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먹어라, 먹어라

[칼럼] 박득훈 목사, '성서 경제 이야기'

2014-03-17     박득훈

   
 
 

▲ 박득훈 목사. (미주뉴스앤조이 자료사진)

 
 
무슨 제목이 그러냐고요? 끊임없이 다이어트를 권하는 시대에 말입니다. 그런데 이는 창세기 2장 1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한글성경에는 ‘임의로 먹어라(개역개정)’,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새번역), ‘마음대로 따 먹어라’(공동번역) 등으로 번역되어 있지요. 그런데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그냥 ‘먹어라, 먹어라’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 번째로 주신 명령입니다. 첫 번째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입니다(창 1:28). 이 말씀도 단도직입적으로 이해하자면 부부간에 ‘성관계를 많이 맺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참 야한 분이시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중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된 것은 얼마 전 데이비드 램의 <내겐 여전히 불편한 하나님>(IVP, 2013)을 읽으면서였습니다. 눈에 띄는 소제목이 있었습니다. ‘성관계를 많이 맺고 많이 먹어라.’ 좀 민망하지 않은가요? 그러나 창세기는 노골적으로 인간의 몸, 성性 그리고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아주 긍정적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기독교영성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도 종종 영혼구원이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몸과 성 그리고 먹고 마시는 문제는 구원의 본질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죠. 그러다보니 몸의 생존과 건강을 지켜주는 경제도 덩달아 기독교신앙과 본질적 관계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말았습니다. 다양한 언론과 책들에 등장하는 경제이야기에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세상 사람들이 알아서 고민하고 해결할 문제 정도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들이 얼마나 비성경적인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물질세계를 창조하신 후 그것들을 찬찬히 감상하시곤 일곱 번이나 ‘좋다’고 평가하십니다(창 1:4, 10, 12, 18, 21, 25, 31). 히브리 원어로 ‘토브’인데 ‘즐거운’, ‘선한’, ‘가치 있는’, ‘(윤리적으로) 옳은’ 등의 다양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됩니다(시 100:5).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는 하나님 자신의 좋으심, 선하심 그리고 옳으심을 담아내는 소중한 세계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첫 사람을 흙으로 빚으신 후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기본재료가 흙이었다는 점에 매우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시인이자 노래꾼인 홍순관은 흙의 고귀함을 ‘흙과 숨’이라는 단상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흙처럼 고운 숨은 없습니다./ 얼마나 고우면 저 많은 것을 길러내며 산모産母의 소리도 없을까요./ 흙처럼 너른 숨은 없습니다./온갖 생명이 거기에 뿌리내려 마음 놓고 숨을 쉽니다.// … 흙처럼 착한 숨을 없습니다. 땅에 기대어 사는 어떤 미물微物이라도 마다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은 흙이 숨이 된 것입니다.” (홍순관, <네가 걸으면 하나님도 걸어>)

흙으로 빚어진 몸은 그래서 실로 아름답고 고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을 달리 만드셔서 서로 사랑으로 연합하는 놀라운 기쁨을 선사하셨습니다. 그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맛있는 과일들을 주셔서 마음껏 먹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마음과 몸으로 서로를 즐기면서 함께 맛있게 먹고 마시는 것을 보시면서 흐뭇해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잘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마 5:45) 주십니다. 그들에게 충분한 먹거리가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식량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부여하신 기본권에 해당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면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식량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심각한 문제요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 의하면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갔습니다. 2010~12년 사이엔 8억 7천만 명 즉 세계 인구 8명 중 1 명꼴로 최소기준치에 미달하는 식량으로 겨우 생명을 부지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얼마 전엔 모 재벌 전자서비스 회사의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최종범님은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라는 유서를 카톡 방에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먹어라, 먹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무력화시키는 우리 시대의 슬픈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배고픈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 같을 때가 종종 있지 않은지요? “예수님!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막 6:36).” 말씀을 먹여 주는 것이야 예수님이 하실 일이지만 먹거리 문제는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의 배고픈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해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자기 제자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박득훈목사 / 새맘교회, 교회개혁실천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