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무엇인가?
  • 김기대
  • 승인 2019.01.22 09: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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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책을 읽다] 스윙 키즈(Swing Kids)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던 거제도 포로 수용소, 이곳에서  북한측 수감자이던 인민 영웅이 탭댄스를 배운다는 설정은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우정 또는 춤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인민군의 순화 과정 등에 우리의 상상력을 멈추게 한다.  밝은 색상의 영화 포스터 또한 이 영화에서 비극적 요소는 전혀 없을 것이라는 예단을 하게 만든다. '영화 좀 본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혼돈에 빠진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우리의 상상력이 멈추어 버리는 그 지점, 즉 반공의 시각에서 영화를 만든단 말인가? 특히 감독은 '써니', '과속 스캔들'처럼 어두운 기억에서 밝은 기운을 이끌어내는 데 재주가 있는 강병철이 아니던가?

세상이 변하는데 상상력은 정체되어 있는 사람들은 '좌우' 모두에 퍼져 있다. 영화관에는 반공드라마를 기대한듯한 표정의 '우'들이 많았고,  관람 후에는 인민군을 악마적으로 그렸다며 안타까워 하는 '좌'들도 많았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는 반공포로와 북으로의 송환을 바라는 친공 포로들의 살육이 심했던 곳이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좌우가 싫어 중립국 행을 택한 이명준은 폭력의 기억에 몸부림치다가 바다에 몸을 던진다. 포로 수용소를 거친 시인 김수영은 그 당시의 경험을 “한걸음이라도 좋으니 철망 밖에 나가보았으면”이라고 회상한다.  그곳은 평화가 숨쉬는 곳이 아니라 폭력이 일상인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폭력은 맥거핀이다. 영화에서 악랄한 인민군의 모습을 보고 반공정서를 재확인하거나 그들의 과장된 폭력성이 불편한 사람들은 모두 영화의 허상을 본 것이다.

 

이중으로 소외된 사람들

스윙 키즈는 전쟁이란 상황에서 이중으로 소외된 자들의 모습을 다룬다.

주인공 로기수(도경수분)는 인민영웅 로기진의 동생인 이유로 친공 포로들 사이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다. 로기수는 전쟁만 아니었다면 '수령님 앞에서' 춤을 추었을 수준의 청년 무용가였다. 전쟁이 그로부터 춤과 꿈을 앗아갔다. 나중에 포로로 끌려온 형 로기진은 거구의 발달장애자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능과 거구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애초에 로기진에게는 애국심이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정서 따위가 없었다. 지능이 정상정인 사람들에게도 전쟁은 미친 짓이지만 그들은 애국심으로 포장할 뿐이다.  춤과 인민영웅 사이에서 갈등하던 로기수는 일단 다른 이의 눈을 피해 미제국주의자의 춤에 빠져든다.  

흑인 하사 잭슨(자레드 그라임스분)은 일본인 아내를 오키나와에 두고 왔다. 그는 수용소내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불법 댄스장을 운영하는 것이 빌미가 되어 수용소장으로부터  탭댄스를 가르치라는 제안을 받는다.  수용소장은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는 수용소의 현실을 감추고 싶었다.

피난 중 잃어버린 아내를 찾아 헤매던 강병삼은 실제로 인민군 출신도 아니지만 공교롭게 반공포로 진영에 수용되고 오고 가는 사람을 통해 아내의 소식을 들으려 한다. 아내도 어쩌면 남편의 소문을 좇아 거제도까지 왔는지 모른다. 빵 한조각에 몸을 팔던 아내를 발견한  강병삼은 눈물을 흘린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남편으로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음에 미안해 하며, 행여 아내가 죄책감에 괴로워 할까 봐 아내 앞에 나서지 못한다. 이제껏 한국 영화에서 못 보던 캐릭터다. 일단 아내의 매매춘 현장을 발견하면 낫을 들거나 무차별적 폭행을 가하던 남편들이  '뽕'같은 에로 토속물에  많이 나왔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매춘(買春)의 동지가 된 남편들은 '안개마을'에서 아내들과 부정을 저지른 동네 바보를 희생양 삼아 응징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보존해 왔었다.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합류한 민간인 양판래(박혜수분)와 심장이 안 좋은 중공군 포로를 포함해서 모두 5명으로 구성된 탭댄스팀이 꾸려진다.

어디도 끼지 못하는 2중의 소외된 사람들로 탭댄스팀이 꾸려진 것이다. 수령님앞에서 춤을 추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그냥 춤이 좋은 로기수, 아내와 생이별을 한 강병삼, 가난한 양판래,  중국인 심장병 환자, 브로드웨이의 춤판에서 쫓겨난 1950년대 흑인.  전쟁을 겪는 한국의 여인과 미국의 흑인 중 누구의 삶이 피폐한가를 다투는 장면이 이들의 이중 소외를 표현한다.  

