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작은 교회는 성서적인가?
그러면 작은 교회는 성서적인가?
  • 신광은·박삼종
  • 승인 2008.07.10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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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교회의 크기에 대한 비판적 고찰

현대 교회와 신자의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교회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크기가 무슨 상관이냐,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하지…” 이 말을 달리 하면, ‘교회의 크기’와 ‘교회가 바로 서는 것’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말이다. 조금 유식하게 말해서 교회와 ‘크기(size)’는 ‘본질(essence)’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혹은 양(量: quantity)은 질(質: quality)과 무관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워낙 대중적이어서 마치 자명한 진리나 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장 큰 오해, 크기가 본질과 무관하다?

이 그릇된 관념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많은 문제들이 교회의 크기와 직간접적으로 영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신자는 이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가 ‘교회가 커서 사랑이 없다, 권력과 재정이 집중된다, 기업화 되어 간다, 세속화 되어 간다…’ 하고 비판하면 이렇게 변명한다. “그것은 교회의 크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가 아니오!” 그럼 무엇 때문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복음이 올바르게 전해지지 못하기 때문에, 설교가 성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주님의 뜻대로 사역하지 않아서, 또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랍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메가처치의 변호사로 나서는지, 그러면서 꼭 이렇게 반문한다. “그러면 작은 교회는 성서적이냐?” 

▲ 교인수 75만 명에 이르는 여의도순복음교회. 20m의 인간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곤란한 것처럼, 성장의 한계를 넘어 버린 메가처치도 교회냐는 물음에 우리는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크기는 본질에 영향을 미친다

정말로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과 무관할까? 많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 이 문제는 다분히 철학적인 문제다. 다음번에 교회의 크기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테지만, 여기서 간략하게만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교회의 크기에 대한 문제가 철학적인 문제라니 그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물이든 그것은 본질적인 측면과 비본질적인 측면이 있다.’ 본질적 측면이란 이것이 빠지면 더 이상 그 사물일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비본질적인 측면이란 이것이 없어도 사물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백인과 흑인이 있다고 해보자. 둘 다 사람이다. 그런데 색깔은 다르다. 이때 두 사람의 색깔은 비본질이다. 색깔이 검다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반면에 영혼은 두 사람의 본질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없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큰 사람, 작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크기(size)는 본질이 아니라 비본질이다. 키가 작다고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교회에 적용해보자. 큰 교회가 있고, 작은 교회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적용해 보면 교회의 크기는 본질이 아니다.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교회는 교회다. 교회가 크다고, 혹은 교회가 작다고 교회가 아니라고 말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 논리를 확장하면 교회가 아무리 커져도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메가처치도 교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논리가 메가처치 옹호론을 떠받치고 있다.  

언뜻 보면 굉장히 맞는 말 같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적인 관념 속에서나 가능한 얘기지 현실에서는 얼토당토 않는 얘기다. 왜 그런가? 다시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키가 180cm인 사람이 있고, 또 키가 160cm인 사람이 있다. 이때에는 키가 ‘사람됨의 기준’일 수 없다. 이 경우 키는 본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정 없이 키가 큰 사람에게도 이 말이 해당될까? 가령 키가 20m인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글쎄, ‘마징가 제트’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는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사람의 경우, 크기에는 반드시 ‘한계(limitation)’가 있다. 어느 정도 한계 안에서만 크기는 사람됨과 무관한 비본질이다. 그러나 이 한계를 넘어버리면 문제가 곤란해진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마다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계 안에서 가능한 얘기다. 한계를 넘어 버리면 교회의 크기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가 된다.  

본 연재의 첫 번째 글에서 우리는 메가처치를 ‘성장의 한계(growth limitation)’를 넘어버린 교회라고 했다. 과거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성장의 한계가 있었다. 교구제라든지, 도시나 마을의 크기, 교통이나 통신 기술의 한계, 교회당의 크기, 목회자의 신체적 한계 등이 교회의 크기를 제한했다. 그리고 이 한계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19~20세기를 넘어서면서 이러한 한계들이 하나씩 무너져버렸다. ‘성장의 한계’를 넘어버린 초대형 교회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메가처치다.  

