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량 사역은 '삯꾼 목사'의 천적

목사가 없으면 안 되는 교회

2017-01-19     신성남

초대교회 약 300년간 교회는 자비량 목회자들에 의해 인도되었다. '폴 스티븐스' 교수에 따르면 2세기 알렉산드리아 교회에는 600명의 성도들이 모였는데, 그 교회 설교자의 직업은 은장색(Silversmith)이었다. 4세기 유명한 설교자 크리소스톰(Chrysostom, AD.347–407)은 "시골 목회자들이 소를 가지고 밭을 가는 일을 한다"고 했다. 또한 가자(Gaza) 지역의 주교 제노(Zeno, AD.400)는 직물 짜는 일을 했다.

초기 교회의 이런 자비량 목회 구조를 점차 유급 전임 제도로 변질시킨 것은 성직주의에 빠진 중세 가톨릭 교회였다. 그리고 16세기 종교 개혁도 결국 그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 했다. 다만 사제의 자리를 목사가 대신했을 뿐이다.

왜 자비량 사역인가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복음으로 말미암아 있는 권리'가 있다고 했다. 바로 유급 목회의 권리다. 그런데 그는 그 권리를 다 쓰지 않은 것이 상이라고 하며, 굳이 고생길인 자비량 목회를 택했다.

그 절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반적으로 유급 전임 사역이 복음 전도에 더 집중할 수 있어 효과가 큰 것이 사실임에도 그는 자비량 사역을 했다. 단지 상을 더 받기 위함이었을까. 그건 아니다.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9:12)."

바울이 자비량 사역을 택한 것은 그게 도덕적으로 더 우월해서도 아니고 목회에 더 충실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도리어 시간의 분산으로 인해 더 피곤하고 효율성도 훨씬 더 떨어진다. 자비량을 택한 진정한 기준은 오직 복음에 장애가 되는 걸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개신교는 극심한 교권주의에 의해 지속적으로 고통받았다. 유급 전임 제도는 언제나 교권 집중과 교회 부패를 동반했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이 있은 곳에 반드시 구더기가 생기는 원리와 같다. 그리고 그런 구조가 일반화하고 고착화할수록 그걸 지능적으로 악용하여 더욱 교회를 이권화하고 사유화하려는 사악한 무리들이 반드시 득세했다. 소위 말하는 삯꾼 목사들이다.

중세적 교권주의에 쩔은 현재 한국 개신교의 모습이 그 명백한 증거다. 설교 한 번 하고 백만 원 이상을 주고 받는 교회, 세습이 나쁜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장로, 툭하면 터져 나오는 성추행 목사, 그리고 먹었다 하면 보통 수억 원이 넘는 횡령 목사들이 그 자화상이다. 사회에서 그런 짓 하면 바로 끝짱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 거룩한 교회에선 모두 아주 안녕하시다. 한국 개신교는 그런 부패를 응징할 자정 능력조차 상실했다는 얘기다.  

한 세대 전부터 나는 언젠가 개신교 목사 제도가 그 사역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매서운 눈총과 공격을 받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많은 직업 목회자들이 맘몬적 성직주의에 빠져 무당 목사 또는 귀족 목사처럼 교회에 발암적 존재가 되는 때로 보았다. 그런데 요즘 교회 비리는 대부분 담임목사다. 이제 거의 때가 찬 것 같다.

사진출처: 교회개혁실천연대

'삯꾼 목사' 동반한 개혁은 시간 낭비

개신교의 극심한 변질은 마피아적 성직주의에 기인한다. 교회 비리의 모든 틈새마다 삯꾼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들은 자신에게 어떤 종교적 특권이 있다고 착각하는 무리로서 교회 회복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방해하고 왜곡했다. 개신교를 망친 주범이다. 결국 중세적 성직주의를 동반한 체 추진하는 개혁은 그냥 시간 낭비이며 심력 낭비일 뿐이다. 그 덕분에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린 이미 충분히 실패했다.

