이란 무엇인가?’ 묻고자 기독법률가회 이병주 신임 사무국장을 만났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전무후무한 법 농단의 시대다. 사법부의 우두머리가 행정부와 재판을 거래하며 스스로 삼권분립의 원칙을 깼다. 심지어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내겠다고 한 손해배상청구를 ‘각하 또는 기각이 마땅하다’는 결론이 담긴 문건을 작성했다. 최근에는 비자금 조성 정황이 포착되어 더 충격을 주고 있다. 한편, 첫 미투 판결이었던 안희정 1심의 결과가 무죄로 나오면서 약자를 보호해야 할 법이 오히려 우리 사회의 진일보를 가로막고 있다는 비판이 일었다. 한국교회는 어떤가? 예장통합 재판국은 지난 8월 7일 총회 헌법의 세습금지조항을 무시하고 명성교회의 세습을 정당화해주는 판결을 내렸다. ‘아들에게 물려줬지만, 세습은 아니다.’ 기독법률가회는 성명을 통해 “법리를 떠나 건전한 상식인의 눈으로 보아도 기이한 주장”이라며 재판국의 판결을 비판했다.


바야흐로 법 농락의 시대. 정화(淨化)의 물꼬가 꽉 막힌 이때, 가장 기본적인 질문 ‘법이란 무엇인가?’ 묻고자 기독법률가회 이병주 신임 사무국장을 만났다. 그는 하버드 로스쿨(LLM)에서 유학하고, 변호사로서 국내외 수백 건의 민·형사 사건을 수행한 베테랑 법률가이다. 또한, 2011년 대한변호사협회 기획이사를 맡으며 공공활동에 눈을 떴고, 법학·정치사회학·신학을 연결 짓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그의 경험과 고뇌, 연구 결과를 통해 우리를 둘러싼 법의 실체를 가늠해보았다.

― 8월부터 기독법률가회(Christian Lawyers’ Fellowship, 이하 CLF) 사무국장을 맡고 계십니다. 복상 독자들 중에서는 CLF를 모르는 분들도 꽤 있을 텐데요. 간단하게 소개해주세요.
CLF는 기윤실 법률가모임을 모태로 해서, 1999년 1월 개혁적인 복음주의에 기초한 법률가 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자는 평신도 대중단체로 출발했습니다. 내년 1월이면 20주년입니다. 2009년부터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면서 전국 25개 로스쿨에서 기독인 모임이 생겼고, 그때 기존의 기독법률가들과 사법연수원 신우회, 그리고 로스쿨의 기독인 모임들이 한데 모여 제1회 기독법률가회 전국대회를 열었고 올해로 10회 대회를 마쳤습니다. 매년 여름에 열리는 전국대회에는 300~500명 정도가 모입니다.
 
― 전국대회에서는 주로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하나요?
법률가로서 기독교 신앙과 직업인으로의 삶을 어떻게 연결하고 통합할 수 있는지를 주로 이야기합니다. 아주 오래된 주제이지요. 그런데 최근의 고민들은 20년 전, 변호사들이 기득권 집단일 때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초기에는 성공 욕망이 팽배한 기득권층으로 가득한 법조계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측면이 강했다고 합니다. 방어적인 자세였다고 할까요. 그러다가 리더가 점점 더 확충되면서 법률가라는 전문직으로서 신앙 실천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사명감이 더 생긴 것 같아요. 특히 올해, 전국대회로는 10년째이고, 모임 시작으로는 20년째를 맞아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직업 사명을 신앙과 신학으로 조망해보자고 생각을 모았습니다. 법률가인 동시에 평신도로서, 무너진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 힘을 모으자고요. 나아가 다른 단체들과 연대하면서 책임을 함께 지자는 데 공감대가 쌓였습니다.

