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요?
동성애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요?
  • 권영석
  • 승인 2018.11.07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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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제 주변에는 동성애자를 천형(天刑)으로 정죄하려 들거나, 반대로 동성애자를 이성애자와 대등한 하나의 성적지향으로 인정해야 한다며 심지어 동성 결혼까지도 합법화해야 한다는 양극단적인 주장이 여전히 팽팽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성애는 죄인가요 아니면 사랑인가요? 동성애자들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더 나은 관점은 없을까요?

A. 우선, "동성애적 성적지향"(Homo sexual orientation)과 "동성애 행위"(Homo sexual behavior)는 서로 다른 범주(category)에 속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동성애자'라고 하면 동성애 행위를 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기 십상이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동성애적 성적 지향'과 '동성애 행위'는 서로 다른 범주로 인식하고 접근해야만 합니다. 동성애자이지만 동성애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반대로 동성애자가 아닌 이성애자이면서도 동성애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동성애 행위를 하는 사람을 동성애자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성애자(hetero sexual)와 동성애자(homo sexual)란 말은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을 일컫는 별도의 [전문] 용어라 하겠습니다. 즉 동성애자도 이성애자와 하등 다를 바 없이 친밀감에 대한 동일한 갈급함을 지니고 있어서 애정과 실연, 질투심과 배신감 등을 동일하게 느끼지만, 그 욕구가 서로 다른 성(異性)을 지향하는 이성애자와 달리 [특이하게도] 동성에게 친밀감과 성적 끌림을 느끼는 이들로서, 행위 유무와 상관없이 성적 지향성이 어떠냐를 두고 붙여진 이름이 바로 '동성애자'인 셈이지요. 이성애자라고 해도, 예컨대 아직은 미혼이거나 독신자처럼 [이]성애 행위를 하지 않는 자들이 있듯이, 동성애자 가운데도 [동]성애 행위를 하지 않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이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힘겹게]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동성애자'와 '동성애 행위자'는 마치 '이성애자'와 '이성애 행위자'가 구분되는 것과 매한가지로 서로 다른 범주로 이해해야만 논의상의 혼란을 피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우리 이성애자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안타깝고도 특이한 현상이 바로 이 "동성애적 성적지향성"을 지닌 이들이라 하겠습니다. 이들 "동성애자"들은 [아직도/아직은] 한 가지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어떤 연유로 이성을 향해서가 아니라 [왜 그런지] 동성한테서 친밀감을 느끼며 성적인 충동을 느낀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런 성향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렇게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더욱 기이하고 애달픈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의지는 물론 꿈에서조차 원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기막힌 현실'이 자신의 몸 안에 버젓이 실존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춘기를 지나면서 이런 기막힌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만 해도 이미 가혹한 일일 텐데, 그 실존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안고 일생을 살아내어야 하는 엄혹한 현실을 맞닥뜨리고 있는 이들이 바로 "호모섹슈얼"들이라 하겠습니다. 심지어 기도로 수없는 밤을 지새우고 엄청난 극기 훈련을 반복해 보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는 동성을 향한 성적지향성, 이로 인해 좌절하고 자신을 미워하고 학대하게까지 되는 그런 이들이 우리 가운데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우선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다른 모든 점에서는 우리와 꼭 같은 남자 또는 여자인데도, 이처럼 정반대의 성적지향성을 지닌 이들이 우리의 동료로, 친구로, 가족으로 주변에 실존하고 있다는 현실을 더 이상은 부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감싸주면서 권면해 보아도, 다른 한편으로 마치 그들이 천형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이상한 괴질(怪疾)을 앓고 있는 존재인 것처럼 경계하거나 혐오 내지 나아가서 정죄해 보아도, 사태는 크게 바뀌거나 달라지지 않는 이런 기막힌 현실 말입니다.

