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번 도전 끝에 운전면허 손에 쥐기까지

이혼사유라고? 남편이 면허시험장 돌며 기도해줘

2010-08-27     서재진

혈혈단신 유학 시절, 내 형편에 차는 사치품이었다. 하지만 시민권자 1.5세 이민자와 결혼해 유학생이 아닌, 이민자 아줌마가 되었으니 운전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말았다. 시댁 식구 모두가 배웠다는 K 운전학교에 등록을 했다. 운전 연습을 하던 첫날, 운전학교 교장 선생님께서는 눈이 똥그랗게 커지면서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아니, 재진 씨 운동 하셨어요? 운전 처음 하시는 거 맞나요?"
 
교장 선생님의 칭찬에 어깨에 으쓱해졌으나,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운전은 정말 처음이고요, 제가 키는 작지만 1마일씩 매일 10년 넘게 수영을 했습니다만, 교장 선생님 그걸 어떻게 아셨지요?"
 
"운전 참, 잘 하십니다. 운동 신경이 보통이 아닌데요. 우리 한두 번만 더 연습하고 바로 운전면허 시험 보러 갑시다."

필기시험은 만점을 맞았다. 바로 시어머님께 전화를 드려, 간드러진 목소리로 “어머니임~! 저 필기시험 만점 맞았지 뭐예요!!! 호호호~ 실기 시험도 합격해서 얼른 어머님의 든든한 발이 되어 드리겠사와요”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첫 번째 실기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실기 시험도 합격해서 얼른 어머님의 든든한 발이 되어 드리겠사와요”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첫 번째 실기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총 19점이 감점됐다. 떨어진 이유가 분명하니, 한발 짝 뒤로 물러서는 수밖에. 핸들을 잡으면서 깜빡이를 넣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핸들이 풀어지면서 자동으로 꺼지는 깜빡이를 굳이 수동으로 계속 껐던 것이 문제였다.

Critical maneuver(치명적으로 중대한 실수)라는 명목으로 두 번째 시험도 탈락했다. 차선을 변경할 때 처음에는 오버액션을 하면서 뒤로 90도 이상 고개를 꺾어주는 유연함을 보였으나, 두 번째 차선 변경을 할 때는 70도 정도만 고개를 돌렸다는 것이다.
 
운전학교 교장 선생님은 내가 또 떨어졌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며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또 운전 연습 시간을 잡았다. 한 시간당 40불씩, 한번 할 때마다 80불. 시험 당일은 시험 볼 때 픽업해서, 시험장에 데려다 주는 시간까지 포함해 족히 120불이 든다.

시험 전 주행 코스를 1시간 정도 외우다시피 여러 번 반복해서 도는 와중에, 내 옆자리에 앉은 운전학교 교장 선생님과 실제 주행 시험을 채점하고 있는 DMV 시험관과 눈이 마주쳤다. 조막만한 내 머리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뭔가 교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 번째 시험 보는 날 아침에도 교장 선생님은 내 운전에 대해 극찬하셨다. "아니, 서재진씨, 이렇게 운전을 잘 하시는데, 세계 어딘들 못 가시겠어요?"
 
"교장 선생님, 세계까지는 꿈도 안 꾸고요, 그냥, 주행 코스만 완주했으면 좋겠네요. 저, 앞으로 가는데만, 벌써 840불 썼거든요. 1000불 고지도 바로 눈앞에 있고요, 1000불, 벌긴 힘들어도 쓰는 거 아주 우습네요."
 
세 번째 시험 날이 다가왔다. 이 날은 바짝 긴장을 했다. 운전면허 시험 두 번 떨어지는 것은 애교로 받아 넘길 수 있지만, 세 번 이상 떨어지는 것은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장소는 똑같이 합격률 저조하기로 악명 높은 LA 다운타운이었다. 내가 인적이 드문 오지로 가서 운전면허 시험보자고 몇 번이나 제안했건만 이렇게 운전을 잘하는데, 왜 굳이 멀리가서 시험 볼 필요가 있냐며 다운타운에서만 세 번을 보게 하셨다. 이것도 수강료를 더 받기 위한 궁여지책은 아니었는지 의구심이 하늘을 찔렀다.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날, 나는 바짝 긴장하며 운전 학교 교장 선생님과 함께 시험장에 들어갔다. 내 앞에 다른 차량이 떠나려고 대기를 하고 있는 동안 시험관이 다가왔다. 깜박이와 브레이크등을 체크하고 내게 말했다.
 
