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면 지옥 간다' 논쟁의 허상
'자살하면 지옥 간다' 논쟁의 허상
  • 김종희
  • 승인 2008.10.23 17:45
  • 댓글 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교회, 정답 그만 쏟아내고 눈물 쏟아야 할 때가 아닐까

고 최진실 씨 자살 사건이 10월 2일 일어났으니까, 20일가량 흘렀다. 한 시대를 풍미한 유명 연예인이었기에 언론의 추적은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강남에 있는 대형 교회를 다니던 교인이었던 탓에 ‘기독교인의 자살’에 대한 논의가 기독교 안에서 제법 활발하다. ‘교인(敎人) 최진실 씨 자살의 원인과 자살 방지 대책’에 대한 목사들의 설교와 전문가들의 칼럼이 쏟아지고, 관련 책이 나오는가 하면, 심지어 탤런트들까지 출연한 이벤트도 열렸다. 이런 표현이 좀 그렇지만, 마치 교회가 ‘자살 특수’를 누리는 것 같다.

내용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정답을 제시하기 위해 애를 쓰는데, “그래 맞아, 바로 이거야” 하는 감탄사는 쉬 나오지 않는다.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루머’, ‘인터넷의 악성 댓글’, ‘우울증’이라는 일반적인 원인을 바닥에 깔고, ‘영혼의 약함을 극복하지 못해서’, ‘자살이 죄라는 말씀에 충실하지 못해서’, ‘교회의 성공주의 신앙관 때문에’라는 종교적인 진단을 덧씌웠지만, 가슴속으로 허한 바람만 스쳐갈 뿐이다.

이런 용어가 정식으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답 강박 증후군’에 빠져 있는 한국 교회만 보인다.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빨리 정답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에 제대로 여물지도 않은 답들을 쏟아낸다. 그런 답에 힘이 있을 리 만무하다.

정답을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기는 일반 교인들도 매일반이다. 송구영신 예배에 가서 성경 구절이 담긴 쪽지를 바구니에서 꺼내 쥐고는 “하나님이 새해에 내게 주신 말씀”이라고 받들어 모신다. 대개는 서너 달을 못 넘기고 까맣게 잊어버린다. 우주의 생애에는 “요이 땅” 하고 시작하는 출발점과 도착 테이프를 끊는 도착점이 뚜렷하게 있어야 한다. 우주의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으면 불안하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확신이 없으면 가짜요, 지옥 행이 예약되어 있다. “당신이 갖고 있는 ‘구원의 확신’이 당신의 구원을 보증하지 못한다”고 하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

정답을 쥐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이들과 정답을 주지 못하면 허전해하는 이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종교 비즈니스는 날이 갈수록 번창하고 있다. 자살하면 지옥 가니까 자살하지 말라고 정답을 제시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자살하는 사람의 숫자가 줄지 않아서 OECD 국가 중 자살 랭킹 1위를 유지해야만 한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정답을 열나게 외치지만, 지옥 갈 불신자들이 줄어들면 곤란하다. 종교업자들이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니까.

최진실 씨의 자살과 관련해 증세가 심하게 드러난 정답 강박 증후군의 백미는 ‘기독교인이 자살하면 지옥 가냐’는 논쟁이다. 최 씨 이전에 기독교를 믿는 여러 탤런트들이 자살을 했기에, 기독교인의 자살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기독교 내부에 뭔가 심각한 구멍이 뚫려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자살하면 지옥 가냐’는 엽기적으로 진지한 논쟁으로 승화될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꼭 그렇게 몰고 가야 직성이 풀린다.

이쯤 되면 고인에 대한 예의나 유족에 대한 배려는 온데간데없다. 자살한 고인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면 내 믿음에 금이라도 갈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티끌이라도 묻을 것처럼 상처 난 곳을 헤집는다.