90년대 말 신학교 강의실에서 이 동성애[적 성적지향] 이슈를 처음 접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기막힌 경우가 있을 수 있냐는 생각과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 마음에 맴돌아서 그날 밤 잠을 설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물론 남성과 여성의 생김새나 성기의 모양새나 또 실제로 성애를 나누는 방식이나 등등 생각하면 할수록 여러 면에서 얼른 납득이 안 가거나, 적어도 우리 이성애자들에게는 더구나 아름답게만 생각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오히려 이성애적 성애를 나누는 것이 되레 "이상하게" 여겨진다는 사실에 이르르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고 맙니다. 그리고/게다가 그들에게 이런 성적지향성은 쉬 변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현실/팩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 말의 무게를 누구보다 동성애자들 자신들이 재고 또 재고, 달고 또 달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이라고 왜 이런 "왜곡된" 현실을 바꾸려고 시도해 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쏟아질 온갖 조롱과 야유를 굳이 무릅쓰면서 부러 비뚜로 가려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이처럼 완전히 정반대되는 성적 지향, 곧 이성 간에 서로 가까이하고 싶고 친밀감을 나누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성이 아니라 동성에게 끌리는 성향을 지닌 사람이 바로 동성애자입니다. 동성애 행위를 하지만 성적 지향은 여전히 이성에게 끌리는 사람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이성애자이며, 다만 자신의 성적지향을 거슬러서 동성애 행위를 하는 것뿐입니다. 양자 사이의 구분을 염두에 두고서 질문하신 내용을 재 진술해 보자면, 이 질문이 전자 곧 동성애자에 대한 질문이라면, 이는 "동성애적 성적지향성(homo sexual)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하는 뜻이겠지만, 후자 곧 동성애 행위에 대한 질문이라면, 이는 "동성애[행위](homo sex)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요"하는 물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따라서 꼭 같은 동성 간에 성행위를 하는 경우라 해도, 여기에는 동성애적 성적지향성을 지닌 사람의 동성애 행위와 성적지향성은 이성애적인 사람이 하는 동성애 행위는 그야말로 '같으면서도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하겠습니다.

만일 질문자의 관심이 이성애자의 동성애 행위에 대한 것이라면, 대답은 훨씬 더 단순할 수 있겠습니다. 성적지향성으로 하면 동성애자가 아닌데도, 동성애 행위를 하는 사람의 경우 그 동기는 사실 그리 복잡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성적인 쾌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동성과와도 더불어 [항문]성교를 하려 한다면, 이는 명백히 자신의 성적지향성에 도리어 반하는 행위이며, 그런 반심(叛心)을 스스로[의 양심이] 용납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도착'된 성애를 순전한 우정이나 사랑과 연결시키기란 그만큼 더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며, 만일 자신의 성적 쾌락욕의 충족을 우정이나 사랑이란 말로 미화하려든다면 이는 더욱 더 가증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이런 "동성애[ 행위자]"는 안타까움이나 연민의 대상일 수 없으며, 도리어 사회적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적 지향이 동성애적인 경우는 이처럼 이성애자이면서 동성애 행위를 하는 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경우라 하겠습니다. 아마도 동성애적 성적 지향과 동성애 행위를 구분함으로써 그들을 이해하고자만 해도 이들 동성애자들은 [그토록] 부당하다는 느낌이나 소외감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용납하고 받아들이기가 한결 수월해 질 것입니다. 우리 이성애자들이 이성애적 성적지향성을 지니게 된 것이 우리의 선택이 아닌 것과 매한가지로,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적 성적 지향성을 지니게 된 것은 그들의 선택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일단 인정하고 이해해 줄 수만 있어도, 그들의 고민과 좌절의 강도는 반감될 수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그들이 동성애적 성적지향을 지니게 된 것이 마치 그들의 책임이자 잘못인 것처럼 정죄하는 주변의 시선과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번민 그리고 그로 인한 혼란과 좌절만 해도 이미 감당하기 힘들 정도인데 설상가상으로 외부의 [부당한] 정죄와 차별에 맞서서 자신들을 변호하고 항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담까지 가중시키는 것은 더욱 가혹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이성애자들이 이런 정도의 총체적인 이해를 기반으로 하여 동성애자들을 향해 '인간적인' 연민과 안타까운 마음이나마 제대로 전달하기만 했어도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들 사이의 적대/혐오 구도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며 