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보그 세상을 뜨다

지난 10월 블로그에 죽음 암시 글남겨

2015-01-23     news M
   
▲ 마커스 보그 (Marcus Borg)

예수 세미나 운동을 통해 역사적 예수 연구에 천착했던 마커스 보그 교수(오레곤 주립대학)가 21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2세.  옥스퍼드 대학교로부터 종교와 문화분야의 세계 100대 저명한 교수로 인정받기도 했던 마커스 보그는 노스 타코타주의 루터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콘코디아, 유니온 등에서 공부한 보그는  아내이자 성공회 사제인   마리안네 웰스 보그 ( Marianne Wells-Borg)와 함께 성공회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해 왔다.

Worldwidepilgrimage라는 웹사이트에는 올해 5월 보그 부부와  예수 세미나 운동의 또다른 리더였던 존 도미닉 크로산 부부가 함께 기획한 ‘바울과 제국’이라는 순례 여행 광고가 나와 있다. 이처럼  올해도 변함없는 활동을 예고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죽음의 소식이 신학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그가 참여하기로 했던 순례 여행의 주제처럼 최근 보그는 바울 연구에도 많은 관심을 쏟아왔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천착했던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바울의 신학이 강조하는 케리그마적 그리스도에 회의적이었는데 보그 교수는 1990년대 이후  불기 시작한 바울에 대한 재해석의 흐름을 받아들여 크로산과 함께 2010년 < The First Paul: Reclaiming the Radical Visionary Behind the Church's Conservative Icon>을 출판했다.

우리 말로 번역된 책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기독교의 심장> ,<첫 번째 바울의 복음 -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 신앙의 우상으로 둔갑했는가?>, <새로 만난 하느님>, <예수 새로 보기> 등이 있다.

마커스 보그의 홈페이지에는  마치 죽음을 예견한듯 지난해  10월에 쓴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실려 있다. 아래는 죽음에 대한 그의 글 전문이다.

"우리의 죽음을 기억하라"(Remembering Our Death)

북미에서 공식적으로 또는 비공식적으로 죽음과 장례의식에 있어서 큰 변화가 있어왔습니다. 현대 서양 문화에서는, 죽어가는 것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행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천년 동안 죽음은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 친숙한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엔 기대수명이 매우 낮았습니다. 1900년대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약 45세였습니다. 유아 및 어린이 사망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저희 아버지의 조부모들은 자녀 10 명 중 3 명이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출산 사망률 또한 높았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원이 아닌 집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인이 되기 전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자신의 나이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아이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거나 또는 죽음의 순간을 함께 했습니다.

죽음 후, 시신은 보통 바로 장례식장으로 옮겨지지 않고, 가족들이 직접 깨끗이 씻기고 옷을 입혀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장례식은 보통 가정의 거실에서 치러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장례식을 대행하는 사업을 ‘funeral home' 또는 ’funeral parlor'라고 부릅니다.

장례에 관한 발전과 변화를 유감스럽게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현대 의학은 대부분의 죽음의 장소를 병원으로 옮겼으며,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를 환영합니다. 장의사, 장례식장, 묘지 및 화장터의 서비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가정과 가족으로부터 병원과 기관으로 옮긴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과 좀더 친밀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문화역사학자인 필립 아리스(Philippe Aries)의 ‘죽음의 시간’(The Hour of Our Death)에서 묘사된 근대 이전 유럽에서 보여준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럽은 기독교 국가였으며, 당시의 죽음은 기독교인의 죽음에 대한 방식을 보여줍니다. 당시는 사망이 임박했을 때 가족과 친구들에 집에 모여 애도와 축복을 하며 이별을 하는 것이 중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교회 주재 하에 죄의 고백, 사면, 최후 성찬과 기름 부음 등도 포함되었습니다. 모인 이들은 조금씩 죽음에 이를 수 있도록 침묵하며 기다렸습니다. 죽어가는 사람 뿐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도 모두 그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죽임이 얼마나 자주 있었으며, 각 계층에게 얼마나 이상적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았을까요? 또는 이상적이지만 관습은 아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분명한 건 오늘날 우리가 죽음을 경험하는 방식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어느 사회 계층에 있든 우리보단 죽음을 더욱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몇몇 문화비평가들은 이러한 변화로 인해 미국 및 다른 현대 사회가 ‘죽음을 거부하는 문화’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국은 죽을 것이라는 점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그 사실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이전 세대보다 더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뉴스는 늘 죽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뉴스의 헤드라인엔 죽음과 죽음의 위협이 늘 주요기사로 올라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연 재해, 전쟁, 테러, 비행기 충돌, 에볼라, 인조 잔디의 위험 등. 비디오 게임은 (내가 직접 그들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살인과 죽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평균적으로 미국인 아이는 성인이 될 때까지 비디오를 통해 약 20,000번 정도 죽음을 목격한다고 합니다.

반면 대부분의 우리는 사망을 직접 경험할 기회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무경험이 어떤 심리적, 정신적 영향을 줄지는 불분명합니다.

백여년 전,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소렌 키에르 케고르 (1813-1855)는 “죽음의 결단력: 무덤의 측면에서”라는 긴 에세이에서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와 “그러므로 나도 죽는다-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다”는 논법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후자는 극적인 확신(나도 관으로 들어 갈 날이 올 것이다)과 극단적 불확실(그러나 우리는 그 시기와 장소를 모른다. 오늘까지도.)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법을 알면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질질끌기’(procrastination)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이는 마치 우리에게 무한한 삶의 시간이 주어졌으며, 원하는 미래의 시간까지 삶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속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의 확실성과 불확실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살면 ‘질질끄는’ 삶을 멈추게 되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게 됩니다. 마치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이며, 앞으로 살아갈 날의 처음이 될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강한 자와 약한 자 할 것 없이 모두 죽음 앞에서 평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차별화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며, 서로의 주인이 되려고 삶의 많은 시간을 허비합니다. 죽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들에 우리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우리 자신의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쓸모없이 낭비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 지혜는 세계의 고대 종교 전통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시편 90편의 주제는 우리의 죽음에 대한 것이며,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 지에 대한 지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불교 전통 중 하나는 ‘무덤에 대한 명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12장 1절은 ‘우리의 젊은 날에 우리의 무덤을 기억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많은 문화에서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라는 경구는 마치 부적과 같은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만약 이러한 지혜가 사실이라면, 죽음에 대한 열악한 인식은 우리의 삶이 좀 더 충만하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마치 현대 서구 사회가 우리의 미래의 삶이 무한한 것처럼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 됩니다: 고인(故人)을 기억하는 것은 다만 죽은 이를 기억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 기억하는 것입니까? 죽어가는 것과 죽음에 대한 예식들은 우리가 배워왔던 것보다 훨씬 중요한가요? 죽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스승인가요?

편집부 / <뉴스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