"Go around that car. (앞의 차 옆으로 비껴가시오)"
 

면목이 없었다. 이 한적한 시골까지 와서 또 떨어질 줄이야! 여덟 번째다. 하도 많이 떨어져서 여덟 번째는 왜 떨어졌는지 기억도 가물가물 하다. 사 차선이 있는 로컬구간에서 좌회전을 하려고 하는데, 멀리서 차 한대가 유유자적하게 달려왔다. 느리게 오는 차가 이곳에 도달하는 시간과 내가 좌회전을 하는 시간을 계산해 보니, 승산이 있겠다 싶어 좌회전을 했건만 떨어졌다. 내가 좌회전을 무리하게 해서, 멀리서 거북이걸음으로 달려오던 차가 속도를 살짝 줄여야만 했다고 시험관이 내게 말했다.
 
아홉 번째 시험 날이다. 일곱 번째 시험 봤을 때 만났던 같은 시험관이다. 내가 주차장을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대형버스가 우회전을 하려고 하기에, 내가 양보했다. 얍삽하게 뒤따르던 차가 덩달아 우회전을 감행했다. 시험관은 내게 차를 돌려 주차하라고 했다. 엄한 목소리로 내리 깔며 왜 두 차에게 양보했냐고 나를 심문했다. 먹힐지 안 먹힐지 확신은 없었지만,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간드러진 목소리로 답했다.

 

“Being Polite (바쁘신 분은 먼저 가시라고, 예의를 지켰지요!)”
 
“Being polite doesn’t mean being safe. (예의 바른 것과 안전 운전은 별개의 문제다)”라며 날 떨어뜨렸다. 직진하는 차량에게 우선순위가 주어지므로, 내가 먼저 갔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부연 설명해 주었다.

주차장에서 끝난 경우 중서부에서도 한 번 더 추가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시험관에게 다짜고짜 따지며, Iowa City 말고 다른 DMV 주소를 달라고 하며, 오늘 당장 다른 곳에서 시험을 치겠노라고 으름장을 놨다. 불안해하는 남편을 옆자리에 태우고, 1시간 넘게 운전해서 옆 도시 워터루로 갔건만, 하루에 장소를 바꿔가며 두 번 실기 시험을 칠 수 없다고 해서 허탕만 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이 길로 달려가서, 오늘 시험을 칠 수 있다고 내게 말한 시험관 멱살을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행여나, 열 번째 시험에서 또 만날까 봐 꾹 참았다. 시험 합격하면 그땐 DMV가 떠나가도록 따지리라 결심하면서.
 
열 번째 시험 날이다. 늙은 노신사 시험관이시다. 이러다가 아이오와 작은 면허 시험장에 몇 분 안 되는 모든 시험관들과 안면을 트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아무튼, 이번에도 또 떨어졌다. 평행 주차하러 들어가고 나올 때 깜박이를 켜지 않았단다. 그것 외에는 다 괜찮다고 하셨다. 승리의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열 번째 떨어졌을 땐 남편에게 면목이 없었다. 누구는 이혼사유가 되는 만행을 내가 저지르고 있다고 조언했다. 착한 남편은 "이제 겨우 two digit(두 자리)이야. 괜찮아, 여보!" 하며 날 위로했다.

열한 번째 시험 날이다. 주변에 계신 분들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은 참 공평혀, 남들 못하는 박사공부는 하면서, 남들 다하는 운전은 못하잖여~"
 
이젠 자동적으로 운전 시험을 본다. 물론 떨어졌다. 사 차선 도로에서 좌회전을 하는데, 초록색 불로 바뀌면 직진하는 차량을 먼저 보내고 나서 내가 좌회전을 해야 한다. 육안으로 보기에 직진 차량이 없기에, 좌회전을 시도했건만, 어느 뜸에 숨어있던 직진 차량이 나와서 내가 움찔 당황했다. 이 부분에서 감점이 되었고, 또 지난번엔 오버액션을 하며 좌우를 살피지 않아 떨어졌건만, 이번엔 내가 너무 좌우로 고개를 심하게 돌리는 모습이 불안해 보인다고, 직진할 때는 앞만 보라고 하신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런지 원.
 
