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에게 일자리보다 운명을 찾게 하라

평화를 위한 투쟁은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적 운명

2010-05-17     송강호

청년들이 불쌍하다. 취업의 문은 좁아졌고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결혼의 시기도 자꾸 늦어만 간다. 성경 공부 때마다 우리가 우선해야 할 것이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찾는 삶이라고 다짐을 하지만 각박한 삶 때문인지 하나님나라는 결국 뒷전으로 몰린다. 예배 처소는 지나치게 감각적인 쇼 무대로 변질되어 가고 성경 공부는 추상적이고 기도 모임은 진부하다.

나는 이런 침울한 상황 속에서도 젊은이들을 수천 명씩 불러 모으는 능력 있는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부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 드리면 그렇게 사람 몰이를 하는 지도자들의 진정성이 의심스럽고 그런 지도자들을 향해서만 몰려드는 기독 청년들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현실이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안타깝게도 많은 청년들이 자신의 삶에 정직하게 대면하지도 않고 있고 자신의 신앙에 투철하지도 않다. 그나마 열심 있는 청년들은 대부분 인기 있는 선동가들이 제시하는 허상을 따라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런 대형 교회(Mega church)들과 가공된 환상으로 청년을 미혹하는 몽상가들이 판치는 시대 속에서 청년들이나 그들을 인도하는 사역자들이 나가야 할 바른 미래는 어디인가?

이미 여러 사회 속에서 공룡 같은 대형 교회(Mega church)는 사양길로 들어서고 있고 생쥐같이 민첩한 떠오르는 교회(emerging church)들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나는 교회가 무작정 전통을 답습하는 것도, 그렇다고 서구로부터 끊임없이 수입되는 새로운 조류에 무조건 편승하는 것도 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오랜 전통이나 새로운 조류보다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들어맞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현실 적합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신앙이 청년 사역과 선교 현장을 왜곡하고 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처럼 나도 우리를 둘러싼 우리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인 전쟁에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그 적을 기독교 밖에서 찾는 적지 않은 복음주의자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의 적은 무신론도 아니고 진화론도 아니다. 그렇다고 공산주의나 이슬람도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적은 바로 악에 타협하고 불의에 비굴하게 무릎을 꿇는 우리 자신 안의 죄악성이며 자신의 안일과 쾌락을 위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나라를 위한 맹세를 배반하려 드는 우리 자신의 간악한 마음이다.

오늘날 교회는 우리의 깊은 죄악의 심연을 묻어 둔 채 지극히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신앙으로 종교적인 외양만을 변모시키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갖게 한다. 과연 오늘날 우리 기독 청년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청년 사역자들은 이 젊은이들에게 삶의 현장 속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사실들을 직면하고 이해하며 이에 구체적으로 응답하는 신앙의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폭력은 영성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강력한 영적 세력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돈과 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또 어떤 종교도 돈과 맘몬이라는 우상보다 더 강력한 종교적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없어 보인다. 비록 돈을 하나님과 함께 섬길 수는 없지만 그러나 돈은 때로는 필요하기도 하다. 또 돈으로 남을 도울 수도 있다.

그러나 돈과 맘몬보다 더 위험한 영적 우상이 있다. 이것은 바로 폭력이다. "폭력은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이며 현대 세계의 영성이다. 폭력은 종교의 위치까지 차지하여 그 추종자들에게는 죽기까지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게 되었다"는 월터 윙크의 통찰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나는 폭력과 더불어 싸우는 적극적인 비폭력과 평화는 타락한 우리 시대의 정신과 싸우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생명력 있는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평화는 갈등과 분쟁, 폭력과 전쟁의 위협과 같은 우리 시대의 도전 앞에 구체적으로 응답하는 신앙 고백적인 삶의 실천이다

새로운 신앙의 세 가지 패러다임

지금은 개척자들이란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이상한 단체를 만들어 이끌고 있지만, 나도 한때는 800명 정도의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50명 정도의 청년들을 지도했던 전도사였다. 지금 나는 약 40명 정도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고 딸린 식구들을 제외한 일꾼들은 약 2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은 한국과 인도네시아, 대만, 미국 등 그 구성원들이 사뭇 복잡하고 국제적이다. 내가 이런 삶을 선택한 이유는 전쟁과 재난으로 점철된 우리 시대의 도전에 구체적으로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으나 교회를 비롯한 기존의 사회적인 틀 속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개척자들이 작지만 우리 한국 기독교계의 하나의 떠오르는 공동체(emerging community)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삶의 선택을 통해 찾은 새로운 신앙의 패러다임은 첫째로 평화다. 우리들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고향을 떠나 난민촌으로 유리방황하는 슬픔과 고난에 처한 사람들의 현실로부터 우리의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적어도 이런 현실 속에서 구원은 바로 하나님의 평화 곧 샬롬이다. 전쟁과 핵과 같은 대량 살상 무기의 위협 앞에 놓인 우리 시대에는 구원의 문제가 더 이상 개인적-영적인 차원에 국한될 수가 없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나, 그리고 생존의 위기에 직면한 나와 너를 포함하는 공동체적이고 역사적인 구원이어야 현실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담는 것이다.