짐짓 과장된 퀴어 축제 같은 것도 굳이 불필요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성적 지향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 왜 이처럼 정반대되는 성적 지향이 대두되게 된 것인지, 과연 이런 지향은 '교정'이 불가능한 것인지 또 교정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하면 될 것인지 등등 우리의 무지와 곡해의 여지를 줄이고 진실과 통합 그리고 화합으로 나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혹은 그 날이 올 때까지는 소위 '동성애자' 문제는 지식이나 논리의 문제(지식이나 이론은 어차피 지금으로선 불완전하기 때문에)로가 아니라 사랑과 용납의 문제로 먼저 접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나저러나 증오/혐오와 반감 나아가서 정죄의 태도로 실제 달라질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데도 계속 그런 태도를 견지한다면, 이는 어리석음을 넘어서 악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동성애 행위를 [무조건] 옹호하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면서 지향성을 용납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으로 비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상호모순의 어정정한 태도를 사실 누구보다 저들이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향성을 인정하고 공감해 주는 만큼은 저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 전달되어야 하며 또 전달될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성경에는 동성애 행위에 대한 정죄를 분명히 하는 구절은 여러 군데 있지만, 동성애적 성적 지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읽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소외된 자들, 약자들, 소수자들을 어떻게 동료 인간으로 [사랑으로] 대해야 할지에 대한 구절은 주지하시는 대로 부지기수라 하겠습니다.

이성애자이든 동성애자이든 인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사랑' 또는 '용납'이 해결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라 하겠습니다. 반대로 죄와 악이란 의도적 내지 의지적인 선택인 경우에 한해 적용될 수 있으며, 그런 의도 내지 의지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일단 사랑하고 용납해야 하며, 심지어 의도적으로 저지른 행악일지라도 의지를 돌이켜 회개하고 사과한다면 용서하고 다시 신뢰해야 하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몸소 제정하신 '사랑의 법'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접근한다면 쾌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이성애자들의 "동성애 행위"와는 달리 동성애자들 간의 성애는 그나마 이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적어도 "동성애적 성적 지향성"을 지닌 이들의 경우는 그들의 성적 지향성은 물론이거니와 [동]성애 행위까지도 의도적 내지 의지적인 악이나 죄악인양 일방적으로 매도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도리어 우선은 [그들이 아파하고 번민하는 정도만큼 동일시하기란 힘들겠지만] 안타까운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고 연민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동성애적 성정지향성을 이성애적 성적지향성과 동등한/대등한 성적지향성의 하나로 보고자 하는 극단적인 주장이 신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얼마나 정당한 주장일 수 있을지에 대한 논쟁은 당분간은 더욱 치열해 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 그들에게 법적인 지위나 정당성을 부여하는 정도도 당연히 달라질 것입니다.[물론 현실 생활에서는 집단 내의 질서유지를 위해 나름 바운더리를 정해 두어야 하기에 법적 기준과 강제력이 불가피하게 요구되기 때문에 신학적/도덕적으로 통합적인 관점이 정립되기까지 갈등과 혼란 상황은 당분간 불가피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인간은 본질적/존재론적으로 피차 사랑을 받고 사랑을 나누는 가운데서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런/독특한 존재로 지음 받았다 하겠으며, 어떤 대상과 사랑을 나누느냐 또 어떤 식으로 성애를 주고받느냐 하는 문제는 존재의 본질이란 큰 틀에 비하면 사실 지엽적인 이슈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적 지향성 자체는 인간의 인간됨을 구성하는 본질적 핵심 요인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선 인간이 섹스하는 시간은 인간의 삶에서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사실 더 많은 시간을 우리는 서로 서로 공감하고 교감하는 가운데 서로 우정을 나누고 애정을 나누면서 서로 돌보고 위로하는 가운데 의미와 보람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존재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누는 우정과 애정의 깊이와 차원이 우리의 삶의 의미를 좌우하는 것이지, 성애에서 느끼는 쾌감의 깊이와 차원은 그 자체로는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없으며, 