― 예장(통합) 총회 재판국의 명성교회의 세습을 인정해주는 판결이 있은 직후, CLF에서 이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세습반대운동을 하는 활동가나 단체가 든든함을 느꼈던 게 사실입니다. 내부 의견 일치가 어렵지는 않았나요?
그동안 저희가 성명을 자주 내는 단체는 아니었죠.(웃음) 그럼에도 ‘명성교회 세습’과 관련한 성명을 발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우리가 20여 년간 쌓여온 공감대가 있잖아요. 보통 의견 대립이 5대5나 6대4 정도면 팽팽한 거라고 보지요. 박근혜 탄핵 때가 8대2 정도로 나뉘었다고 볼 때, 우리 내부에서 명성교회 건은 9대1 정도로 압도적이었어요. 그만큼 총회 재판국의 판결은 신앙적 양심과 상식이 있으면 반대할 수밖에 없는 판결이었던 거지요. 아무래도 저희가 법률가 모임이다 보니, 이번 성명이 많은 분에게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 같아요. 저희로서도 감사한 일입니다.

― 총회 재판국 판결 소식을 들었던 순간, 개인적으로는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요?
솔직히 ‘이건 진짜 미친 거 같다…’ 그런 생각이었죠. 꽤 충격을 받았어요. 명성교회 평신도들의 무조건적인 충성이 세습을 가능하게 한 것도 있지만, 교단 총회의 재판국이 이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예상을 못했어요. 이거는 재판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게, 판결문 자체가 명성교회 측 주장을 거의 100% 그대로 베낀 것입니다. 사실상 재판이 없었다고 봐야죠. 비교적 양호한 이미지였던 통합 교단이, ‘기독교는 무법천지’라는 이미지를 온 세상에 각인시킨 겁니다. 한국 사회는 법으로 대통령까지 탄핵한 엄청난 나라인데, 이런 나라에서 개신교의 주요 교단이 법을 이용해 말도 안 되는 판결을 낸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죠. 이런 판결을 한 재판국원과 명성교회 측 변호인들은 법도 배신하고 신앙 양심도 배신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 김하나 목사 청빙을 ‘세습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8명은 ‘은퇴 후 2년 뒤에’ 청빙 과정을 밟았기 때문에 청빙은 적법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총회 헌법 정치편 28조 6항을 보면 ‘해당 교회에서 사임(사직) 또는 은퇴하는 위임(담임)목사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가 청빙될 수 없음이 명확함에도, ‘은퇴하는’이라는 표현과 이미 ‘은퇴한’ 목사를 구별한 것인데요. 이런 논리가 법적으로 볼 때 어떤가요?
언어유희죠. 그야말로 말장난이에요.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논리입니다. 법은 그렇게 고무줄을 늘이거나 줄이듯 해석하는 게 아닙니다. 명성교회 측 논리대로면, 임기가 오늘 끝나는 목사가 오늘까지는 ‘은퇴하는’ 목사라서 아들한테 못 넘겨주다가, 밤 12시가 땡 넘어서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얼마든지 교회를 아들에게 넘겨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루 전에는 ‘은퇴하는’ 목사였지만, 하루 뒤에는 이미 ‘은퇴한’ 목사가 되었으니까요. 이건 말이 아니고 당나귀입니다. 온 세상을 우습게 보고 이런 판결을 내린 재판국 위원들은 징계를 해도 모자랍니다. 특히 이런 억지 논리를 만들어 총회 재판국과 한국교회를 바보로 만든 명성교회 측 변호인은, 진심으로 회개하고 기독교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번 판결이 교단 분리까지 이어질까요?
총회 헌법상 재심할 수 있으니까 일단 최후의 기대는 아직 남아있겠지요. 정신을 차리고 상식에 근거한다면 판결이 뒤집히겠지만, 안 되면 못 견디고 나가는 분들이 생기겠죠. 민주주의 제도는 인간 세상의 각기 다른 주장과 욕망이 뒤엉켜 싸우면서도 공생의 길을 모색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 제도를 통해서 여러 사회문제를 해결해왔고, 우리나라는 궁극적으로 헌법을 어긴 대통령의 탄핵까지 이루어낸 사회입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대형교회 하나가 교회의 공적이고 민주적인 질서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을 총회 재판국이 옹호하고 있습니다. 한 개별 교회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 지난해 말에 변호사님이 쓴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과 21세기 교회개혁의 네 가지 과제>라는 글에 보면, “명성교회 세습은 그 자체로는 안타깝고 화가 나는 일이지만, 과잉된 개교회주의의 종국적 결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한국 기독교에 있어서 구시대의 종말을 선고하고 새 시대의 시작을 요구하는 이정표가 되었다”고 긍정적인 의미를 도출하기도 하셨는데요.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고 개별 교회에 충성한 결과를 명성교회가 보여주었잖아요. 사실 명성교회 세습 과정을 보면서 저도 개인적으로 시험에 들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돈 문제일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아들 김하나 목사 입장에서는 세습 안 하는 게 좋아요. 세습 거절하면 얼마나 모양이 좋습니까. 그런데도 억지로 세습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교회에 뭔가 돈 문제가 있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수밖에 없죠. 그때 들었던 생각이 평신도들이 교회에 충성한다고 헌금한 돈, 기를 쓰고 갖다 바친 돈이 결국 교회에 독(毒)을 쌓는 결과를 낳았다는 거였어요. 교회에 쌓인 은과 금과 힘이라는 그 독에 취해서 목회자도, 교회도, 교단도 망하는 파국에 이른 거죠. 역설적으로 김삼환 목사가 나쁘지만, 자기 스스로는 교회를 사랑한다고 믿고 돈을 쌓아 교회에 돈을 부어 독을 쌓은 명성교회의 평신도들이 더 나쁩니다. 그들은 자기 교회를 너무 사랑하니까 안정되게 유지하려고 교회 세습에 찬성한 거겠죠. 그게 틀린 건지 모르거나, 알아도 교회를 너무 사랑하니까 안정을 깨기 싫으니까요. 평신도 신앙의 실패가 어떻게 한국교회 전체를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명성교회 세습은 평신도들이 지금까지 믿어온 식으로 맹목적으로 개별 교회에 충성하면, 어떤 재앙이 벌어지는지 반면교사 역할을 하고 있어요. 많은 평신도가 이 지경까지 이른 한국 기독교를 보며, ‘이건 아니다’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제는 더 헌금하기 싫어지고, 교회 다니기도 싫어지죠. 명성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과 같은 파국적 상황이 개별 교회가 아닌 더 큰 그림을 보게 할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명성교회가 무너지는 모습이 한국 기독교의 새 시대를 알리는 이정표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 ‘평신도 신앙의 실패’라는 표현이 정확한 것 같습니다. 2015년에 평신도 신앙의 문제를 파헤친 《평신도의 발견》(아포리아)을 출간하셨죠?
제가 CLF에서 토론한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 현실이 ‘위로받는 신앙’에만 집중하고 ‘씨름하는 신앙’으로 나가지 못하는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한 책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교회 밖 사람들만 죄인인 것처럼 가르치고 배우고 그렇게 여기며 쭉 살아왔습니다. 교회 밖 사람들을 정죄하며, 스스로는 죄인이 아니라는 착각에 빠져 가짜 안식을 누린 겁니다. 죄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회개로 시작하는 기독교가, 오히려 회개할 줄 모르고 죄에 대해서 무감각한 기독교인들을 만든 것이지요. 그 끝은 지금처럼,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아무 잘못이 없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모습입니다. 평신도들은 자기 신앙이, 자기가 믿는 복음의 내용이 실제 삶에 어떻게 반영되고 사회의 공적 질서에서 어찌 전개되는지를 배우고 고민하고 깨달아야 하는데, 이 점에 완벽하게 실패한 겁니다. 요즘 ‘사법 농단’의 정점으로 거론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하더군요. 한국교회의 평신도 신앙은 교회에서도 실패하고 사회에서도 실패하는 양상입니다.  

