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적 목사와 동행했던 지난 24년

하나임교회 조명하 장로, 부단하고 성실하게 진리 앞에 선 인생 연대기

2017-07-24     노용환

[미주뉴스앤조이 = 노용환 기자] 하나약국 약사 조명하 장로를 만나러 약국 상담실에 들어섰다. 약국 영업시간이 종료될 시간인데, 채 인사도 나누기 전에 손님이 왔다. 텅 빈 상담실을 둘러봤다. 한 쪽 구석에 3단 책장이 놓여져 있고, 책장을 따라 좁은 벽에 신문 스크랩을 모아 놓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스크랩 되어 있는 신문들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색이 진하게 변해 있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약사협회 회장 재임 전후의 이야기다. 뉴욕약사협회의 전설적인 일꾼이었던 시절. 이민 사회를 위해 한 직종을 대표하여 땀흘려 일구어왔던 소중한 시간들도 그렇게 뒤로 한 채, 그는 다시 조 약사로, 약국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는가? 
뉴저지 하나임교회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긴 하다. 하지만, 교회 특성이 있어서 장로로 부르진 않는다. 성도로 부른다. 목사도 성도로 통칭한다. 목사님을 24년 전부터 알아왔고, 십 년이 넘도록 '목사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아직도 어색하다.
 
전 교우가 서로 성도라고 부르는 교회가 있다고 들었다. 개혁적인 시도인데?
'프로테스탄트'라는게 그렇지 않나? 개신교는 개혁하는 공동체라 생각했다. 본질을 되찾는다는 거창한 이야기까지 확장할 계제는 아니다. 교회는 인간이 모이는 곳이다. 인간은 어짜피 약하다. 약한 것을 서로 포용해 주고, 사랑해 주는 곳이 교회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교회가 되려면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 시도한 것이 '서리집사제도'를 없애는 것이었다. 목사님이 24년 전, 뉴욕 플러싱에서 '새교회'라는 이름으로 개척하셨는데, 개혁성이 중심에 있었다. 그 때, 서리 집사제를 없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 개혁적인 목회가 쉽지 않았을텐데?
쉽지 않았다. 개혁적이다 보니 이단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개혁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갈증이 있었는지, 당시 교인이 200명 이상 모였다. 그런데, 급격하게 양적 성장이 이루어지다 보니, 다른 교회에서 유입된 경우가 있었다. 그게 갈등의 시작이 된 것 같다. 일례로, 다른 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했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장로 임직해서 모시기는 커녕 서리집사제도 없으니 문제가 생겼다. 개혁에 대해 순수하게 접근한 교회공동체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대립이 된거다. 결국, 소위 '목사파'와 '장로파'로 갈라져서 추후 노회의 중재 하에 80 퍼센트 이상의 교인이 교회 재산을 두고 나왔고, 나머지 10-20 퍼센트의 장로파가 교회 재산을 가지고 잔류하는 걸로 결정됐다.   

힘든 결정이었겠다. 하지만, 그럴 때 더 분위기가 좋지 않나?
그 때 부터 스릴(?) 있었다. 오히려 역동성을 갖게 되었다. 어떤 때는 호텔 로비에서 모이기도 하고, 일반 교회 오후 시간에 하루만 빌려서 예배 드리기도 하고. 토요일 저녁이면 비상 연락망을 동원해 어디서 모일지 소식을 나누곤 했다. 재미있었다. 

계속 그렇게 모일 수는 없지 않았나? 그렇다고 재산도 없고.
두 달 정도 그렇게 모이는 과정을 거치고, 고정된 모임 장소가 필요하다는 중론이 모아졌다. 알아보던 중, 롱아일랜드 로즐린(Rosline)에 있는 유대인 회당을 빌리려고 했다. 그런데, 회당 측에서는 되려 팔고 싶어 했다. 알고 본즉, 원래 개발 업자들이 먼저 오퍼를 넣었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종교 기관에 매매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우리는 목돈이 없는 상태였다. 다행히 그쪽에서 여러가지 배려를 해서 그 회당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렇게 플러싱에서부터 로즐린까지 14년 동안 이학권 성도님(주: 당시 새교회, 현재 하나임교회 목사)과 함께 신앙생활 하게 되었다.

지금은 교회가 뉴저지에 있지 않나? 무슨 일로 옮기게 되었나?    
새로 시작해야겠다 생각하신 것 같다. 로즐린으로 옮기고 나서도 교회 개혁은 계속 되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목회자로서의 이학권 성도 본인도 '본질적인 신앙을 찾는 과정으로써의 개혁'을 처음부터 알았던 게 아니라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를 두고 14년을 목회했지만 처음 매듭이 바르지 않다고 보신 것 같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을 꿈꿨는데, 결국은 새로 시작하는 것이 답이라고 결정하셨다. 옆에서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은 안정이 아닌 교회에 대한 사랑과 의지다. 처음부터 주춧돌을 잘 놓고 싶은 의지. 