이렇게 보면 인간의 섹스는 상징적인 성격이 더욱 크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동성애를 문제 삼기 이전에 인간의 섹스(性愛) 자체의 [상징적인] 성격이나 지위를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동성애 문제가 불거지기 이전에도 인간의 섹스 곧 이성애적 섹스로 인해 야기되는 신체-심리-사회학적인 문제는 이미 그 적폐가 어마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섹스는 왜 하는 것이며, 또 누구와 하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딱히 대답할 말이 궁색해 보이지만, 아니 딱히 대답할 말이 없기에 오히려 세상은 각종 성적 일탈과 범죄들로 넘쳐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게다가 여기에는 직업의 유무나, 학식의 유무, 심지어 종교의 유무가 아무런 차이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인간의 섹스에 대해 지금까지 인류가 견지해 온 주장은 양극단적인 2가지로 대비된다고 하겠습니다. 한쪽 극단이 섹스를 오로지 결혼 제도 안의 생식적인 차원으로만 접근하는 것이라면, 다른 쪽 극단은 섹스를 결혼이나 가정이란 울타리와 상관없이도 두 인격 사이의 친밀감을 주고받는 차원으로 접근하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섹스는 과연 단순히 자녀를 출산하여 인류를 존속시키기 위한 통로에 불과할까요? 아니면 반대로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이면 누구든지와 합의만 되면(consensual)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걸까요? 이런 근본적인 질문은 별도로 논의해야할 큰 주제(Theology of Sex)이겠으나, 만일 우리가 동성애냐 이성애냐 하는 물음 이전에 인간의 섹스 자체에 대한 관점을 통합적으로 정립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문제 삼는 동성애 이슈 역시 그 프레임에 비추어 이해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동성애 이슈는 차치하더라도 이성애자들 내에서 야기되는 섹스와 관련한 여러 가지 복잡한 이슈들만 해도 사실 이런 근본적인 차원의 논의가 통합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데서 대부분 야기한다 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의 초점을 동성애자들 사이의 성애에 맞추어 정리해 봅시다. 이성애자들의 동성애 행위는 동성애자들을 도리어 욕먹이는 행위로서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이와 더불어 성적 쾌감의 추구를 아예 섹스의 의미로 보려는 관점 전체를] 우리의 논의에서 배제키로 한다 하더라도, 동성애자들 간의 성애는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다시 말하면, 만일 동성애자들 사이에도 [이성애자 사이와 마찬가지로] 배타적인 관계가 가능하다고 전제할 때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행해지는 성애는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이런 동성애라면 역시 사랑으로 볼 수 있는 걸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동성애자들의 배타적인 관계 역시도 언약/결혼 관계로 볼 수 있는 것일까요? [사실 이처럼 동성 간에 배타적인 동반자 관계가 가능하다고 전제할 경우 이를 이성애자 사이의 언약 관계인 결혼 관계에 방불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가 곧 동성혼(homosexual marriage)의 이슈라 하겠습니다. 사실 인간의 섹스는 생식적인 기능에 불과한 다른 피조물들의 교미와는 차원이 다른 독특한 행위로서, 결혼 관계를 한-몸 의식으로 형상화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논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이성애의 경우를 원용하여 이렇게 질문을 바꾸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예컨대, 결혼한 두 이성애자가 굳이 성[애]행위를 하지 않아도 두 사람 사이의 우정과 애정이 [여전히] 없다 할 수 없는 것과 매한가지로 배타적인 동반자가 되기로 약속한 두 동성애자가 굳이 성[애]행위를 하지 않아도 두 사람 사이의 우정과 애정이 [여전히] 없다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더 중요한 것이 이미 있을진대, 그 위에 덜 중요한 것도 함께 있으면 금상첨화이겠으나, 그것이 없다고 해도 더 중요한 것은 이미 확보되어 있으니 그 차이는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그러나 또 역(逆)으로 그 차이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진대, 성[애]행위까지도 함께 나눔으로 금상첨화가 될 수 있다면, 굳이 그 행위를 금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논리도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동성애자들이 파트너를 자꾸/자주 바꾸는 데에서 야기하는 문제를 감안한다면, 차라리 동성애자들 간의 반려관계를 인정하여 동성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편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더 건강하고 경제적이 아니겠는가 하는 실용적인 논리까지 가세하면서 동성애자 사이의 '결혼 제도'를 합법화하자는 주장들이 힘을 얻게 된 줄로 압니다. [사실 이성애자들도 결혼 언약과 상관없이 무차별로 파트너를 바꾸어 가면서 "합의"라는 미명 하에 '캐주얼 섹스'를 일삼는 작금의 위기적인 현실은 동성애 문제 못지않게 심각한 수위에 이르렀다 하겠습니다.]

