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 이야기(5)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 이야기(5)
  • 구교형
  • 승인 2008.09.1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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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십일조 정신)

▲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이를 증명한다.
우리가 이렇게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대해 강조하면 마치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헌금 정신을 살펴보면 이웃을 섬기는 게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생각해 보라. 모든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이었기에, 하나님은 사실상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한 푼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욥 41:11)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린다고 헌금을 바치지만, 사실은 한 푼도 남김없이 사람에게 돌아간다. (교회 운영에 쓰이든 이웃을 위해 사용되든) 그런 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십일조로, 십일조는 종교세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보장제도의 기능을 했다.(신 14:22~29, 26:12, 13)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했던 떠돌이, 외국인노동자, 고아, 과부, 그리고 레위인(별도의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으므로 이들도 생활보호 대상자다.) 등은 어김없이 십일조의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에서는 그러한 공평과 정의의 제도를 폐하지 않고 지킨다는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의 복을 기대할 수 있었다.(신 26:14, 15)

이러한 정신은 신약까지 그대로 이어지는데, 무엇보다 바울을 통해 이미 확인되는 초대 교회 헌금 정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은 '성도를 위하는 연보'(고전 16:1)라는 표현으로 헌금이 결국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분명히 '연보'를 성도와 공동체 사이에 나눌(평균케 할) 하나님나라의 대책으로 말하고 있다.(고후 8:4, 12~14) 그리고 그것은 바로 광야에서의 만나와 메추라기 먹음으로 연결되는(고후 8:15→출 16:17, 18) 영적 체험이다. 그것이 바로 이들 사이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물질을 나누는 것은 지극히 영적인 현실이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증거다. 결국 성도들끼리 서로서로 물질을 나누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그걸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개념을 읽을 수 있다.(고후 9:7, 11, 12)

그것은 교회사에서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전통이다. '우리는 교회 재산은 토지든 돈이든 전부 빈민을 위한 재산이라는 생각을 교회 회의의 결정과 고대의 저술에서 종종 발견한다. 그래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그들이 자기 소유를 처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빈민을 돕기 위해서 임명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악한 마음으로 교회 재산을 감추거나 낭비하는 배신행위를 저지른다면 그들은 살인죄를 범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 재산을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분배하되 마치 하나님 앞에서와 같이 최대의 경외와 공경으로 편벽(便辟)됨이 없이 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4권)

4. 자본주의의 위험성

앞서 말했듯이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특정 체제를 선호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굳이 말한다면 현실에서는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가 더 위험하다. (표현에 주의하라. '사회주의가 더 옳다'가 아니라, '사회주의가 덜 위험하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더 갖고 싶은 욕망을 제어하여 굳이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하려 하나 이는 타락한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주의는 어린아이 때부터 굳어진 강렬한 이기심과 소유 의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발전의 자극제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전자는 본능에 거슬러 억지로 하려하니 강제와 독재가 되기 쉽고, 후자는 본능에 너무 충실하려니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을 제어할 한계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현실에서 사회주의보다 강하고, 두 체제의 대결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강함이 꼭 옳음을 말하지는 않는다.

시장도, 화폐도, 사유재산도 자본주의에만 있는 고유의 제도가 아니다. 그러나 오직 자본주의만이 세상 모든 것을 돈으로 대신할 수 있는 제도다. 자본주의는 자본(돈) 운영의 자유를 그 사회를 유지, 발전하는 가장 중요한 중심축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 전통, 사회적 가치, 심지어 가족과 인간관계, 사람의 가치, 종교적 믿음까지도 자본의 잣대로 재평가하게 된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로서의 자부심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꿔주는 예술가나 디자이너로 인정받아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성형외과 전문의. 여성의 생명과 출산을 돕는다는 본래의 명칭이 어색하게도, 한 생명을 탄생하는 일(출산)보다 한 생명을 없애는 일(낙태)에 더 큰 경영 목적을 갖는 산부인과. 얼마나 성경적이고 합리적인가를 분별하기 보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 많은 돈을 내고, 큰 건물을 지었느냐를 기준으로 평가되는 교회와 목회자. 자본주의는 이유야 어떻든 결국 성장한 사람, 결국 승리한 기업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모든 공과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 성공, 번영, 돈, 시장, 자본, 힘을 찬양하게 되고, 성경이 경계하는 풍요의 신 바알주의(구약), 재물의 신 맘몬주의(신약)로 연결되기 쉽다. (웨신대 남오성 교수는 2008 성서한국 인천·부천대회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 감독과 집사들은 교회 재산을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분배하되 마치 하나님 앞에서와 같이 최대의 경외와 공경으로 편벽(便辟)됨이 없이 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1~16)는 경제 원리의 교훈을 주려는 목적으로 기록된 본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올바른 기업 정신은 단순한 자본 축적이 아니라, 나눔과 고용을 통한 혜택을 나누는 것이라는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다. 나는 기업(가)이 이윤을 포기하고, 자선에 집중하라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성경 정신을 원용하지 않아도 기업은 사회로부터 온갖 유무형의 혜택을 받고 성장하는 것인 만큼 '내가 벌었으니 내 것'이라는 천박한 인식을 넘어 사회적 공동체성이 보다 깊이 적용될 수 있는 방식의 발전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사유재산을 분명 인정하지만, 그것의 절대성은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자기 밭의 추수를 할 때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도록 다 거둬가지 말고 일부러 남겨두도록 했다.(신 24:19-22) 돈 놓고 돈 먹기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자본 축적 방식이지만, 성경은 채무자의 권리를 우선적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돈을 못 갚는다고 채무자를 홀대하면 하나님은 오히려 빚진 사람의 부르짖음을 더 크게 들으실 것이라고 한다.(출 22:25~27)

일반적으로 자선은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베푸는 배려요, 선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자선은 베푸는 사람의 결정에 달렸고, 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성경은 자선을 개인화하여 베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고, 최소한의 자비심은 명령인 것처럼 가르친다. 그래서 '자선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이 듣고 심판하겠다'고 경고한다.(출 22:21~23, 신 15:7~9) 그러므로 이렇게 구조화되고 사회화된 자선은 이미 개인적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공의로운 사회 구조다.

그러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수용해야할 것인가?

이미 충분히 확인되었듯이 개인 능력의 자율성과 창의성, 기본적 사유재산의 책임을 받아들이되, 그걸 만능으로 여기지 말고 남용되지 않도록 견제하고 감시하는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이 세상 거의 모든 제도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타락과 한계를 어느 정도 인정한 차선이거나 차악인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본주의를 수용하되, 최선이요 유일한 대안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본래 더 좋은 제도와 정신은 그렇지 않지만 인간의 한계를 고려해서 최소한으로 수용한다는 심정을 가져야 한다.(마 19:8) 따라서 성경의 희년사상은 이미 폐하여진 고대 시대 율법 정도로 치부하면서 시장 경제, 자본주의, 경제 성장이 이 시대 유일한 하나님의 대안인 것처럼 외치는 것은 바알주의요, 세속주의다. 사유재산의 자유와 시장 경제는 알아도 성경의 희년법은 철지난 떨이 상품 정도로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신 풍요는 함께 누리는 것이다.(신 12:12, 17, 18, 14:26) 무절제한 절대적 사유제 사상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사유재산과 영리 추구를 허용했던 성경을 근거로 오늘 우리의 불의한 자본만능주의를 정당화하려 하지 말라.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 하나님의 법이 우선인지, 자본주의 제도가 우선인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선택해야 한다.(마 6:19~24, 왕상 18:21)
 
구교형/ 희년토지정의실천운동 전문위원·성서한국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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