둘째는 공동체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 위험한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은 전쟁이나 재난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 속에서 누군가가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경우를 대비하여 불의의 사고가 날 경우 남은 가족들을 돌보기 위한 공동체의 필요에 공감하게 되었고 그것이 현재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공동체는 현실적인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고 또 그것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살아갔던 초대 교회의 모습이었다. 확실히 사도행전에 기록된 제자들의 삶을 본받아 무소유의 공동체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자유롭게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삶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셋째로는 폭력의 시대에 평화의 실천으로 응답하는 삶은 그 자체로 선교적이라는 사실이다. 적극적인 비폭력과 산상수훈에 나타난 원수 사랑의 실천을 위한 실험과 시도들은 그리스도가 평화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선교는 전통적으로 영혼의 구원에 한정된 활동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 시대에는 원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를 길이 없다. 왜냐하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핵무기 시대에 인류의 생존과 개인적인 변혁, 모두를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가 가르친 원수 사랑과 평화 만들기야말로 우리의 신앙이 진정한 기독교인지 아니면 위사(pseudo) 기독교인지를 분별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우리가 사는 분쟁으로 가득 찬 역사적 콘텍스트 속에서 평화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증거하는 표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평화는 선교의 새로운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핵과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과 약소국이나 소규모 테러 집단까지도 이런 미증유의 파괴력을 지닌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대되고 있는 시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의 복음만이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인류 공동체를 총체적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영적 부흥

중세적인 전통을 답습하는 현재의 교회와 새로운 트렌드에 춤추는 청년들의 집회에 식상한 소수의 청년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전쟁과 폭력에 대항하고 그 내면에 내재된 악의 영을 대적하는 역사적이고 영적인 싸움에 참여하기 위해 개척자들을 찾고 있다.

이 영적 싸움은 일시적이고 국부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와 청년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대한 싸움이다. 광범위하게 오랜 세월을 지속해야 할 진정한 영적 전쟁은 국가와 국가가 서로 대적하여 살상과 파괴를 자행하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나라와 민족들을 다 얽어맨 군사주의 문화와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정의로운 폭력의 신화에 내재된 악한 영에 대한 싸움이다.

이 영적 전쟁을 위해 기독 청년들이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로 징집되기를 원한다. 나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스스로 징집을 자원한 젊은이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영적 부흥을 위한 전사들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분쟁과 폭력의 시대 속에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주입되고 암기된 교리적인 신앙 고백이 아니라 이렇게 악한 영에 대한 저항을 통해 단련되고 스스로 체득한 고백적인 신앙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의 영적인 부흥과 진정한 구원에 대한 윙크의 지적은 깊이 숙고할 가치가 있다.

"내가 믿기로는 다가오고 있는 영적 부흥기(spiritual renaissance)에 심장을 활기 띠게 할 것은, 종교 개혁 당시나 혹은 웨슬리 부흥 운동 때처럼 바울의 메시지가 아니라 인간 예수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서도 비폭력과 원수 사랑에 대한 말씀이 그 중심을 차지할 것이다. … 오늘날 궁극적으로 중요한 종교적 질문은, 종교 개혁 때의 질문이었던 '내가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원수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How can I find God in our enemies?)이다. 우리를 몰아 하나님께로 향하게 했던 몰이 막대기가, 루터에게는 죄책감이 문제였듯이 우리에겐 원수들이 문제다. 때로는 순전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였던 것, 즉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justification by faith through grace)이 이제 우리 시대에 와서는 전 세계를 끌어안아야 할 만큼 성장하였다."

비전과 운명

비전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로 말씀을 맺겠다.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숱한 망상들과 공교롭게 꾸며낸 허상들에 가려져 그 존재조차 잘 보이지 않는 진정한 비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뿌리 깊은 평화의 비전이다. 이사야와 미가와 같은 예언자들은 더 이상 전쟁도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은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미래가 올 것이라는 묵시적인 비전을 보여 주었다. (사 2:4, 미 4:3)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이요 평화 그 자체라는 사도들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예언자들이 꿈꾸던 샬롬의 실현임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다. (롬 14:17) 정의와 평화를 향한 비전은 사사로운 개인적인 꿈도 아니고 세계 최고를 꿈꾸는 개교회의 비전도 아니다. 참다운 비전은 갈등과 분쟁, 재난과 배고픔으로 고난당하는 인류 공동체의 역사적인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평화의 비전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믿음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의 자각이다.

우리의 신앙은 다시 사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 말씀과 성령의 공인이 있어야 한다. 어떤 신학자나 목사나 선교사에 의해 구전된 교리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 시대가 처한 폭력과 전쟁의 역사의 질곡 속에서 정직하고 용감하게 응답하려고 한다면 평화는 피할 수 없는 신앙의 과제가 된다. 자신의 삶을 가로막는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한다.

평화를 위한 투쟁은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적 운명이다. 진정한 신앙 고백은 자신이 발견한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이 땅의 기독 청년 사역자들과 더불어 이 흔들릴 수 없는 운명적인 신앙으로 우리 젊은이들을 인도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갈 것이다.

송강호 / 개척자들 부설 코메니우스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