― ‘평신도 양승태’의 실패가 사법 농단으로 이어졌다고 봐도 무관하겠군요.
그분도 지금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 주변 교인들도 고난받는 그를 위해 엄청나게 기도해주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과연 진정한 회개로 이어질까요? 아니요. 그동안 한국교회는 평신도에게 직장과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거라고 가르쳤습니다. 잘못된 신앙이죠. 오히려 신앙인이라면 막중한 공적 책임을 직시하고 그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를 고민했어야지요. 세상에서 담당하는 사적, 공적 역할에는 어떤 책임과 위험이 따르고, 어떤 욕망을 억제하고, 어떤 유혹을 이겨내야 하는지 기준을 명확하게 세웠어야 하는데, 평신도로서 양승태 대법원장은 교회에서 그것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양승태 씨는 사법부의 최고 책임자였잖아요. 올라갈 데까지 올라간 사람이 행정부와 ‘재판 거래’를 할 정도로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상고법원을 만들고자 집착했던 게 시작이었다고 봐요. 쉽게 말해서 대법원에서 처리해야 할 사건들이 많으니까, 고등법원과 대법원 사이에 상고법원을 만들어서 중간 처리를 하려고 했던 거였죠. 사실은 독일처럼 대법관 수를 늘리면 문제를 훨씬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어요. 우리는 현재 대법관이 13명인데, 40-50명 정도까지 늘리면 됩니다. 그런데 소수 엘리트 성격을 유지하고 싶으니까 대법관 수를 보강하기보다 상고법원을 만드는 쪽으로 해결하려 한 거죠. 상고법원을 만들면 법원 조직도 더 커진다는 이익도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보면 엘리트 법관들의 교만함이자 조직 이기주의가 이 사건의 원인입니다. 사실 대법원 상고가 많다는 건 아주 오래된 문제였어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꼭 자기 임기 중에 상고법원을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한 업적을 남기고 싶었던 거겠죠. 여기에 대한 집착이 크니까 정부에 로비하고, 사법부의 장이 스스로 삼권분립 제도를 깨는 장본인이 된 겁니다. 간신에는 여러 유형이 있어요. 시키는 대로 하는 무능한 관료 간신, 아첨하는 언론 간신, 생존형 공무원 간신 등이죠. 양 전 대법원장의 경우는 좀 다른 유형입니다. 간신이 될 필요가 없고 간신이 되라고 강요하는 자도 없었는데, 자기 이익과 자기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간신이 된 경우입니다.