▲ 고 최진실 씨의 자살 사건을 정점으로 '기독교인의 자살'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왼쪽은 최진실 씨의 생전 모습이고, 오른쪽은 조성돈 교수와 정재영 교수가 쓴 책 <그들의 자살, 그리고 우리>이다.
논쟁이 뜨거운 곳은 <뉴스앤조이>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신학을 가르치는 조성돈 교수와 종교사회학을 가르치는 정재영 교수가 <그들의 자살, 그리고 우리>라는 제목으로 책을 한 권 냈다. 오래 전부터 자살 문제를 연구해서 기독교 잡지에 연재한 것을 종합했다고 한다. 그 책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댓글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기사에 나온 책 내용을 인용하면, “자살은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질병으로 봐야 한다”,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속설이 교인들뿐 아니라 목회자들에게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공포가 한편으로는 기독교인의 자살을 상대적으로 줄이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기독교인 중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러한 경고가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았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어 더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가게 된다”고 했다.

쟁점은 두 가지다. “자살은 분명히 죄인데 그것을 질병으로 오도했다”는 것과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인데 어찌 속설이냐”는 것이다. 비록 엽기적인 논쟁이기는 해도 나름 진지하다.

“자살은 죄인데 질병으로 오도했다”는 주장은 “자살해도 천국 갈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자살하라는 말인가?”, “자살하면 천국 가니 자살 많이 하라는 주장을 하는 것인가?”, “사회적인 질병을 위해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단 말이냐?”, “그러면 가룟 유다의 자살도 질병인가?” 하는 희한한 논리로 단박 뛰어오른다. 나도 궁금하다. “그럼 삼손도 지옥 갔나? 신약에서는 삼손의 믿음을 칭찬하던데?” 풍부한 상상력과 허무맹랑한 비약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걸 모를까.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것이 속설이라는 거짓 선지자”, “자살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도 문제지만 하나님 말씀을 속설로 치부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자살하고 싶어도 하나님 말씀이 무서워서 자살을 못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을진대, 그 사람에게 자살을 해도 좋다는 말이군요”, “자살은 십계명 중에 1계명부터 시작해서 4가지 이상의 중요한 계명을 다 어긴 결과로 마땅히 지옥 간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다”는 주장까지 튀어나온다. 성경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성경을 덮어놓고 믿는 이들의 주장이다. 성경은 ‘덮어놓고’ 믿지 말고 ‘펼쳐놓고’ 읽어야 한다.

이러한 진지함 속에서 ‘확신’과 ‘정답’은 보이는데, 인간에 대한 애정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고인의 영정 앞에 ‘성도’(聖徒)라는 단어를 쓴 것을 나무라고, 자살한 사람의 장례예배에서 목사가 뭐라고 설교했느냐고 따진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두 자녀를 남겨두고 이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이라는 낭떠러지 추락 행을 택할 때까지 그의 가슴에 켜켜이 쌓인 고통의 무게를 함께 짊어질 맘이 확신범, 정답주의자들에게는 아예 없다. 자살 외에는 더 이상 다른 길이 안 보이는, 그런 극심한 고통을 겪어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런 이들의 얼굴을 내 왼쪽 심장에 묻고 함께 통곡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아마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주는, 확신범들이 주는 ‘정답’에 대한 미련을 벌써 버렸을 것이다. 그런 정답들이 나날이 쌓여가는 이 세상의 다양한 고통을 해결해줄 ‘원조 정답’이 아님을 진즉 간파했을 것이다. 오히려 가녀린 생명을 무참히 짓밟는 살인 무기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저 멀리 십자군부터 요 가까이 부시까지 ‘정답 확신범’들이 휘두르던 대량 살상 무기의 잔인함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고인이 폭음을 했다는 그날 밤 만약 예수님이 그의 곁에 계셨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얘야, 술 먹으면 지옥 간다” 하셨을까. “얘야, 죽으려고? 그럼 천국에서 나 못 만나” 하셨을까. “얘야, 얼마나 힘들었니, 얼마나 아팠니, 얼마나 외로웠니”, 함께 울어주셨을까. 어느 게 ‘원조 정답’일까.

소망의 바다가 부른 ‘그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의 노랫말이다.

