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삶 어디 있으랴
흔들리지 않는 삶 어디 있으랴
  • 최형묵
  • 승인 2008.08.22 10:4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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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여정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

본문: 마태복음 8:18~22

▲ 인간의 삶은 늘 불안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관심이 높다. 사진은 미아리 점집촌. (사진 출처 서울시 홈페이지)
지난주에 묘한 경험을 했습니다. 수요일 아침 기독교방송 TV 토론을 마치고 서점에 들러 책 몇 권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떤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기독교를 전도하는 사람들은 아니고 어느 종파에 속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종의 전도자들이었습니다. 평상복을 입은 아주머니 두 분이었는데,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미륵불 계통의 출가 스님이라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길거리에서 짧은 시간 동안 저를 붙잡고 말을 걸어오는데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첫 인상부터 시작해 줄줄 풀어놓는 이야기가 제법 솔깃했습니다. 비의적인 이야기들이라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 미묘하게 아닌 것 같은 이야기도 일부 있었지만 대체로 저의 신상과 속사정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이야기가 줄줄 이어졌습니다. 다소 섬뜩한 느낌과 동시에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그분들 말 대로 뭘 믿으라는 것도, 어디 나오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 이야기를 하자고 하니 마음이 동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야기할 거 뭐 있겠느냐고 뿌리치면서도 속으로 상당히 동요를 했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산으로 잠시 시간 내서 정말 내 삶의 어떤 비밀과 대안을 한번 이야기해볼까 싶기도 했습니다. 잠시 실랑이 하며 몇 마디 이야기 나누는 중에 놀랍게도 제 신분까지 짚어냈습니다만, 결국 인연이 있으면 또 보자고 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던진 이야기들이 귓전을 계속 울리는 것 같은 느낌에 '정말 그런가'하는 반문이 계속 생겼고, '에이 이야기나 한 번 해볼 걸'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날 아침 기독교방송 토론 주제가 '기도'였는데, 진지하게 기도에 관해 생각을 나누고 오는 사람이 그 기도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두고 엉뚱한 데서 답을 찾으려 기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비로소 평정심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들이야 확신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만일 이야기를 더 듣고 왔다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이야기일 뿐인, 확신에 찬 그 단언들에 결국 내가 매이는 꼴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이르러서야 평정심을 찾았습니다.

마음공부 하게 해준 전도자들

그렇다고 해도 그 여운이 쉽사리 사라질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나누는 시간에서까지도 화두로 삼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뜻밖의 계기로 마음공부 한 번 잘했다 생각됩니다. 옳든 그르든 그 이야기들 덕분에 나 스스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내 마음의 문제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으니 마음공부 톡톡히 한 셈입니다.

인간 삶의 본질 자체가 끊임없는 불안과 동요 아닐까요. 그러기에 동시에 끊임없이 그 불안과 동요를 잠재우기 위해 애쓰는 것이 삶의 또 다른 속성입니다. 확실한 지식을 통해 그 불안을 넘어서려 하기도 하고, 확고한 그 믿음을 통해 그 불안을 넘어서려 하기도 합니다. 또는 삶의 안정을 보장해주는 구체적인 소유와 지위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유형의 물질이든 무형의 지식과 믿음이든, 사람들은 어떤 확실성 확고부동함을 통해 불안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제가 그분들 이야기에 솔깃했던 것도 저 역시 다른 누구와 다를 바 없이 그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새삼 확인한 것은 사실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 계기 자체는 새삼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인간의 삶의 안정과 평안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묻게 되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물음을 던지며 말씀을 묵상하자니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유명한 시로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제목의 시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꽃에게 비와 바람은 적이 아니다. 비와 바람이 있어야 비로소 꽃이 필 수 있다. (사진 제공 김민수)
어떤가요. 퍼뜩 드는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이 시에 관한 느낌을 몇 마디 언어로 다 정리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 인상을 한두 마디로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꽃을 흔들리게 만들고 젖게 만드는 바람과 비는 꽃의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조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꽃의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해 주는 조건입니다. 비바람 피해 젖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기를 갈망하지만, 비바람에 젖고 흔들리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는 것을 노래합니다.