― 업적 욕망 때문에 ‘무리수’를 두다니,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입니다.
한마디로 꽂힌 거죠. 욕망에 꽂혀서 망한 겁니다. 안 해도, 무시해도,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양 전 대법관이 간신 노릇을 하게 된 모티프는 한국의 제도 교회가 역사 속에서 정권과 결탁한 원리와 비슷합니다. 제도 교회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과 결탁하는 일들이 공식·비공식적으로 있었지요. 그 중심에는 교회가 사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교만과 교회의 제도적 이기주의가 있습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법관들은 세상에서 심판을 하다 보니 교만해지기가 쉬워요. 그러한 오만이 모여 저지른 일인 거죠.

― 엘리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법조계에서 권력의 생리를 더 잘 목격할 것 같습니다.
같은 법조인이어도 역할이 다 다릅니다. 보통은 법조삼륜(法曹三輪)이라고 해서 판사, 검사, 변호사로 나뉘죠.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법 역사가 5천 년입니다. 오랜 시간 인간 세계의 여러 갈등을 다루면서 완전하지는 못해도 합리적인 쪽으로 발전한 면이 있어요. 역사적으로 차곡차곡 쌓여온 제도인 만큼 한 개인이 제도를 왜곡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럼에도 사법제도와 재판 절차에는 그때그때 허용되는 재량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틈을 공간으로 법조인들의 개인적인 욕망과 죄성이 활동합니다. 판검사는 심판자로서 권력에 취할 수 있는 위험에 잘 노출되지요. 변호사들은 출세보다는 비즈니스적으로 자기 이익에 대한 유혹에 빠지고요. ‘양승태 사태’는 그 재량의 경계선을 넘어버린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문제는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올바르게 쓰지 않으면 많은 사람을 해친다는 것입니다. 모든 힘에는 사람을 해치는 악이 내포되어 있어서, 힘이 적으면 적은 대로, 힘이 세면 셀수록 더 큰 악을 행할 능력을 부여합니다.

"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집회와 시위, 국회, 헌법재판소, 검찰, 특검, 법원 등 1987년 민주주의 헌법의 모든 법 제도와 절차를 다 동원해서 민주주의 혁명에 성공했어요. 세계를 향해 마음껏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훌륭한 혁명이었습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모든 힘에는 악이 내포되어 있다?
박근혜 사태만 봐도 권력 그 자체가 악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잖아요. 박근혜 국정 농단, 양승태 사법 농단, 김삼환 부자의 교회 농단은 모두 권력과 힘이 악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본인들만 몰라요, 자기들이 ‘악’이라는 사실을. 이것은 인간 역사에서 발견되는 일관된 현상인 듯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권력을 잡아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가 그래서인가 싶기도 해요.

