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분 후의 삶]이 [한국의 글쟁이들]보다 재미있는 까닭
[일분 후의 삶]이 [한국의 글쟁이들]보다 재미있는 까닭
  • 김종희
  • 승인 2008.10.24 2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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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뛰어난 글맛, 두 배의 감동

▲ <일분 후의 삶>, <한국의 글쟁이들>, <한국의 고집쟁이들>. 세 권 모두 전현직 일간지 기자들이 취재 현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책 고르는 취향이 조금 변했다. 특정한 주제나 시사 이슈를 담은 책보다 사람에 대한 책이 좋아졌다. 최근 읽은 세 권의 책도 사람에 대한 것들이었다. <한국의 고집쟁이들>(나무생각), <한국의 글쟁이들>(한겨레출판), <일분 후의 삶>(랜덤하우스).

사람에 대한 책이라는 것 외에 공통점이 몇 가지 더 있다. 첫째, 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다루지 않고 여러 사람들에 대한 짧은 글들을 모았다. '고집쟁이들'은 23명, '글쟁이들'은 18명, '일분 후'는 12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둘째, 소재는 여럿이지만 주제는 하나다. '고집쟁이들'은 고집이 센 사람들 얘기가 아니라 평생 한 분야에 미쳐서 도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 얘기다. '글쟁이들'은 제목 그대로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글쟁이들 얘기다. '일분 후'는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 얘기다. 셋째, 기자가 썼다. '고집쟁이들'은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 '글쟁이들'은 한겨레신문 구본준 기자, '일분 후'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 권기태 씨가 썼다.

세 가지 공통점은 나름대로 연관성을 갖는다. 짧은 글 모음인 것은 기자로 일하면서 취재한 것들을 한둘 모았기 때문이고, 다양한 소재, 단일한 주제는 기자로서 받은 훈련 덕분이다.

덕분에 중압감을 별로 느끼지 않고 책들을 읽었고, 두 번씩 읽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정보도 많이 얻었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로서 작지 않은 자극을 받은 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

차이점을 살펴보자. 먼저 책값이다. '고집쟁이들'이 12,000원, '글쟁이들'이 11,000원, '일분 후'가 9,800원이다. 속을 들여다보자. '고집쟁이들'은 262쪽, 컬러 사진이 많다. 글자도 가장 크다. '글쟁이들'은 247쪽, 인물 흑백 사진이 좀 있다. '일분 후'는 275쪽, 사진은 하나도 없다. 앞에서 뒤로 갈수록 등장인물 숫자는 줄어든다. '고집쟁이들'이 262쪽에 23명인데, 여러 장의 사진들을 빼면 한 사람당 10쪽이 채 안 된다. '글쟁이들'은 한 사람당 13쪽, '일분 후'는 한 사람당 23쪽 정도를 할당받았다.

자, 이제는 차이점을 염두에 두면서 점수를 매기려고 한다. 기준은 딱 하나. '글맛'이다. '글맛'이라는 기준만 가지고 등수를 매긴다면, '고집쟁이들'이 3등, '글쟁이들'이 2등, '일분 후'가 1등이다. 인상 쓰지 마라. 어디까지나 내 취향대로 정한 거니까.

순위는 책값, 등장인물 수, 사진의 분량과 반비례한다. 내가 골라낸 오자(誤字)들과도 반비례한다. 반대로 등장인물 한 사람당 할당된 쪽수와는 정비례한다. 또 하나 정비례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무척 중요하다.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 모른다. 취재 농도다.

3등과 2등은 신문에 연재한 것을 모았다. 책으로 묶는 과정에서 새로운 내용을 넣었거나 낡은 내용을 뺐을 것 같기는 한데, 추가로 취재했다는 인상을 받기는 어려웠다. 등장인물을 보통 두 번 정도 만난 것 같고, 많으면 세 번 정도일 것이다. 책 내용에도 그렇게 짐작할 만한 언급들이 있다.

그에 비해 1등은 확연히 달랐다. 기자 때 썼던 내용을 보강한 것이 아니라 취재부터 보강했다. "오랫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십 차례 만남을 가졌다"고 했다. ('만남을 가졌다'는 표현이 목에 걸린 가시 같다. 그냥 '만났다'고 하면 안 되나) "묻고 또 묻는 내 질문에 그들은 서서히 지쳐가면서도, 기억의 한계까지 거슬러 올라가 기꺼이 대답해주었다"고 했다. 거짓이 아님은 책을 읽어보면 안다.

물론 그가 기자 생활을 접고 전업 작가로 나섰기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단순 비교는 2등과 3등에게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것저것 다 빼고 오직 '글맛'만 갖고 평가하는 것이다.

나는 글의 내용 못지않게 글의 맛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Facts tell, stories sell"이라는 말이 있다. tell은 일방적일 수 있지만, 그게 sell이 되려면 쌍방적이어야 한다. 팩트가 스토리로 승화되어야 독자와 제대로 소통할 수 있다. 기자들의 글은 팩트를 많이 담고 있지만 스토리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팩트를 음식 재료라고 치자. 재료만 좋다고 해서 맛난 음식(스토리)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팩트를 요리해서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손맛이 있어야 한다. 뭐든 그렇지만, 스토리를 만드는 능력도 선천적인 면과 후천적인 면이 있다. 타고난 필력이 선천적이라면 엄청난 취재 노력은 후천적이다.

권기태 씨의 '일분 후'는 짜릿짜릿하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적처럼 살아난 등장인물들의 사연 하나 하나도 드라마틱하지만, 그걸 기가 막히게 풀어내는 작가의 손맛이 없었다면 짜릿함은 절반으로 쪼그라들었을 것이 뻔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막힌 이야기들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밤을 꼴딱 새우게 만드는 능력은 그의 필력과 취재력이 잘 엮였기 때문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부러움을, 후자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 책에서 즐길 만한 글맛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생생한 묘사는 현장감을 높인다. 죽음의 순간을 넘나든 사람들 곁에서 저자도 그 순간을 같이 경험한 것처럼 썼다. 에베레스트 같은 설산(雪山)을 뒷동산처럼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한 것 같고, 틈만 나면 커다란 배를 타고 낚시를 다니는 사람처럼 산에 대해서, 눈사태에 대해서, 바닷물의 격랑에 대해서, 눈에 보이는 것처럼 묘사했다. 등장인물의 머릿속에도 숨어들어간 것처럼 감정의 흐름도 자세히 썼다. 하나하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오죽하면 한 등장인물이 "정말 다른 생존자들은 그런 것까지 기억하던가요?" 하고 되물었을까.

둘째, 섬세한 표현들은 단어를 낭비하지 않는다. 간결한 문장들 속에 깊은 내용들이 알차게 박혀 있다. "아무리 눈앞이 캄캄한 일이 생겨도 희망에 씨알 같은 현실성 하나만 있으면 사람은 기어코 버텨낸다. 사람은 힘이 없을 때 죽는 게 아니다. 가망이 없어서 죽는다", "백 번을 해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 불과 한 번 만에 일어날 수도 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그 한 번을 붙잡는다", "집착하면 일이 어려워지고, 마음을 비우면 시야가 넓어진다" …….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에 긋던 밑줄들이 늘다 보니, 밑줄이 별 효능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다. 2006년에 <파라다이스 가든>이라는 장편 소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럴 만하다.

극단적인 상황에 빠졌어도 삶의 희망을 놓아버리지 않고 단단히 움켜쥐었기 때문에 생존자들이 아름다운 생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메시지는, 저자의 생생한 묘사와 섬세한 표현들 덕분에 몇 배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글 내용 못지않게 글맛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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