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인 씨가 뉴욕밀알선교단 단장 자리를 내놓은 까닭
최병인 씨가 뉴욕밀알선교단 단장 자리를 내놓은 까닭
  • 김종희
  • 승인 2007.03.17 1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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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미주뉴스앤조이] 발행인 역할 집중…아내 김자송 씨 단장 직 수행

▲ 뉴욕밀알선교단 최병인 전 단장은 이제부터 언론사 발행인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았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장애인 사역을 해온 것처럼 앞으로 언론을 이끌어간다면, <미주뉴스앤조이>라는 언론은 한인 교회와 성도들이 건강해지고 성숙해지도록 돕는 수술용 칼이 될 것이다. (김종희)
최병인 씨 부부에게 지난 2월은 만감이 교차하고 만념이 머리를 스치는 한 달이었을 것이다. 최병인 씨(49)는 93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서 14년간 맡아왔던 뉴욕밀알선교단 단장직을 2월에 내려놓았다. 그는 "한편으로는 홀가분하지만 솔직히 허전한 마음이 더 크다"고 했다.

하지만 홀가분함과 허전함은 이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런 감정을 단번에 날려버릴 쇳덩이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미주뉴스앤조이> 발행인이 된 그는, 언론사 대표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뉴욕밀알선교단 단장 자리를 벗었다. 이 일이 그에게는 그만큼 중요했고 그에 따른 중압감이 컸던 것이다.

▲ 남편의 뒤를 이어 뉴욕밀알선교단 단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김자송 씨. 친동생과 다름 없는 차형옥 씨가 하늘나라로 간 지 꼭 1년이 된 날이다. 아쉬움으로 눈물을 흘리기보다 어떻게 하면 지금 함께하는 장애인들을 더 잘 섬길까 하고 마음을 추스르기로 했다. (김종희)
최병인 씨가 말을 갈아타는 바람에 애먼 짐을 떠맡은 이가 그의 아내 김자송 씨(45)다. 김자송 씨는 93년 남편이 밀알선교단을 만들 때 자원봉사자로 참여해서 매주 토요일 열리는 밀알사랑의교실을 기획해 지금까지 이끌어왔다. 한국의 대학에서는 사회교육을 전공했고 미국의 대학원에서는 특수교육을 전공했다. 학위 과정을 끝내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척박한 이 분야를 넓혀보고 싶었다.

그런데 밀알선교단이 장애인을 섬기면서 동시에 이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니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하는 마음에 여기에 폭 빠져버렸다. 그러다가 최병인 씨에게도 폭 빠져서 94년 결혼, 인생과 사역의 평생 동지가 되었다. 김자송 씨는 그동안 자신의 전공을 살려서 몇몇 교회가 장애인을 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도왔다. 아름다운교회· 퀸즈한인교회·동산교회의 장애우예배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장애인선교단을 그만 두고 언론사를 하겠다고 하니 아내 입장에서 그걸 좋다고 할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다면 하는' 남편의 성격, 얼마나 오래 전부터 이런 일을 하고 싶었는지 마음의 소원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런 언론이 필요하다는 데에도 공감했다. 새벽기도를 갈 때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했고, 마침내 동의했다.

그것은 이들 부부의 성격이 비판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힘, 명예, 권력을 가진 자들과 어울릴 때에는 교회의 현실이 잘 안 보이는 법이다. 낮은 자, 버려진 자, 눌린 자, 굶는 자, 갇힌 자들과 함께 있을 때 교회의 현실이 아주 또렷하게 보인다. 이들 부부는 10년 넘게 장애인 사역을 하면서 교회의 현실을 확실하게 본 것이다. "강단은 거룩한 곳이니 흠 있는 자들은 올라올 수 없다"고 장애인 행사를 예배당에서 하는 것을 거절하는 교회, 대신 돈 몇 푼을 후원금으로 주어서 자기 눈에 박힌 들보를 떼어내려고 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최병인 씨는 그런 것을 후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적선이라고 여겼다. 그는 장애인 선교를 변두리 선교 정도로 여기는 그런 곳에 가서 구걸 따위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14년이나 된 단체에 매월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교회는 10곳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런데도 밀알선교단이 활발하게 돌아가는 것은 마음이 맞는 자원봉사자들과 개인 후원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질과 함께 시간을, 마음과 함께 몸을, 기쁨과 함께 고민을 나누는 자원봉사자들과 후원자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없이 즐겁다.

아무튼 이런 심정으로 허락은 했지만 김자송 씨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만 진다. 그동안 주중에는 같이 사는 장애인들 챙겨주고 주말에는 사랑의교실을 운영하면 되는 실무자였다. 그저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즐겁게 일해왔는데,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총괄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내성적이고 수줍은 성격으로 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이 크다. 남편은 “내가 옆에서 계속 조언해주고 그동안 함께 일을 해온 이철희 목사가 도와주면 되지 않겠냐”고 격려를 하지만, 그 격려가 걱정을 떨쳐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 14년 전 뉴욕밀알선교단을 만들어 지금에 이를 때까지 이들 부부는 인생의 동반자로 사역의 동역자로 늘 함께했다. (김종희)
남편이 아내에게 단장 자리를 넘겨주는 것에 대해 고깝게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대형교회 목사가 아들에게 모든 권력과 명예와 부를 세습하는 것과 매월 끼니도 해결 못하는 가난한 시골교회 목사가 아들에게 모든 짐을 떠맡기는 것을 똑같이 보는 정신적 색맹들이나 하는 짓일 게다.