이론상이지만 오늘날 하나의 지역 교회는 무한한 성장이 가능하다. 기네스북에도 올랐을 테지만 단 하나의 지역 교회(local church)가 75만 명까지 성장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지금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다. 오늘날 교회와 신자가 교회의 ‘크기(size)’를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고찰해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혀 새로운 현상으로서의 메가처치! 오늘날 교회의 크기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새로운 문제다. 20m의 인간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곤란한 것처럼, 성장의 한계를 넘어 버린 메가처치도 교회냐는 물음에 우리는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율리우스 씨저의 로마 개혁 

로마의 율리우스 씨저는 ‘크기’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았던 사람이다. BC 1세기 로마는 큰 위기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씨저는 로마의 위기가 근본적으로 로마의 ‘크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로마는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숙적 카르타고를 붕괴시켰다. 그러자 로마는 하룻밤 사이에 지중해상의 최강자가 되었다. 영토는 확대되면서, 시장도 확대되고, 로마의 비즈니스는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유럽과 아시아의 엄청난 부(富)가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과거와는 전혀 다른 문제들을 만들어냈다. 우선 로마의 부는 주로 원로원과 귀족들, 경제인들에게만 돌아갔으며, 평민들은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빈부 격차는 엄청나게 커지고, 실업자도 급증했다. 값싼 곡물이 수입되자 농업은 붕괴되고, 농가는 몰락했다. 소수의 귀족들이 대토지 농장, ‘라티푼디움’을 소유하는 붐이 일어났으며, 그러자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도시로 쫓겨 갔다.

실업자의 증가는 로마 군단의 질적 저하를 초래했다. 동맹국들는 로마와의 연대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광대한 속주들을 통치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이 모든 문제들은 궁극적으로 로마의 ‘크기(size)’ 때문에 생겨난 문제였다. 시오노 나나미 식으로 말하자면, 몸집은 커졌는데 내장이 이를 따라잡지 못했던 것이다.  

율리우스 씨저는 1세기 로마의 위기를, 늘어난 로마의 크기에 걸맞은 제도와 시스템의 부재 때문이라고 정확히 진단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로마의 크기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무조건 커지기만 한다고 좋을 일이 아니었다. 그는 로마가 감당할 만한 크기로 로마의 국경선을 확정했다. 라인강, 도나우강, 유프라테스강을 로마의 국경으로 확정했다. 이 국경선을 든든한 성벽과 방책으로 막았다. 

이제 그는 국경선 내부의 광대한 영토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씨저의 구상은 늘어난 로마의 영토, 곧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를 중심으로 동서 유럽, 스페인, 브리타이나, 북아프리카, 이집트, 팔레스타인, 그리고 소아시아를 망라하는 세계를 하나의 제국으로 묶어 통치하는 것이었다. 이 광대한 코스모폴리스(cosmopolis)는 더 이상 이탈리아 반도 중앙에 위치한 조그마한 폴리스(polis), 로마가 아니었다. 이것은 로마 제국(Roman Empire)이라고 불러야 할 만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몸집에 걸맞은 내장을 갖추어야 했다. 

그는 수많은 민족, 언어, 문화, 종교권을 하나로 묶는 조치를 내렸다. 두 번째로, 그는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서 분산된 권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고자 했다. 셋째로, 무엇보다 그는 로마가 제국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세계관, 곧 정신(spirit)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씨저는 이 정신을 ‘관용’이라고 불렀다.

사실 씨저 그 자신이 관용, 곧 똘레랑스의 정신(spirit)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과 맞섰던 정적들을 숙청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그는 또 호위병 없이 로마 시내를 맨 몸으로 돌아다녔다. 로마의 웅장한 성벽도 헐어버림으로써 더 이상 로마는 일개의 도시 국가가 아님을 선언했다. 로마 전역의 속주민들도 사실상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특히 씨저의 관용의 정신은 원로원의 숫자를 기존의 600명에서 900명으로 늘리면서, 이때 늘어난 300명의 대부분을 갈리아인들로 채워 넣는 데에서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결국 씨저는 이러한 조치에 분노한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 조직의 외적인 ‘크기(size)’는 내적인 구조, 시스템, 정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외적으로 크기가 커지면 반드시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만일 조직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조직은 붕괴하게 된다. 크기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구조, 시스템, 정신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이다. 새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1세기의 로마는 씨저의 개혁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거듭날 수 있었고, 그 덕에 500년(동로마의 경우는 1500년)을 더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처럼 크기는 본질에 영향을 미친다. 