개혁의 의미가 분명해 보인다. '본질적인 신앙을 찾는 과정으로써의 개혁'이라고 했는데, 실제 사례를 소개한다면?
제도 개혁등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중심에 제자훈련이 있었다. 제자 훈련은 1과정에서 6과정까지 이어졌는데, 저를 비롯해서 당시 사랑회라는 이 삼십대 젊은 부부들이 열심히 했다. 신앙의 본질을 찾기 위해 인간적인 노력은 다 해본 것 같다.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것에 집중하셨다. 그 훈련을 마치는 단계에서 넘어야 할 산이 있다. 훈련자들을 인근 개척교회에 파송하는 단계다. 저와 김인기 성도님이 일 년간 파송을 나갔던 기억이 있다. 저는 가서 찬양 사역으로 섬겼다.   

뉴저지로 넘어와서, 하나임교회에서는 어떤 사역으로 섬겼나?
우리 교회의 연간 사역인 'C-LightZone', 일명 씨엘존이 있다. 이 사역을 열심히 섬겼다. 우리 교회만의 사역이 아니었다. 다른 교회들, 펜실베이니아나 코네티컷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다. 이 사역을 통해 변화되는 모습에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을 경험했다. 한편, 찬양 사역으로 꽤 오래 섬겼고, 가장 애정어린 사역이다. 그런데, 갑자기 건축 위원장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건축 위원장으로 섬기게 되자 찬양 사역을 '안 시켜 줬'다. 저보다 아내가 열심이다. 아내는 친교 담당으로 제가 봐도 훌륭하게 섬기는 중이다. 

건축 위원장, 우여곡절이 많았을텐데?
우리는 원래 건물에 관심이 없었다. 파라무스에 있는 중학교 강당을 빌려서 했는데, 일 주일에 한 번밖에 사용을 못했다. 새벽기도, 수요, 금요 예배도 우리 집 지하에서 모였다. 그러려고 파라무스에 집을 얻었다. 지인들이 무슨 컬트에 빠졌냐고 걱정하던 기억이 난다.(웃음) 그러던 중, 누군가의 의견으로 건축을 결의했다. 더 이상 집에서 드릴 수 없어서. 그런데 의례 그렇듯이, 물질적으로 여유 있는 분들, 직책이 높은 분들, 자신이 출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분들이 모두 빠져 나갔다. 그 중 건축위원장도 있었다. 다른 건축위원들 중 변호사, 회계사, 설계사 등 건축 사역에 핵심적인 인물들도 많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위원장으로 섬기게 되었다. 

원래 기술 없는 사람이 오히려 리더십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 다들 전문가인데, 나만 이쪽 분야에 문외한이잖나?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성실하게 모든 걸 두드려 보겠다'고 결심했다. 침수지역을 계약할 뻔 하기도 하고, 카운티에 상소도 넣고, 중재라는 것도 해 봤다. 내 힘으로는 전혀 될게 없었다. 정말 팀으로, 많은 분들이 열심을 내 주셨다. 경험이 없으니, 뒷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닥쳐진 문제에 대해 그저 묵묵히 해결해 나가는 방식으로 일했다. 그러다 보니 능력과 재정으로 돕는 이들을 많이 세워주셨다.  

뉴욕 플러싱에서 로즐린, 그리고 뉴저지 파라무스에서 현재 장소까지 하나의 긴 여정이다. 비유하자면 출애굽 여정 같다. 그때마다 신앙의 고백이 조금씩 성숙해지고, 개혁의 가치와 방향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
제가 참여자로써, 개인적으로 느낀 점만 말씀 드릴 수 있겠다. 처음에는 개혁이 말 그대로 제도와 조직의 개혁이었다. 그 후 뭔가 영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성도들과 함께 공감했다. 씨엘존 사역도 그런 방향에서 추진된 것이라고 본다. 지금은 과거의 모든 것이 시행착오라고 느껴질 정도로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이라고 본다. 일 년 전부터 성경읽기가 시작됐다. 말씀이 이렇게 깊게 조명된 적은 처음이다. "하나님께서 이제야 제대로 된 신앙인의 길을 걷게 하시는 구나" 하는 고백이 나온다. 