이젠 다 끝이라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혹 엉뚱한 선택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해 버리고 싶을 때
그대 향해 손 내밀고 있는 누군가 있다면
그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나요
그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그댄 더 이상 혼자가 아니죠
이미 오래 전부터 그댈 따듯하게
지켜보고 있던 한 사람 있었기에
그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그댄 더 이상 혼자가 아니죠
이미 오래 전부터 그댈 따듯하게
지켜보고 있던 한 사람 있었기에
그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4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닉네임 2024-03-06 10:04:09
저도오늘이라도 죽고싶은데어떻게죽어야할까요알려주세요

닉네임 2024-02-27 12:39:08
저도 죽고싶어요제발어떻게죽었을까요

욱일승천 2008-10-28 02:00:52
오늘날 기독교(개신교)인이 착각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자살에 대한 문제 입니다..자살에는 두가지 영역의 자살이 있습니다...하나는 자기 유익을 위해 죽는 자살 입니다...가룻유다 처럼 예수님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말씀하셨죠 또 하나는 의을 위한 자살 입니다... 몇년전 일본에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전철에 뛰어들어 자신은 죽고 남을 살린 경우 입니다... 분명한 것은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내 맘대로 내 생명을 해할 권리는 안주셨다는 사실입니다..(다시정리하면 남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자살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살인 행위라는 사실입니다...)구원을 받지 못합니다....고.전 13장에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않고 했습니다..정말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살 할 수도 없거니와 성령이 마음 안에 내주 하시면 성령이 말씀하십니다..(성령받았는지 안받았는지 자신은 알지요-자신이 천국에갈지 지옥에 갈지도 암니다..)그러나 구원받은 확신이 없는 사람은 자살하게 되어 있습니다...설사 성령 받았다(구원받은 확신이 있더라도) 하더라도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자살은 죄악이라고 그러나 끊임없이 말씀하시는데 끊임없이 죽어야 겠다고 마음 먹으면 어느 선에서 성령님이 떠나가십니다...하나님의 성전(몸)(고전316-17)이 파괴 되므로 그러면 그 사람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집니다...성령 충만 할때 세상 사는게 너무 힘들어 자살할 생각 갖고 있다가 죽을라고 옥상에서 떨어져 죽을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음성을 세 번 주셔서 죽지 않고 지금도 살아계시는데 저의 어머니 입니다...하나님이 막으십니다...하나님이 막으십니다...남을 살리기 위해서 나라(조국)을 위해서 자살한 경우는 성령을 받은 상태라면 구원을 받을수 있습니다....이러한 자살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말씀을 어슬푸게 아니까 그 내용은 못찾고 그런 내용이 성경에도 없는데 하면 비난하고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사람들이 제대로 설명을 못한 탓도 있습니다...그리고 특히 아랫 내용 댓글중 이순신 장군대해 얘기하시는데 이순신 장군이 자살했다 할지라도 나라를 위한 구국충절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구원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간접-하나님만 아십니다..)...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복음 듣지 못한대로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로마서 잘읽어 보십시오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조선시대 사람이나 예수님 오시기전 사람들 현재 시대에서도 복음 듣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 성경에 정답은 있습니다...그 말씀을 볼수 있는 영적인 눈을 달라고 기도 하세요 최진실씨하고 나하고는 한 살 차이지만 그들 가족에게는 슬픈 이야기지만 자살은 죄악이므로 자살을 미화해서는 안됨니다.. 생명의고귀함 생명의 소중함 생명은 내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할 책임은 각자 에게 있습니다....몸은 부모님이 주셨지만 생명의씨앗은 조물주가(하나님) 주신것이기 때문입니다...내몸 내생명은 내것이 아님니다. 특히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입니다...자살할 정도의 힘이있다면 살수도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의 차이입니다...

reader 2008-10-25 15:58:33
한마디로 감상적으로 고인에 대한 연민의 정은 내보이나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글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첫째로, 자살이 과연 죄냐, 아니냐는 문제와 그것이 지옥에 갈 정도로 궁극적으로 구원에 관계된 것인가라는 문제는 분명히 교리적, 신학적으로 검토되어어야 할 영역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명료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애매모호한 상태로 덮어둔다면 더 큰 혼란을 자초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둘째로, 교리나 성경적용의 문제에 있어서 교인이라고 한다면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만약 그 대상이 유명인이 되어서 무언가 예외를 두고 싶다면,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성경도 아니다. 세째로, 목회적 돌봄과 성도간의 교제의 문제가 되는 것은 지체 없이 살펴서 그 문제점을 해결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허상'과 같은 제목이야 말로 선정적인 제목으로 논지를 오히려 단순화시키는 위험을 자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다 성숙한 자세로 진지한 접근을 해야 할 무거운 주제를 오히려 희화화하고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