열두 번째 시험 날, 여느 때와 같이 습관적으로 DMV를 찾았다. 거듭되는 실패로 낙망하는 나를 위해, 남편은 작은 이벤트까지 준비했다. 토요일 오전 멋들어지게 운전면허 시험을 합격하고 팬케익 잘하는 집에서 근사한 아침을 사주겠노라고 자포자기한 나를 꼬드겼다.

 

열두 번째 시험도 또 떨어졌다. 매번 떨어질 때마다 이유가 다르니, 이제는 왜 떨어졌는지 이유도 궁금해졌다. 아무런 표지판이 없는 고속도로 구간에서 좌회전을 하려고 할 때 내가 시험관을 지시를 잘못 알아듣고 머뭇거렸다가 좌회전 하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리고 차도가 시작되는 구간은 정지 표지판이 없다 하더라도, 무조건 정지해야 한다는 조언과 더불어 좌회전을 할 때 어느 편에 정지 표지판이 있는 지 확인한 뒤 우선순위대로 회전을 해야 한다고 했다. 습관적으로 또 떨어지고 난 뒤 남편은 내게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여보, 열 두 개들이 한 다스 다 채우셨네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합격하면 가기로 했던 팬케익 집을 지금 당장 가자고 했다. 이미 합격한 줄로 알고, 미리 합격을 축하하자는 것이 아닌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멋진 말을 하는 믿음의 아들, 내 남편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필승을 다짐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젠 운전면허 시험 보러 갈 때마다 한 가지씩 배워오니, 오늘은 또 뭘 배울까 기대가 되기까지 한다. 열세 번째 시험, 드디어 합격했다! 일곱 번째, 아홉 번째, 후덕해 보이지만, 계속해서 나를 떨어뜨렸던 시험관이 또 걸렸다.

“Now, You passed. (이제야, 드디어 합격하셨습니다.)” 
 
“What? What did you say? (뭐라고요?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묻고 또 물어도 틀림없는 합격이었다. 합격하고 나니, 이젠 남편이 보이질 않았다. 이번에도 또  떨어진 줄 알고, 조용한 카페에서 책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남편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성경에 나오는 데로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일곱 바퀴 돌며 기도한 것처럼, DMV를 돌며 기도하고 있었다. 본인이 지원한 직장이 안 돼도 좋으니, 제발 아내만은 운전면허 시험에 꼭 합격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면서.

본인의 직장과 내 운전면허 시험을 맞바꿔가며 기도했다니,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아이오와 시골 DMV에서는 운전면허 시험을 합격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서 따끈따끈한 운전면허증을 발급해준다. 방금 나온 따끈한 운전면허증에 강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12번의 실패를 거처, 13번 만에 2010년 3월 드디어, 운전 면허 시험에 합격하던 날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여보, 이제는 여보 맘대로 운전하고 다니세요. 12번 떨어지고, 명품 운전 되었으니, 세계 어딘들 못 가겠어요?"
 
버지니아는 LA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대도시다. 아니, 운전만큼은 LA보다 더 까다로운 것 같다. 바둑판처럼 잘 짜여있는 서부 도로와는 다르게, 오래된 길과, 새로 난 길이 맞물려 복잡하고, 직진을 하던 선이 갑자기 좌회전 선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운전자들은 어떤가. 대도시 생활 3년을 뒤로한 채, 아이오와 시골 생활 1년 동안 느슨해진 나를 날벼락 같은 경적소리 깨우기가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에 미국으로 첫 발을 내디딘 지 꼬박 11년 만에, 운전 세계에 입문한 지 3년 만에, 오너드라이버가 된 나는 12번의 실패로 갈고 닦은 명품 운전 실력을 뽐내며 교통지옥으로 악명 높은 워싱턴디시 구석구석을 유유자적하게 누비며 돌아다닐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