― 법체계가 사회의 진보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혁명은 법을 발전시키고, 법은 혁명을 정착시킵니다. 보통은 ‘혁명은 법을 싫어하고, 법은 혁명을 싫어한다’고 말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특별히 저는 20대에는 법을 어기면서 혁명을 추구하며 민주화운동을 했었고, 30-40대에는 법률가로 일하면서 법으로 먹고살아서, 양쪽에 끼여 늘 그 주제를 고민했습니다.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이성, 자유, 평등, 박애를 담은 인권선언을 선포했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혁명가들도 서로를 너무 많이 죽이는 비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은 결국 민주주의 혁명을 민주주의 헌법 제도로 정착시켜서 그 이후로 2세기 남짓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 혁명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법으로 혁명을 잘 정착시키면서도 법 전통을 이어가야 하는 거죠. 하버드 로스쿨의 해롤드 버만 교수가 쓴 책 《Law and Revolution(법과 혁명)》은 그리스도교가 서양법 전통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유럽 역사에서 법과 혁명의 관계를 기독교와 연결 지어 설명하는데, 그에 따르면, ‘천년왕국적 이상주의’와 ‘현실적 적합성’은 대립 개념이 아니라 성공한 혁명의 양대 필수 요소입니다. 개인의 권리/공동체의 복지, 안정/변화, 질서/정의, 실정법/자연법 사이에는 대립적 긴장이 존재하지만, 둘 다 필수적이라는 거지요.

―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 정부를 탄생시킨 ‘촛불혁명’은 어떻게 평하시는지요?
이번 촛불혁명이야말로 세계 역사에서 찾기 어려운, ‘법대로’ 혁명을 성공시킨 ‘법률적 혁명’(Revolution by Law)입니다. 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집회와 시위, 국회, 헌법재판소, 검찰, 특검, 법원 등 1987년 민주주의 헌법의 모든 법 제도와 절차를 다 동원해서 민주주의 혁명에 성공했어요. 세계를 향해 마음껏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훌륭한 혁명이었습니다. 그전에 1987년에 민주주의 혁명이 있었고, 2017년에 1987년 헌법에 따른 촛불혁명이 있었습니다. 한 혁명이 정착하는 데에는 한 세대가 걸린다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민주주의 혁명의 한 호흡에 딱 30년이 걸린 것입니다. 1987년 이후 보수정권 10년, 진보정권 10년, 다시 보수정권 9년, 약 30년 동안 쌓인 정의의 열망 의지가 터지고, 민주주의를 단단하게 확보한 것이지요.