지금까지 개혁적인 과정이 모두 시행착오였나? 밑거름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맞다. 지금까지의 과정이 있어서 하나님을 깊게 만날 수 있는 것 같다. 다만, 시행착오라는 표현을 쓴 것은, 우리가 종교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개혁적이고, 의로운 종교인이 되기 위한 몸부림은 그 다음 단계에 이르러서 일종의 시행착오다. 그러나 그 과정이 하나의 계단으로 작용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밑거름이다. 어떤 개념으로 규정하든지 나에게 그것이 중요하진 않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대로 걸어갈 뿐이다.  

'성경 읽기'가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조금 구체적으로 소개해 달라. 
교우 180명이 같이 카톡방(주: 메신저 앱)에서 말씀을 묵상한다. 하루에 4시간 정도를 말씀 읽고 나누는데 투자한다. 처음에는 직업인으로써 소명이라는게 있는건데, 일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에는 그냥 편하게 신앙생활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인정받지 못하는게 아쉽기도 했다. 그런데, 성령님이 차츰 인도하셨다. 성경 읽기를 하면서 내 삶이, 우리 180명 성도의 삶이 달라지는게 보였다. 흉내만 내는 신앙인의 모습이 과거의 껍데기가 되었다. 나의 삶의 어느 부분이 말씀에 비추어 얼마나 헌신되고 있는가를 성찰하는 시간이다. 그런 성찰에 하루 네 시간을 투자한다. 그간의 개혁은 이에 비하면 주변적인 개혁이다. 삶이 본질적으로 변화되는 진짜 개혁을 경험하고 있다.   

개혁적인 목사와 만나 24년을 함께 보냈고, 그 개혁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소중한 발견이 있나? 
저 또한 교회에서 장로로 섬긴다고 하지만, 진리 앞에 서면 가짜일 수 밖에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가짜가 가짜를 인도할 수 없는 것 아니겠나? 말씀 앞에 선 사람으로서 내가 가짜라고 고백하는 것이 우선 과제다. 그것은 결코 부끄러움이 아니다. 진리로 향하는 첫 걸음이다. 

삶의 자리를 좀 바꿔보자. 약사로써 조금 색깔이 다르다. 한국어 안내서를 만들어 무료로 보급하고, 나쁜 성분을 넣지 않은 생약을 제조해서 판매하기도 한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건가? 
그렇게 거창한 의미는 아니다. 약물에 관련된 잘못된 정보를 갖고 계신 분들이 많고, 그 중 영어가 불편하신 분들이 많았다. 약사로써, 적절하게 복용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싶었다. 특히 혈압, 당뇨, 콜레스테롤의 경우 알음알음 알게되는 정보가 과다하다. 그러다보니 기본이 흔들리는 부분이 많다. 기본만 잡아도 방향이 잡힌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생약 성분으로 된 관절염 약을 제조하게 된 계기는 '진통제' 때문이다. 신앙을 떠나 비양심적인 제조자들이 많다. 진짜 진통제를 넣어서 당장 안아프게 되면 좋은 약이라 믿게 되는 심리를 악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약은 가짜 아닌가? 장기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는 약을 만드는데, 당장 효과가 없으니 마케팅 차원에선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믿고 사용해 주시눈 분들이 계시니 약사의 소임을 다했다는 차원에서는 감사하다. 

약사회 회장으로도 섬기셨는데?
지금은 이사장으로 물러서 있다. 일선에서 회장으로 섬길 때, 감사하게도 재원이 많이 튼튼하게 되었다. 저도 1세대 이민자여서, 다른 약사님들께 힘이 되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뉴욕시 약사 협회 보드 멤버로 활동하면서 최신 정보와 변경된 사항이 있으면 알려드렸다.  

약사로서 장단점이 있다면? 
아픈 사람들을 돕고, 이를 위해 연구하고, 이웃 약국들과 연대하는 차원에서 지금까지 참 재미있었다. 이게 장점이다. 단점이라면, 시간의 제약이다. 아무래도 비즈니스니까 오너로써 많은 시간을 상주하는 것 밖에 뾰족한 수가 없다. 진리 앞에 서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장단점을 떠나서, 약사라는 직업도 '나'라는 의미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내 삶의 한 방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실하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삶이다.

과정으로써의 삶, 조명하 장로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떠올려진 한 문장이다. 부단하게, 성실하게 진리 앞에 서고자 하는 몸부림이 그의 삶이다. 그 모든 행적 하나 하나가 주춧돌이 되지만, 지나고 나면 과감히 되돌아 보지 않는 인생이다. 오직 '순전한 끌림'에 따르는 신앙인, 진정한 프로테스탄트로 여정이 어디까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