▲ 메가처치는 결국 신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고, 메가처치가 단순히 ‘큰’ 교회가 아니라 심각하게 병든 교회라는 사실이다. 
교회의 크기는 신학의 문제다

교회를 포함하여 모든 조직체가 커지면 불가피하게 로마와 유사한 문제 앞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크기(size)’의 문제다. 예외는 없다. 모든 교회는 어느 정도 커지면 기존의 내적인 구조, 시스템, 정신과 모순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소위 ‘성장의 장벽’이 눈 앞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칼 조지는 교회가 75명, 200명, 400명, 800명, 3,000명, 6,000명일 때 성장의 장벽을 만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때 발생하는 문제의 핵심은 ‘크기(size)’의 문제라고 요약할 수 있다.  

교회가 ‘크기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1세기 로마처럼 내부 구조, 시스템, 정신의 영역에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물론 각각의 단계마다 개혁의 성격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칼 조지에 의하면 200명 장벽에 서게 될 때, 교회는 ‘작은 교회 사고방식’을 버리고, 친밀감에 대한 욕구를 보류하고, 목사는 양치기에서 목장 경영자로 전환할 준비를 하며, 소그룹을 조직하고, 건축 관련 사업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400명의 장벽을 만날 때는 당회가 기존의 통제의 역할을 버리고 협력 기관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또 유급 직원과 부사역자를 고용하며, 이들에게 적절하게 임무를 분배한다. 800명의 장벽을 돌파하기 위해서 담임목사는 양치기 역할을 그만두어야 하고, 전체를 통괄하는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 이때 권력은 담임목사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교구는 합리적으로 재편성하고, 직원과 교역자들은 연령별로 재배치해야 한다. 또 마케팅 방법론을 도입해야 할 때도 이 때다.  

이러한 각각의 단계를 훌륭하게 거치고 메가처치(통상 3,000명 이상)가 된다는 말은 결국 씨저식 개혁을 훌륭하게 완수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씨저가 그랬던 것처럼 메가처치는 먼저, 전산망이나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기타 조직을 통해 전교인을 효과적으로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보다 효율적이고 신속한 교회 운영을 위해 권력은 담임목사에게 집중될 필요가 있다. 이때 관건은 담임목사의 생각이나 판단은 신속하게 각 성도들에게 전달되는 체제를 정비하는 것이다. 셋째, 권력의 중앙 집중과 동시에 중규모와 소규모의 교구, 모임, 소그룹을 원활하게 운영해야 한다. 이것은 성도들의 자발성을 유도하는 최상의 방법 중 하나다.

이상의 것들을 통해 메가처치는 거대한 회중이 마치 한 인격체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리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넷째, 교회는 로마식 관용의 정신을 배워 배타주의를 극복하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적 분위기로 바뀌어야 한다. 종종 이러한 개방성은 지상명령 이데올로기로 합리화된다.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이러한 교회의 조직과 시스템, 정신의 개혁은 궁극적으로 신학적인 문제와 불가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크기에 걸맞은 내부 구조, 시스템, 정신의 개혁은 순전히 조직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조직의 문제일 뿐 아니라,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문제를 아울러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교회의 성장은 신학적, 신앙적 문제를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를 포함하는 모든 조직의 경우, 크기의 확대에 따른 내부 개혁은 물리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그리고 정신적, 영적인 차원을 포함해야 한다. 메가처치는 바로 이러한 개혁에 성공한 성과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메가처치 신학과 만나게 된다. 메가처치 신학이란 교회가 이러한 내부 개혁을 보다 효과적으로 가능케 하고, 또 그렇게 해서 생겨난 메가처치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신학적 방편을 말한다. 메가처치 신학은 주창자나 정리된 교과서를 따로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메가처치 신학은 큰 교회가 선호하는 신학적인 내용이라는 공통의 특성이 있다. 그래서 교단을 초월하여 메가처치는 비슷한 신학을 가지고 있다.

교회성장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는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신학적 동질성은 교단이나 교파보다는 크기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교단이나 교파에 관계없이 비슷한 크기의 교회들은 비슷한 내용의 신학을 가진다는 뜻이다. 이것이 우리가 '메가처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의 크기는 결국 신학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 우리는 이제부터 메가처치의 신학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제 우리는 교회의 크기와 연관된 신학적 내용들을 하나씩 분석할 것이다. 우리는 메가처치의 계시론으로부터 시작하여, 구원론, 교회론, 예배론, 전도론, 그리고 직무론 등의 내용들을 다룰 예정이다. 이러한 분석 작업을 통해서 메가처치는 결국 신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교회라는 사실과 메가처치가 단순히 ‘큰’ 교회가 아니라 심각하게 병든 교회라는 사실을 밝힐 것이다. 그래서 메가처치는 결코 모범적인 교회로 여겨질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밝힐 예정이다.

신광은·박삼종 / 열음터공동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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