― 지난해 5월에 《박근혜 사태와 기독교의 문제》(대장간)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민주주의는 무엇인가?’라는 부제가 붙었는데요.
미국 풀러 신학교에서 신학석사(MAT) 과정을 마무리할 때쯤이었어요. 2016년 11월에 한국은 막 탄핵 정국으로 갈 때인데,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었죠. 한국 민주주의는 꽃을 피우려는데, 미국은 민주주의 양심이 다 꺾인 겁니다. 그때 제 주변 중남미계 이주민들은 많이 울고 그랬어요. 인종주의자 대통령이 당선된 거잖아요. 미국과 한국 모두 기독교인들이 활약한 것은 공통점이지만, 우리나라에서의 그 영향력은 우습고 미미했던 반면에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실제로 트럼프를 당선시키는 데 변수로 작용했어요.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23% 정도 됩니다. 그중 60-70%가 공화당을 지지해 왔는데 트럼프 당선 때는 80%가 지지했어요. 우리나라를 보면 민주주의의 희망이 보이는데, 미국을 보면 극단적으로 퇴행하고 있어요. 두 나라의 기독교인들은 민주주의의 퇴행에 기여하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래서 도대체 기독교인들에게 민주주의라는 것은 무엇인가 따져 보고 싶었습니다. 기존에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로마서 13장 들이대면서 권세에 복종하라고 했고,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아모스 5장의 ‘정의가 강물처럼’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죠. 경건주의자들은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경건 생활에만 집중하자고 하지요. 성경의 ‘권세’ ‘정의’ ‘경건’ 등 한 단어만으로 민주주의를 풀어내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 책에서는 십계명과 주기도문 등과 관계지어 민주주의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십계명과 주기도문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가 다 드러나지요. 이웃 사랑 부분은 세상과 인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민주주의는 그런 겁니다. 나를 사랑하듯이 타인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현실 기독교에서 이웃 사랑 개념은 욕심을 조금 참으면서 적당히 구제헌금 내는 정도로 축소되었지요. 더 큰 문제는 ‘나를 사랑하듯이’(자기 사랑)에만 멈춰 있다는 겁니다. 자기 사랑은 사회 계층이나 집단으로도 가능합니다. 민족이나 국가 단위로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되면, 급격한 대립이 생기고 전쟁이 터지는 거죠. 난민을 반대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집단적 자기 사랑은 개인적 자기 사랑보다 훨씬 더 공격적입니다. 이에 민주주의는 집단적 자기 사랑의 충돌을 막고 공존하게 하는 제도입니다. 다른 집단을 인정하라는 것이죠. 민주주의는 집단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공적 이웃 사랑’의 제도인 셈입니다. 민주주의에서는 정치적 원수를 죽이지 않습니다. 원수를 욕하고 미워해도 같이 살 수 있게 정치적 원수를 사랑하게 만드는 제도입니다. 총알(bullet)로 싸우지 않고 투표지(ballot)로 싸우게 하는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성경적인 발명품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의 역사적 실현인 거지요. 뒤집어 생각하면 오늘날 미국이나 한국에서 기독교인들이 막 나가는 이유는 공적 이웃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니 성경에서 왕정이 등장하니까 왕정이 더 좋은 거고, 민주주의는 인본주의라는 황당한 말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나오는 거죠.

― 말씀하신 것처럼 ‘집단적 자기애’가 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듯합니다.
개인적인 자기 사랑은 그래도 기복주의 정도로 끝나지요. 집단적인 자기 사랑은 인종주의를 부추기고 혐오를 확산시킵니다. 기독교가 집단적으로 자기 부인이 아니라 집단적인 자기애로 나아가면, 그게 폭력으로 발현됩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나타나는 태도가 딱 그거예요. 기독교인들이 민주주의를 중요하다고 생각 안 하니까, 이웃 사랑에 관심이 없으니까 즉자적인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단이 된 겁니다. 그래서 미국의 백인 복음주의는 트럼프가 자기들에게 이익만 된다면 세상의 벌거벗은 욕망과 증오를 설교하는 그를 하나님이 보낸 왕이라 여기는 반(反)기독교 수준까지 전락했습니다. 객관적인 평화와 정의와 이웃 사랑의 요구가 무엇인지는 관심이 없고 동성애, 낙태 등의 의제에 찬/반을 묻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가두는 이들이지요. 한국의 태극기 집회, 난민 반대 집회도 타인을 증오하는 죄입니다. 자기애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고 있죠. 현재 기독교의 본질적인 문제, 자기 사랑의 기독교는 ‘21세기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당시 가장 유명한 팟캐스트 방송에 책 광고가 나가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다 친 박근혜 집단으로 매도되진 않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 책을 읽으신 분보다 책 광고를 들으신 분이 훨씬 많습니다.(웃음) 말씀하신 것처럼 이 책의 광고를 통해서 한국의 기독교인도 조금 체면을 살리고, 한국의 비기독교인 시민들도 ‘기독교인들이 다 태극기는 아니구나’ 느낄 수 있었다면, 저로서도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 4년 전에는 《호모 욕쿠스》라는 책도 내셨어요.