그래서 이제 사도바울에게서 그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복음을 정면에서 가로막고 있는 고질적 불치병인 성직주의와 교권주의를 극복하려면 기존의 유급 전임 제도로는 역부족이다. 사도들의 자비량 정신이 필요하다. 자비량 사역은 교회 부패에 천적이다. 무급으로 자원 봉사할 삯꾼 목회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존 목회자들은 자비량 사역을 설사 하고 싶다 하더라도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장기간의 정규 직업 교육이나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 했기 때문에 다른 전문직을 갖기란 더욱 어렵다. 물론 단순 노동도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이미 탄탄한 직업을 갖고 있는 교인들 중에 소명과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자비량 사역에 나서는 것이다. 필요한 신학 공부는 야간 과정, 온라인 과정, 통신 과정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할 수 있다. 그리고 자비량 사역은 구태여 목사 안수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목사 직분을 받아도 좋고, 받지 않아도 별로 지장 없다. 목회나 설교는 신분이 아니라 은사다.

사실 기능면에서만 보자면 유급 전임 목회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전임 목회가 더 효과적이다. 신실하고 유능한 전임 목사도 많다. 그러니 자비량 목회라고 해서 특별히 더 우쭐할 이유는 없다. 어느 경우든 자신이 받은 소명대로 하면 된다. 따라서 자비량 사역자들이 목회하는 교회는 목사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상관 없다. 목사만 목회하는 시대는 이제 끝내야 한다.

물론 자비량 목회를 한다고 해서 더욱 바른 교회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동안 개신교를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며, 골수를 갉아먹은 삯꾼 목회는 현저하게 벗어날 수 있다. 좋은 교회를 정말 이루고 싶다면 먼저 만성적 부패부터 제거해야 옳은 순서다. 사회의 기본적 상식과 윤리마저 못 따라가는 교회는 절대로 바른 교회가 될 수 없다.

더 좋은 교회

앞으로 한국교회는 "평신도의 동역 없이 새 시대를 열 수 없다"는 사실을 깊히 자각해야 한다. 나는 유급 전임 목회 제도가 그 사역의 효율성과 장점에도 불구하고 '성직주의의 발원지' 역활을 한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평신도의 주도적인 동역만이 앞으로 그 실패의 틀을 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순히 목사와 평신도를 중세적 이분법으로 구분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목사 자신도 평신도 중의 하나라는 깊은 자각이 있어야 하며, 스스로 특권 의식을 버리고 분수를 지켜야 옳다는 거다. 목사 또한 장로나 집사처럼 교회의 한 직분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자비량 공동 사역은 목사를 포함한 모든 교인이 교회 운영의 주체로 등장하는 신호탄이다. 교인이 관리하고, 교인이 설교하고, 교인이 가르치고, 그리고 교인이 섬긴다. 그래서 초기 교회 이후에 상실했던 교인의 주권을 다시 회복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동안 교회에서 제사장 대우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별로 없다. 오직 목사만 제사장 대접을 받았다. 개혁 교회는 말로만 "평신도와 동역한다"고 하며 하인처럼 이용하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평신도를 제사장으로 대우해야 마땅하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은 중세 성직자에 맞서 싸워 평신도에게 '성경'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늘 하나가 부족했다. 목사에게 종속된 교회가 너무 많다. 어떤 교인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헌금으로 고용한 일개 목사를 도리어 상전으로 모신다. 종이 주인의 안방을 차지한 꼴이다. 이제 다가오는 제2의 개혁은 현대 성직주의에 맞서 평신도에게 '교회'도 돌려주어야 옳다.

물론 목사가 성실하게 사역하는 교회는 좋은 교회다. 그러나 목사가 없어도 되는 교회는 더 좋은 교회다. 반면에 목사가 없으면 안 되는 교회는 한심한 교회다. 특히 유급 목사가 마치 굿판의 무당처럼 필수적인 교회는 분명히 잘못된 교회다. 그런데 지금 개신교는 그런 한심한 교회를 잔뜩 만들어 놓고 태평하기 그지 없다.

종교 개혁 500년의 개신교 역사가 계속 실패하고 있는 이유다.   

"초대교회 공의회의 토론거리는 목사가 세상에서 돈을 벌 것인가, 아니면 교회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것이냐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대부분의 목사들이 세상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폴 스티븐스(Paul Stevens), 리전트대학 명예교수.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