결국, 인간의 성이 지니는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동성애에 대한 이해/평가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만일 인간의 성이, 어거스틴 이후 전통적인 [기독교적] 관점으로 고착되어 왔듯이, 임신-출산과 직결되어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면 동성애적 성행위가 들어설 자리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성 간의 섹스로는 임신이나 출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성이 지니는 언약적인 상징성과 사회심리적인 측면을 더 중시하여 출산과는 무관하게[출산은 결과적으로 수반되는 것일 뿐] 서로의 신체적인 접촉을 통한 언약[적인 사랑의] 확인과 위무의 의미에 무게 중심을 둔다면 동성애적 성행위도 이성애적 성행위와 마찬가지로 정당화될 수 있는 나름의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를 결혼 관계로까지 확장하여 동성 간의 배타적인 [동반자] 관계를 결혼관계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자녀 입양과 양육 등의 또 다른 복잡한 요인들을 고려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유럽처럼 아예 동성 간이든 이성 간이든 따지지 않고 동거 관계를 하나의 사회 제도적인 유닛으로(반드시 가족 단위로 볼 필요 없이) 간주하는 경우 역시도, 비록 의료 보험이나 유산 증여 등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자녀의 입양이나 양육을 위해서는 여전히 구조적인 한계 내지 '결격' 요소를 안고 있다 하겠습니다.]

바야흐로 우리 인류는 지금껏과는 달리 아직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당분간은 이러저러한 시행착오가 불가피하겠습니다만, 어쨌든 성적지향이란 우리가 자의적으로 선택하거나 임의로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저들의 부르짖음을 현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은 우리의 자의적인 선택에 달린 것이 아닌 만큼 "성적 취향"(sexual preference)으로 혼동해선 안 되겠습니다. 이는 이성애가 성적 취향이 아닌 것과 매한가지라 하겠습니다.] 사실 팩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해결책 모색을 위한 의미 있는 접근과 논의의 진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는 해결책도 있게 마련인지라, "문제"의 팩트를 여실히 인정하고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면 이 문제의 해결책 역시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고민하며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면서 그들의 부담을 나눠지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함께 울고 아파할 각오가 없는 채로 "동성애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고자/싱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best인 것 같다"라고 한다면, 더구나 다수자인 우리 이성애자들의 입으로 그리 주장한다면, 우리 안의 차별 의식은 결코 불식되지 못할 것이며, 그에 따른 위화감과 위협감은 고스란히 [성]소수자들의 부담으로 남겨지고 말 것입니다. 소위 동성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서 동성애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한 채로 나아가서 의도적으로 그들의 호소를 배척한다면 어떻게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여 만일 우리 교회가 진정한 그 [새로운] 나라의 공동체라고 한다면, 동성애자들과 이성애자들이 [모든 교조적(敎條的)인 접근과 이론(異論)을 일단 내려놓고] 서로 함께 부둥켜안고 그리고 피차 무릎을 꿇고 상대방의 아픔과 필요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면서 함께 인간의 성을 만드신 주님의 뜻을 구하고자 힘쓰는 일이 아무래도 급선무일 것이며 또 지금으로선 최선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하여 진리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오래 참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기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어리석음과 사랑의 한계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가 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당신의 진리와 사랑의 길을 바로 분변하며 나아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 온 인류[사회]가 모두 마침내 온전한 남자와 여자로 다 회복/구속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게 하여 주소서!" 

권영석 목사 / 전 학원복음화 협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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