한마디로 ‘사람은 욕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남도 욕해야 하고, 세상도 욕해야 하고, 나 자신도 욕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요. 누군가를 욕하는 것은 인간 본성이고, 세상을 욕하지 않으면 굴복해서 살아야 하고, 자기를 욕하지 않으면 나쁜 놈이 되어 갑니다. 이 원리는 사실 기독교에도 똑같이 적용되죠.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을 실컷 욕하면서 자기를 욕할 줄은 몰라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은 자기를 욕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향한 가장 큰 위협은 바로 그거예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 못하는 것! 자기를 욕할 줄 모른다는 거죠. 회개도 없고 성찰도 없는 그 모습이 참 일관됩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상태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기독교의 오랜 명제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파국이 왔으니 곧 혁명이 일어나겠죠.(웃음) ‘욕먹는 기독교’가 된 현재 한국교회의 상태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원리를 완벽하게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기독교인들이 죄인’이라는 것은 ‘욕하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기독교인들도 죄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최근에 ‘욕먹는 기독교인’이 되고 나서야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오늘 교회의 위기를 낳았습니다. 이제는 ‘자기를 욕할 줄 아는 기독교인’들이 오늘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고 기독교를 되살릴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 책에 보니 고전들을 인용하시고, 특히 6권으로 구성된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을 추천하셨습니다.
인류의 분쟁은 대다수 ‘확대된 형제’간 싸움이라 할 수 있어요. 욕, 미움, 싸움이 드러내는 인간 심연을 들여다보면 인간 세상의 갈등을 풀어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요셉과 그 형제들》(살림)은 참 좋은 소설인데 많이 읽히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웠어요. 토마스 만이 무려 17년 동안 쓴 이 소설은 세계대전, 나치즘, 망명과 유랑을 겪은 그의 인간 탐구이자 신에 대한 사색의 결과입니다. 문학, 철학, 성경 주석이 종합된 거작이죠. 그의 인간과 신에 대한 절절한 고민은 제게 사상과 신앙의 깊이를 더해주었습니다. 번역도 아주 잘 되었는데, 2001년에 나온 초판이 아직도 다 팔리지 않은 것으로 알아요.

― 법조인들은 법률 서적 외의 다른 책 읽을 시간이나 여유가 없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분량이 많은 고전을 추천하고, 교양도서와 신앙도서를 꾸준히 집필하고 계십니다.
법률가 중에도 의외로 인문적인 교양을 갖춘 분들이 있어요. 앞으로 더 많아질 거라고 봐요.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면서, CLF도 절반 이상은 법학 외 다른 전공을 배운 이들로 채워졌고요. 저도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어요. 우주의 신비를 탐구하던 소년이 대학에 와서는 민주화운동을 했지요. 혁명을 꿈꾸던 청년이 후에 법조계에서 일하다가, 30대 후반에 기독교를 확 믿게 된 것이고요. 제가 초심자로 상태가 좋을 때는 매년 한 번씩 통독하려고 매일 2시간씩 성경을 읽었어요. 11시까지 일하고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읽은 거죠. 인생이 복잡하게 흘러온 만큼 고민할 것도 많았고, 그것이 독서 습관으로 굳어진 것 같아요.

― 방금 ‘인생이 복잡’하다 표현하셨는데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셨잖아요.
원래 저는 겁이 많아서 앞에 용감하게 나서서 돌 던지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운동을 오래 할 수 있는 조건이 맞았던 점이 있습니다. 당시 끝까지 운동하던 사람 중에는 시골 중소도시 중산층 가정의 장남이 아닌 셋째나 막내아들이 많았는데, 그게 딱 저였어요. 부모님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웃음) 20대에 8년 정도 민주화운동을 했고, 고문경관 이근안이 책임자로 있던 인천 대공분실로 잡혀가서 징역을 10개월 정도 살았어요. 작년에 나왔던 영화 〈1987〉의 배경이 1987년 1-7월인데, 저는 1986년 11월부터 1987년 9월까지 감옥에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고향에서 〈한겨레〉 지국 운영도 하고, 노동야학 교사, 노동운동단체 간사 등 여러 사회운동을 경험하다가, 1990년경 운동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운동의 현장을 떠나서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인권변호사가 되려고 했는데, 운동하며 받은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던지 다시 돌아갈 엄두가 안 나서, 물권변호사(비즈니스 변호사)가 되어 사람과 기업들의 분쟁을 수백 건 처리하고 관찰하면서 인간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이어갔어요. 사실 변호사가 되고 나서는 꿈도, 이상도 없어졌다 생각했는데 그때 애인(지금의 아내)을 따라 교회에 갔다가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거죠. 인간 세상에 대한 절망이 거꾸로 나를 교회로 연결한 느낌이었어요.(더 자세한 이야기는 본지 297호[2015년 8월호] ‘파산회생 전문가가 발견한 한국교회 ‘회생’의 길’에 실렸다.-편집자)

― 미국에 유학까지 가서 신학 공부를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2011-2012년에 대한변호사협회 기획이사를 할 때, 신앙과 사회의 이슈가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CLF에서 활동하면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신앙을 실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그 고민을 신학적으로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평신도가 교회와 사회의 주체가 되는 운동을 하고 싶었는데, 그와 관련해 신학 공부를 더 하고 싶었고요. 