 

포로 수용소를 찍은 한 장의 사진

이  영화는 실제로 포로 수용소에서 찍힌 한 장의 사진이 모티브가 되었다. 사진은 스퀘어댄스라고 불리는 포크댄스의 일종이다. 주로 미국 민요에 맞추어 부르기 쉬운 춤인데 사진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미국 문화에 물든 반동이 될 까 두려워 포로들은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수철은 이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포로들의 춤'이라는 소설을 썼다. 최수철이 인용한 열화당 사진문고로 출판된 베르너 비숍의 사진첩에 따르면 미군측은 북한과 중국 포로들에게 서구식 생활 방식과 가치를 소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춤을 가르쳤다.

사진은 스퀘어댄스라고 불리는 포크댄스의 일종이다. 주로 민요에 맞추어 부르기 쉬운 춤인데 사진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영화에서는 스퀘어댄스가 탭댄스로 바뀐다. 탭댄스는 노예의 춤이다. 미국으로 끌려오던 노예들이 배의 한정된 공간에서 흑인 특유의 리듬감에 맞춰 추기 쉬운 춤이다. 그들은 춤을 통해 잠시의 해방감을 느꼈겠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것은 죽음의 춤이었던 셈이다.

중세 때부터 죽음을 묘사하는 춤들에 대한 그림이 많았다. 춤은 예술의 여러 장르 중에 가장 죽음에 가깝다. 울리 분덜리히에 따르면 죽음의 춤은 나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목적을 위해 의인화된 죽음의 묘사 뿐 아니라 죽음의 춤도 이용했다고 한다.  

춤 선생인 잭슨 하사가 음모에 의해 감옥에 갇히자 단원들은 그를 구하기 위해 탈춤으로 시선을 끈다. 넓은 운동장에 탈춤을 주는 공간만 진흙밭이다. 질척거리는 한반도의 현실이다. 반면 탭 댄스를 추는 공간은 평평한 마루 바닥이다.  진흙에 빠진 한반도의 현실과 별도의 공간으로서 미군 강당은 일종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다. 실제로 그곳은 예배가 드려지는 곳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정홍수가 최수철의 소설을 평하면서 말했듯이 "그 죽음 같은 가면의 춤을 ‘탈춤의 춤사위’로 바꾸어내는 상상이 거듭 긴요하고 절실"(창비주간논평, 2016년 8월 17일)한 현실을  감독은 날름 받아먹으면서 그 상상의 질척거림을 잘 묘사했다. 

우여곡절 끝에 춤은 무대에 올려진다. 하지만 모두의 꿈은 다르다. 수용소장은 진급을 꿈꾸고 잭슨 하사는 오키나와로의 귀환을 꿈꾸며 로기수는 혁명을 계획하지만 동시에 브로드웨이의  무대를 상상하는 갈등에 빠진다.  그러나 전쟁의 비극 속에서 간혹 등장하는 휴머니즘은 온갖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그것이 꿈이라는 숙주에 기생하는 돌림병일 뿐이다.

한국전쟁의 두 대립항인 '반공'이나 '민족 해방 전쟁'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돌림병일 뿐이니까. 폭력은 오히려 돌림병을 감추기 위한 아주 적절한 백신이다. 우리는 진짜 폭력을 감추기 위해 적당한 폭력으로 면역의 효과를 누린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노예상인들을 향해 저질러지는 무차별적인 폭력은 통쾌하고 스윙 키즈의 폭력이 불편하다면 통일과 같은 거대담론이 아직 노예 해방이 가진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슬라보예 지젝의 유명한 조크, 빈수레 이야기가 자꾸 머리에 떠 올랐다.

"물건을 훔쳐낸다는 의심을 받던 일꾼이 한 명 있었다 매일 저녁 일꾼이 공장을 나설 때면 그가 밀고 가는 손수레는 샅샅이 검사를 받았다. 경비원들은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손수레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일꾼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손수레 그 자체였던 것이다. "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그럼 스윙 키즈에서 숨겨진 진짜 폭력(빈수레)은 무엇인가? 전쟁에서도 싹틀 수 있다는 휴머니즘, 꿈을 향해 땀 흘리던 청춘들,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우정 등등. 그리고  이게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관객들. 그들이 마침내 보았던 것은 죽음의 춤이었다.

 

<영화>
스윙 키즈, 감독 강형철, 2019
장고, 분노의 추적자,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2013
뽕, 감독 이두용, 1986
안개 마을, 감독 임권택, 1983

<책>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옮김, 난장이, 2011

슬라보예 지젝, '환상의 돌림병',  김종주 옮김,  인간사랑, 2002
울리 분덜리히, '메멘토 모리의 세계, 죽음의 춤을 통해 본 인간의 삶과 죽음', 김종수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최수철, '포로들의 춤', 문학과 지성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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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인 2019-01-29 00:58:37
"그리고 이게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관객들. 그들이 마침내 보았던 것은 죽음의 춤이었다." 정말 정곡을 찌른 평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유지되었던 "혹시나..."하는 생각을 짧고 굵게 깨트려 버리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