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균형이라는 악령
언론의 균형이라는 악령
  • 김기대
  • 승인 2019.01.24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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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혜원 사태를 보면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 즉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귀조(유럽의 보수적인 정치인),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비밀경찰이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 동맹을 맺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초한 공산당 선언의 서두다.

아직 실체는 없는 듯 하지만 존재하기에, 19세기 말 초기 형태의 자본주의가 지배하던 유럽에 공포로 등장했기에 그들 스스로가 유령으로 호명했다. 유령의 독일어인  'Gespenst'에는 '급박한 위험'이라는 뜻이 있듯이 유령이 되어 기득권 체제를 위협하겠다는 의미다. 공산당 선언 일본어 번역에는 유령이 괴물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괴물은 지젝과 밀뱅크의 글이 실려 있는 '예수는 괴물이다'에서 말하는 그 괴물의 의미일 것이다. 변증법을 금과옥조로 삼던 이 유몰론자들은 자신의 사조를 배회하는 유령으로 '격하'시키면서까지 당대에 위협을 가하고 싶을 정도로 절절한 심정이었을 게다.     

오늘 한국의 언론 현실을 이 말에 빗대어 보면 언론의 균형이라는 유령이 신문사 사옥 위를 배회하고 있다. 다른 점은 공산당 선언에서는 '유령'이 기득권과 맞서 싸우는 존재라면 한국 사회에서 '언론의 균형', 또는 '사실보도'는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공포의 역할을 감당하는 악령이다.  

언론은 공정해야 하고 균형 감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공정과 균형에는 전제가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법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있는 이유는 어떤 전제를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이 손혜원 의원 사건에 대해서만 공정과 균형, 알 권리를 내세우는 것은 아무리 봐도 만만한 상대에게만 적용되는 균형이라는 악령에 씌인 것에 틀림없어 보인다(사진:SBS 영상 갈무리)

손혜원 의원과 목포가 한국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부동산 투기의혹에서 이해상충까지 다양한 분석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 사안을 기계적 균형의 문제로만 보자면 충분히 논쟁이 될만한 사안이다. 그러나 기계적 균형이 과연 최선인가를 물어야 하는데 손혜원 논란에는 이것이 빠져 있다. '이'와 '해'가 충돌하면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득과 실의 경중을 따져보는 것이 먼저다. 얻어지는 '이'는 지극히 작은데 그것을 동일한 저울에 놓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불균형의 시작인데 한국 언론은 이것을 놓치고 '의혹'이라는 말로 일단 대상을 악마화 시킨다.

같은 당이었던 금태섭 의원의 '균형에 아주 충실한(?)' 발언을 내 놓았다. 이 사건을 이해충돌의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맞는 말이지만 "그것에 대해 언론은 충분히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는 주장에서 그의 균형은 사라졌다. 이해가 충돌했다 할지라도 그 사안이  과연 모든 언론이 나서서 맹공을 퍼부을 정도의 문제였는가를 그는 분석하지 않았다. 그런 균형 뒤에서 언론의 총공세는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런 기계적 균형주의는 근대적 합리주의자들이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다. 세상은 이성과 합리를 넘어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쳐 다시 칼 슈미트 식의 '예외상태'가 논의되고 있는데 아직도 근대적 합리주의의 권력 안에 머무르기를  바라는 언론들과 그것에 동조하는 기계적 균형주의자들이 연대해서 이 사태를 키우고 있다. 합리주의적 식자층들이 '아무 말 대찬지'를 벌이는 비합리주의적 세력인 야당과 결탁했다는 의미다. 이들은 기계적 균형으로 세상을 그대로 유지시키려고 한다. 균형이 깨진다는 것은 세상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니까.

KBS 사장을 지내다가 이명박 정부에 의해 쫓겨난 정연주는 그의 책 '정연주의 기록'에서 노무현 정부에서 KBS가 불편한 보도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청와대는 한번도 압력 전화를 넣지 않았다며 뒤늦게 노무현 정부를 칭송한다.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 언론의 기능인건 맞지만 당시 참여정부를 불편하게 한 KBS의 보도는 노무현 정부를 향한 기득권의 논조와 닿아 있었다. KBS가 기득권의 횡포에 눌려 우클릭을 하던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으면 정당한 감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의 윗부분에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참여정부를 비판한 것을 그들은 권력에 대한 감시고 균형이라고 생각했다.  '정연주의 기록'에서는 이러한 과거에 대해 일말의 반성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동아투위 출신 기자', '이명박에 의해 핍박받은' 정연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언론 자유의 상징으로 거론되는 현실이 불편하다. 

참여정부 공격에 성공한 '균형잡힌' 한국 언론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호시절을 누리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다시 위기를 맞았다. 그러다가 손혜원을 계기로 옛 영화를 회복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걸은 것처럼 보인다. 팟캐스트와 같은 비주류 언론들에게 빼앗긴 지형을 회복하려는 안간힘이 측은해 보인다.

최근 한국 일보는 평범한 직장인이면서 아파트 55채를 보유한 임대사업자의 이야기를 성공 모델로 소개하고 있다. (기사링크)

버려진 지역이나 다름없는 목포에서의 부동산 구입, 그것도 도시 재생사업의 일환이라는 선의를 가지고 구입한 것을 문제 삼는 시점에 한국 언론의 다른 지면에서는 투자(투기)가 미화되고 있다.  물론 국회의원과 자연인에게 요구되는 기준은 다르다. 기준은 준법 여부에 있다. 국회의원이 개발정보를 사전에 인지해 이루어진 투자라면 나중에 법정에서 다투면 될 일이다. 하지만 탈법이 틀림없는 삼성 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나 양승태 대법원장의 재판거래의혹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대한 언론이 손혜원 의원 사건에 대해서만 공정과 균형, 알 권리를  내세우는 것은 아무리 봐도 만만한 상대에게만 적용되는 '균형'이라는 악령에 씌인 것에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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