― 법과 신앙의 관계도 진지하게 살핀 계기였겠어요.
그렇죠. 구원은 은혜로 받는데, 구원받는 신자가 살 땐 법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지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방법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법은 이웃들과 지지고 볶고 살아가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타인의 이익을 존중하면서 갈등을 처리할 수 있게 해줘요. 이웃 사랑이라는 것도 법 원리에 다 들어 있죠. 타인과 주고받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법이 신앙과도 연결이 됩니다.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원리는 맞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사는 삶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기에 법의 정신이나 원리에서 건강한 부분을 연결시킬 수 있는 거죠.

 

― 그 관계를 고민하다 보면, 기독 법률가의 역할을 찾아갈 때도 도움이 되겠어요.
요즘 변호사 수가 두세 배 늘면서 많은 변호사가 힘겨워하고 있어요. 특히 젊은 변호사들은 먹고사는 취업 문제가 고달플 수밖에 없어요. 저도 대한변협 임원을 하면서 이 문제를 놓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사실 사회적으로 보면 더 좋은 현상인지도 몰라요. 법조인들의 이익과 세상의 이익, 하나님의 이익이 상반되는 다른 지점이 있는 거지요. 물론 이런 말 하면 후배들은 싫어할지도 몰라요.(웃음) 소수의 변호사가 잘사는 것보다는 다수의 변호사가 일반 회사나 사회단체 곳곳에 가게 되어 법률 서비스의 외연이 넓어지면 좋은 거잖아요.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도, 개인 변호사가 잘사는 것보다 더 많은 변호사들이 사회 각계각층은 물론 소외된 사람 주변에 머물면 더 좋은 거 아닌가 싶더라고요. 변호사는 괴롭겠지만 사회에는 도움이 되는 현상이지요. 우리 변호사들은 괴롭더라도, 우리의 괴로움이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이익이 될 수 있지요. 이 맞서는 지점은 ‘나의 이익이 곧 하나님의 이익’이라는 우리들의 상식적인 기도를 뒤집습니다.

― ‘변호사는 괴롭겠지만 사회적으로는 도움이 된다’는 얘기가 인상 깊습니다.
예수님의 핵심 가르침은 ‘자기 부인’이지요.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의 힘으로 ‘자발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진짜 어렵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CLF의 젊은 회원들은 자기의 욕망과 실현 욕구를 ‘강제적으로 부인’당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 회원들은 옛날의 법조인들처럼 ‘세상에서도 잘 나가고 교회에서도 잘 나가는’ 힘 있고 교만한 법조인, 즉 잘난 척하는 기독교인의 길로 나가지 못해요. 잘난 척도 못하고 오히려 힘겹게 괴로워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따르고자 애쓰는 겸손한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된 셈이지요. 저는 역설적으로 이것이 현재 우리 CLF의 신앙적 건강성을 가장 잘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 앞으로 한국 교계는 물론, 우리 사회에서 CLF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올해 전국대회 10년째이고, 설립 20년을 앞두고 있지요. 최근엔 더 적극적으로 우리 사명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한국교회가 어려운 때 그 회복의 동력은 교회나 목사에게서가 아니라 평신도에게서 찾아야 하기에 평신도 신앙 운동으로서 다른 평신도 단체들과 연대하는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변호사 단체 하나 잘 굴러가게 하는 게 우리 목적이 아니니까요. 이를 위해 도전적으로 몇 가지 일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평신도 스스로의 경험과 학문으로 신학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도 싶고요. 이번에 전국대회에서 풀러 신학교 김세윤 교수님을 모셔서 특강을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평신도들이 주체가 되어 정확한 복음 이해를 통해 한국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자는 뜻을 모은 자리였어요. 금방 결과를 얻을 수 없다고 해도, 하는 데까지 해보려 합니다.

이 글은 <복음과 상황> 335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무단 전재 및 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