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의 분노, 민중신학이란 그릇에?

곽퓨이란 교수, 'Occupy' 시위에서 민중신학의 미래를 엿보다

2011-10-31     곽퓨이란

어제 나는 보스턴 시내의 사우스역 듀위 광장에 있는 '보스턴 점령(Occupy Boston)' 시위를 방문했다. '보스턴 점령' 시위는 뉴욕의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의 영감을 받아 9월 30일에 시작됐다.

'보스턴 점령' 시위 장소는 4-50개의 텐트로 이뤄진 텐트 도시다. 이 텐트 도시는 안내실, 부엌, 간이 화장실, 무대로 쓰이는 높은 지대로 이뤄졌다. 듀위광장은 만원이다. 두번째 시위 캠프로 넓히려는 노력은 경찰의 강한 저항에 맞닥뜨렸다. 10월 11일에는 약 150명이 체포됐다.

   
 
  ▲ '보스턴을 점령하라!' 포스터. ⓒ Jesse Haley  
 
내 학생들 중 한 명은 시위 초부터 듀위광장에서 야영을 하고 있다. 이 학생은 10년 이상 동안 자본주의를 함락시키 위한 운동에 참여하길 바라온 무정부주의자였다. 그는 자기와 같이 기업의 탐욕과 신자유주의 경제에 도전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게 가장 신명나는 점은 점차 발전하고 있는 리더 없는 수평 조직이다. 논의와 의사 결정을 위해 모인 총회에서 "좋음," "싫음," "예", "아니오" 등을 표현하기 위해 손짓이 사용된다. 이것은 무정부주의자의 전술에서 모방한 것이다.

처음 언론은 혜택받은 학생들의 운동이라고 묘사하면서 이 점령 운동(Occupy Movement)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보스턴 점령 시위의 사람들은 노숙자들, 노인들, 노동조합 회원들로 훨씬 더 다양하다. 성직자들도 모습을 드러냈고 교인들도 시위 장소를 방문했다. 이 시위는 공동체의 많은 부문들의 통합이다. <타임>지는 이 시위가 "침묵을 지키는 다수의 귀환"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점령 운동은 "우리는 99%다"라고 선언한다. 미국에서 상위 1%는 전체 수익의 20%를 차지한다.

세계의 950개가 넘는 도시의 사람들이 2011년 10월 15일 국제 연대의 날(International Day of Solidarity) 점령 운동과 함께 시위를 계획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홍콩에서는 약 500명의 시위자들이 홍콩 증권거래소 주위에 모였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젊었고 "우리는 99%다"라는 슬로건 또한 사용했다.

다중(Multitude)과 민중

   
 
  ▲ <다중> /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지음 / 조정환•정남영•서창현 옮김 / 세종서적 펴냄 / 510면 / 2만 5,000원).ⓒ 세종서적  
 
몇 년 전, 나는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저서 <다중(Multitude)>을 읽었다. 하트와 네그리는 '계급'이란 용어 대신, 제국에 대항해 일어설 여러 다양한 종류로 이뤄진(heterogeneous) 사람들의 집단을 나타내기 위해 '다중'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다중은 인터넷, 소셜 미디어, 모바일 기기와 연결돼 있다. 제국은 초국가적(transnational)이기 때문에 다중 역시 전지구적 힘이어야 하고 새로운 형태의 정치를 보여줘야 한다.

난 그 당시 다중이란 아이디어가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이 다중을 조직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러나 우리는 지난 10년간 이라크 전쟁에 대항하는 전 세계적 시위와 현재 점령 운동 등을 통해 여러 차례 다중의 힘을 목격했다.

과연 다중이 구조적 변화에 영향을 끼칠만한 지속적인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점령 운동에서 이런 것을 찾는 것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확신하는 한 가지는 부엌, 교실, 거실에서 대화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우리 학교는 사회 운동의 베테랑인 총장과 다른 한 교수가 진행하는 토론회를 가지기도 했다.

성경에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무리를 지칭하는 용어가 있다. 그들은 '오클로스'(마태복음 4:25; 8:1)라고 불린다. 1970년 대한민국에서 민중신학자들은 사회에 의해 억압받은 대중을 묘사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민중은 대중을 의미하는 두 개의 한자 民衆(저자는 원문에서 衆 대신 간체자 众를 사용, 기자 주)에서 유래한다. 하트와 네그리처럼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노동자 계급이나 하층 계급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억압받는 여성은 민중이다. 식민자에게 지배당하는 피식민자는 민중이다.

민중신학자들은 교회가 너무 오랫동안 '라오스(대략 '하나님의 백성'으로 해석될 수 있고 평신도를 의미하는 영어 laity의 어원이다, 기자 주)'만 주목하고 그 범위에서 '오클로스'는 배제시켜 왔다고 말한다.

민중신학, 좀 더 세계화되고 '참여적 신학운동'으로 발전시켜야

민중신학은 박정희의 독재 정권 시절에 발전됐다. 오늘날 한국은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과 함께 훨씬 더 민주화되었다. 민중신학이 예전처럼 대중적인지 확신할 수 없다. 게다가 민중신학자들이 국가•정치적 투쟁에 초점을 맞추며 사용하던 전략은 제국을 대항하며 싸우는 데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 민중신학은 반드시 밑바닥에서 오는 참여적 신학운동이어야만 한다. (출처: 심원안병무아키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이슈들에 관해 논할 수 있는 좀 더 세계화된 민중신학이 필요하다. 이 민중신학은 반드시 지역적 필요와 이슈에 관해 초국가적(transnational)이고 여러 다양한 것들로 이뤄지며(heterogeneous) 유동적(fluid)이고 즉각적으로 반응(responsive)해야 한다. 이것은 엘리트 혼자에 의해 쓰여진 신학일 수 없으며, 반드시 밑바닥에서 오는 참여적 신학운동이어야만 한다.

나는 왜 예수가 자기를 따르도록 수많은 무리들을 끌어들였는지 궁금하다. 그들은 예수의 약속에서 무엇을 봤을까? 오늘날 교회는 왜 다중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걸까?

글 · 곽퓨이란 교수(성공회신학교, Episcopal Divinity School) / 번역 · 윤영석 기자

* 홍콩계 여성 신학자 곽퓨이란 교수의 블로그인 'On Postcolonialism, Theology, and Everything She Cares About'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번역해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