이들은 96년에 복지홈을 만들어서 장애인들과 11년째 함께 살고 있다. 큰아들 샘이 1살 때이고, 갓 태어난 작은딸 메리는 아기 바구니에 누인 채 이 집에 들어왔다. 다운증후군이나 뇌성마비를 앓고, 휠체어에서 한걸음도 떼지 못하는 지체 장애를 가진 5명과 같이 살고 있다. 최병인 씨의 체격과 체력이 아직은 좋으니 망정이지, 하루에 몇 번씩 화장실 변기에 앉히고, 매일 아침 학교 또는 병원에 데려다주고, 일주일에 두 번씩 목욕을 시켜주고, 수도 없이 터지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처리하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어쩌다 한두 번은 하겠지만, 그것을 10년 넘도록 같이 살면서 매일 겪어야 한다면….

그래도 감사한 것은, 샘과 메리가 언니, 오빠, 이모, 아저씨 하면서 이들과 잘 어울린다는 것. 하긴 거의 태어날 때부터 이들과 같이 살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안한 것은 아이들에게 방을 따로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얼마 전에 이층침대를 사서 잠자리는 구별해주었다. 네 식구만 따로 외식을 하거나 놀러가는 것은 언감생심. 아이들도 그런 건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아마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비가 오는데 자기는 비를 쫄딱 맞으면서도 장애인에게 우산을 받쳐주는 샘, 침을 뚝뚝 흘리는 장애인과 같은 그릇으로 밥을 먹는 메리에게 이들 부부는 그저 미안하고 고맙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다만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하고 조금 산만한 것은 걱정거리다.

이들이 그동안 장애인들과 같이 살면서 즐거움과 고단함을 다 겪었지만,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작년 3월 16일 세상을 떠났으니까 벌써 1년이 지났다. 10년 전에 처음 만난 차형옥 씨는 얼굴이 기형적으로 크고 정신 지체가 있었다. 어머니는 일을 하러 나가야 했기 때문에 형옥 씨는 하루 종일 복지홈에서 지냈다. 그런데 몇 년 뒤 유방암에 걸렸다. 수술을 했지만 재발했고, 암세포가 뼈에까지 전이됐다.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항상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생활했지만, 암의 고통은 이들 모두를 점점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틀에 한 번씩 함께 병원을 다니면서 투병하기를 꼬박 3년.

친동생처럼 정 많던 그녀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날 새벽, 김자송 씨는 차형옥 씨를 차가운 영안실에 혼자 놔둘 수 없어 4시간 동안 그 곁을 지켰다. 장례도 이들 부부가 치러주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끙끙 열병을 앓았다. 지금도 그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하지만 언제나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는 없는 법.

▲ 뉴욕밀알선교단에서 함께 지내는 장애인들, 자원봉사자들, 후원자들은 복지홈에서 함께 지내며 암과 싸우다가 꼭 1년 전 먼저 하늘나라에 간 차형옥 씨를 추모하는 예배를 3월 17일 드렸다. 식구처럼 지내고 있는 장애우들과 최병인 김자송 단장 부부. (김종희)
김자송 신임 단장은 그 와중에도 나름대로 마음에 품고 있던 소망의 한 자락을 보여주었다. 지금까지는 밥 먹이고, 학교나 병원 보내고, 씻기고, 온갖 잡일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사역을 체계적으로 하지 못했다. 사회복지사들 중에 장애인 사역을 하는 이들이 적다. 교회의 후원도 부족하지만 정부의 grant도 터무니없다.

재정만 넉넉해지면 장애인 사역을 체계적으로 하고 싶다. 특히 장애인 자녀를 가진 부모들의 공통된 바람은 자녀의 자립. 장애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이 최 단장의 소망이다. 이를 위해서는 재정이 가장 큰 문제다.

후원 구조를 합리적이고 지속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자원봉사를 하는 젊은이들에게 권유하는 것이 있다. 한국인 부모가 선호하는 '사' 자 전문직을 택하더라도, 장애인을 의료적으로 도울 수 있는 의사, 장애인을 법률적으로 도울 수 있는 변호사, 장애인을 교육적으로 도울 수 있는 교사가 되는 것을 소망하라고 한다. 무엇이 되느냐보다 '무엇을 하는' 무엇이 될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요즘에는 일반회사 중에서도 이런 단체에 매칭펀드를 하는 곳이 늘고 있으니, 회사에 취직하면 펀드레이징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도록 권유하고 있다.

언론은 칼과 같은 것. 강도가 쥔 칼은 생명을 빼앗지만 의사가 쥔 칼은 생명을 살린다. 이들 부부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변함없이 살아간다면, <미주뉴스앤조이>라는 언론은 교회와 성도들이 건강해지고 성숙해지도록 돕는 수술용 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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