흔들리는 삶은 당연한 것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서 그 묘한 역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벌이는 것을 목격한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무리를 헤치고 다가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뜸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거 따라오라는 이야기입니까,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순전히 그 문맥을 추려 말하면, '나와 같은 삶을 살 자신이 있거든 따라오라'하는 이야기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너도 이런 삶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 그렇다면 따라 오라."는 이야기입니다. 순전히 논리적으로 헤아리면 이 대답에서 예수님의 태도는 결의에 차 있고 확고부동합니다. 한마디로 독합니다.

그 태도는 이어지는 어떤 제자와의 대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합니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 요청에 예수님은 어떻게 답하십니까?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죽은 사람들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 세상에! 아무리 대의를 위해 일한다지만 아버지의 장례마저 막는 스승이라니! 예수님의 태도는 정말 단호합니다. 독합니다.

아마도 율법학자가 아직 태도를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서 있었을지 모릅니다. 바로 그 앞에서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 율법학자를 더욱 다그치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을 따르려거든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 받는 인상은 하나님나라를 위한 예수님의 비장한 삶, 확고한 신앙의 결의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에서 새삼 다른 면모를 발견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욱 새롭게 발견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얼마나 인간적인 고백입니까? 우리의 이미지로 굳어진 확고한 구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상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면모를 간과합니다. 단호하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완전한 인간이요, 신성을 체현한 분으로만 연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곳곳에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쓴 잔을 피하고 싶어 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리고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그런 면모는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보자

2003년 맨체스터대학 연구팀이 만들어낸 예수의 얼굴. 2000년 전 유대인 농부의 두개골을 재료로 법의학 기술과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면모에서 우리와 동행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느낍니다.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어쩌면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의 그 고백이야말로 인간의 구원의 길을 보여줍니다. 그 삶은 요지부동한 어떤 실체에 매어놓는 삶이 아닙니다. 특정한 대상, 특정한 조건에 고착될 수 없는 인간의 삶입니다.

반면에 지금 예수님 앞에 선 두 사람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와 대비되는 삶의 방식에 매여 있습니다. 율법학자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논리적 분명함을 추구하고, 체제와 질서의 확고부동함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 삶에 매인 사람들을 일러 ‘죽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장례를 치르겠다는 제자를 두고 하신 말씀, 곧 "죽은 사람들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는 말씀은 소위 말하는 인간적 법도가 인간의 삶을 옭아매고 결국 삶을 죽음과 같이 몰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확실성, 요지부동함을 추구하는 삶은 언제나 그와 같은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어떤 지식이 절대화되고, 어떤 사람이 체험하고 확신한 믿음이 절대화되고, 한번 만들어진 질서와 체제가 고착화되고, 주어진 소유와 지위가 절대화될 때 삶은 죽은 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 즉각적인 응답과 확신을 요구하고 강요하는 한국 교회의 신앙 풍토는 그와 같은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즉각적인 응답 요구하고 강요하는 한국 교회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의 그 삶은 우리가 뛰어 넘어서고자 하는 삶의 불안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삶의 여정을 말합니다. 성서 본문을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현존하는 질서에 갇힌 사람들은 허둥댄 반면 현존하는 질서 안에 보금자리도 머리 둘 곳도 없는 예수님의 삶에 역설적으로 진정한 평화와 온전함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그 삶은, 특정한 삶의 조건에 고착되지 않는 삶, 끊임없는 구도의 삶,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여정, 구원의 길을 말합니다. 그 여정은 진실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며, 우리의 삶을 진짜 삶답게 만듭니다. 그 여정을 즐기는 삶, 그 여정을 향유하는 삶이야말로 진실로 아름다운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길을 진정 기쁨으로 나서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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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hrann 2011-07-18 04:38:57
Boy that relaly helps me the heck 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