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주면 목회 누군 못 하나

설교는 '은사'다

2017-01-06     신성남

최근 어느 목회자께서 "성경에 있고 없고로 따지면 자비량 목사도 없어요. 목사 자체가 성경에 없으니까요."라고 하셨다. 아울러 "예수님이 돈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고 하시며 시대와 상황에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물론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리 말씀하신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며 균형 있는 노력을 보여주신 점에 깊히 감사를 드린다. 다만 그 논리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기에 다소 안타까움이 있다.

성경의 정신

그동안 대부분의 교회는 "십일조가 성경에 있으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일 예배 참석도 성경을 있는 대로 다 동원해서 열심히 강조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급 전임 목사 제도는 성경에 없지만 해도 된다"고 한다. 대체 이게 무슨 논리일까? 성경에 있어도 하고 없어도 하고, 결국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된다는 거 아닌가.

사실 개신교 일각에 이런 논리가 처음은 아니다. 어떤 교회는 "성경에 세습하지 말라"는 구절이 없으니 세습해도 된다고 한다. 이는 마치 성경에 "주일 헌금 횡령하지 말라"는 직접적인 구절이 없으니 "헌금 횡령해도 좋다"는 궤변적 논리와 유사하다. '성경의 정신'을 지킬 생각은 안 하고 문자적 말장난으로 궁색한 논리를 펼친다.

과연 성경에 있고 없고 따지는 게 불필요한 것일까. 성경의 정신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걸까. 언제부터인가 온라인 공간에서 '성경적'이란 말을 삼가하자는 게 대세인 모양이다. 물론 그 말이 의도하는 바는 나도 어느 정도 공감한다. 성경을 함부로 적용하거나 남발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도 상식으로 해도 될 문제까지 성경적 운운하는 건 반대한다.

그럼에도 간단한 판단이 어려운 사안에 대해서는 결국 그게 성경적인지 검토해야 옳다고 본다. 성경이 유일한 기준이니 하는 말이다. 우리가 불경적이나 코란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성경에 있는 것조차 제대로 안 하면서, 도리어 성경에 없는 걸 더 열심히 하고 있다면 그걸 정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다시 강조하는데 '유급 전임 목회'의 근거가 성경 어디에 있는지 난 잘 모른다. 그러나 '자비량 목회'는 분명히 성경에 있다. 바로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쓴 사도바울의 사역이다.

그런데 중대형 교회들에서 사도의 정신으로 자비량 목회를 하는 담임목사를 별로 본 기억이 없다. 절반은 커녕 거의 다 '한결같이' 유급 전임 사역이다. 도대체 요즘 목회자들이 사도바울보다 얼마나 더 바쁘고 중요한 사역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그런 일방적인 현상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교회는 은사 영업장이 아니다

아무튼 자비량 사역과 관련하여 내가 꼭 논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설교다. 설교는 은사다. 예언과 방언과 병고침과 가르치는 것도 은사다. 병원에서 병 고치면 돈 받아도 된다. 그건 영업이다. 학원에서 공부 가르치면 돈 받아도 된다. 그것도 영업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병 고치고 돈 받으면 욕먹는다. 교회에서 예언하고 돈 받아도 욕 먹는다. 교회에서 전도하고 돈 받아도 욕 먹는다.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 가르치고 돈 받아도 욕먹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영업을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설교는 은사지 생업이 아니다.

같은 의사라도 병원에서 치료하면 돈 받아도 되지만 그 의사가 교회에서 치료하고 돈 받으면 욕 먹는다.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하면 돈 받아도 되지만 그 가수가 성가대에서 찬양하고 돈 받으면 욕 먹는다. 교수가 신학대학에서 성경 가르치면 돈 받아도 된다. 하지만 그 교수가 교회에서 성경 가르치고 돈 받으면 욕 먹는다. 왜 그럴까.

설사 같은 은사라도 사회에서는 돈 받아도 되지만 교회에서 돈 받으면 욕 먹는다. 그 이유는 교회가 무슨 은사 영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단순한 접대나 간소한 사례까지 해선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니 달리 오해가 없으시기 바란다.  

일부에서는 목회도 성속 구분 없이 정당한 노동이기에 다른 직종처럼 임금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있다. 좋은 발상이기는 하다. 하지만 만일 그런 논리가 옳다면 그럼 왜 함께 동역하고 노동하는 다른 시무 장로, 재정 집사, 교회학교 교사, 안내자, 주방봉사자, 성가대원, 부서장, 구역장에게는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나. 교회가 무슨 노동 차별하는가.

나는 지금 유급 목회자 개인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적은 연봉으로 수고하고 있는 목회자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현재의 유급 목회 현실도 충분히 이해하며 인정한다. 일꾼이 품삯을 받을 권리도 존중한다. 따라서 기존 목회자들에게 자비량 사역을 하자고 제안하는 게 아니다. 자비량 사역의 주체는 직업과 소명을 지닌 평신도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교회에 30대 이하의 젊은 층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그들에게는 기복 목회와 무속 목회가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배당의 작은 모순도 결코 참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굳이 수입 십분의 일까지 바치며 교회에 충성하지 않는다. 목회자가 특권 의식을 갖거나 고정 관념에 안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바울로 살아내는 목회자

사실 요즘 같이 힘든 세상에 월급 제대로 주면 목회 못 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목회해서 처자식 모두 먹여살리고 자녀를 대학이나 대학원까지 공부시킬 수 있다면 아마 개나 소나 설교를 '표절'해서라도 기어이 목회할 것이다. 게다가 은퇴 후에는 원로 목사가 되어 노후까지 든든히 보장 받고, 추가로 자식이나 사위에게 교회 세습하면 대대로 평생 가업이 된다. 이보다 더 좋은 꿈의 직장이 어디 있나.

현재도 전국에 널린 수많은 신학교들이 목회 지원자들을 반기고 있다. 게다가 이들을 적절히 검증할 정화장치가 고장난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요즘 줄줄이 터지는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파렴치한 목회 비리들이 그 생생한 증거다.   

물론 대다수 목회자는 순수한 소명을 받고 목회한다. 하지만 대부분 교단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있다. 가짜가 진짜를 밀어내고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게 그동안 유급 전임 목회제가 한국교회의 부패로 연결된 은밀한 메커니즘이다. 즉 제도적 악이 되었다는 거다. 반면에 파트타임 사역자는 교권을 흔들 수 없다. 그러므로 특정 직분자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이 '목회 독점'과 '설교 독점'의 낡은 틀을 깨지 못 한다면 교회 회복은 단지 헛된 망상이 될 뿐이다.

원칙적으로 '자비량 공동 목회'는 현재 생업에 종사하는 평신도를 위한 파트타임 사역이다. 설교는 은사이기에 반드시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 소명을 받은 교인들 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자원 봉사로 목회하는 평신도 설교자가 크게 늘어나기를 소원한다. 평신도가 깨어있는 교회는 언제나 희망이 있다.

개혁 교회는 평신도 동역이라는 미명 아래 교인들에게 만날 주방 설거지나 주차안내만 시키지 말고, 이제 새로운 시대에는 '평신도 제사장(벧전2:9)'들에게도 목회와 설교의 기회를 균등하게 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근자에 어느 성도가 "바울을 설교하는 목회자는 많은데 바울로 살아내는 목회자는 드문 듯 하다"고 지적한 것에 마음 아프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12:8-11)."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