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랄라 현상과 방언 장사

현대 방언은 거의 다 가짜다

2017-10-02     신성남

초대 교회에 할례파가 있었다면 현대 교회에는 방언파가 있다. 과연 랄랄라 방언은 하늘의 비밀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무당 헛소리일까. 가장 중요한 점은 사도바울이 말한 정상적인 방언은 언제나 통역이 가능한 언어였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다른 곳도 아니고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전14:28)"고 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매우 중대하다. 간혹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다른 방언과 달리 인간의 언어 체계가 아닌 마구잡이 랄랄라여도 무방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이는 대단한 오해다.

우리는 흔히 사도행전 방언은 남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고, 고린도 방언은 남들도 자신도 못 알아듣는 방언이었다고 구분한다. 그 말은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고린도교회에는 통역할 수 없는 가짜 방언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전14:13)"고 강조했다. 정상적인 방언은 통역이 가능한 언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당시 통역 불가 랄랄라 현상이 고린도교회에 만연한 이유는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고 대적했던 거짓 사도들의 선동이라고 보아야 옳다. 고린도교회에는 심각한 문제가 많았고 특히 거짓된 가르침으로 인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고후11:4)'까지 받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경의 방언은 '지방 언어'였다

바울은 고린도 서신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고전14:11)" 라고 했다. 이 구절은 성경이 논하는 방언이란 땅의 언어이고 그것도 외국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게다가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고전14:21)"고 하신 구절을 보면 바울이 언급한 방언이 백성이 들을 수 있는 일반 언어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본래 통역이란 언어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것이다. 선풍기를 틀어 놓고 통역하라고 요구하는 미친 사람은 없다. 언어(Language)와 소리(Sound)의 차이는 명백하다. 문법적 체계를 지니고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게 언어다.

반면에 빗 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파도 소리는 그냥 소리일 뿐이다. 거기엔 아무런 문법도 없고 체계도 없다. 그런 면에서 통역 불가 '랄랄라'나 '으다다다'나 '개굴개굴'은 결코 언어도 아니고 방언도 아니다.

성경의 방언이 반드시 외국어라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는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고전14:22)"이라는 구절에 있다. 이는 방언의 진정한 목적과 용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본래 방언은 언어가 다른 이방인 전도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그게 당연히 놀라운 표적이 되는 것이다. 만일 외국어가 아니라 뜻도 모르는 랄랄라로 믿지 않는 이방인에게 말한다면 그게 어찌 표적이 될 수 있겠는가. 도리어 크게 비웃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믿는 자들을 위해서는 굳이 방언이 필요 없다고 설명한 것이다.

'아주사 운동(Azusa Rivival)'은 교회사적 돌연변이

사실 신약 초기의 교부 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무려 1800년 동안이나 기독교 내부에서 방언이 널리 유행하여 신학적 관심사가 된 적은 거의 없었다. 교회 역사상 간간이 나타난 극소수의 신비주의 집단들 외에는 방언이 일반화한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과 100여 년 전 이런 큰 흐름을 깬 돌연변이적 사건이 있었다. 바로 1906년의 '아주사 부흥운동(Azusa Rivival)'이다. 당시 미국 LA타임즈에 실린 그 집회 기사의 제목은 '괴기한 방언의 바벨탑 쌓기'였다. 그들은 1909년까지 3년에 걸쳐 매일 집회를 지속했고 수천 명이 모여 성령의 은혜에 감동했다고 주장한다.

아마 이게 본격적인 랄랄라 운동의 시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갑자기 들불처럼 퍼진 여러 방언 운동들은 대체로 이 아주사 방언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래서 상당수 오순절 계통이나 신사도 계통 교단들은 아주사 방언을 마치 성지처럼 찬양한다.    

그럼 대체 무슨 이유로 현대 방언이 이처럼 별안간 성행하게 되었을까. 특히 미국과 한국에서 그 현상이 더욱 강하다. 다른 여러 요인도 있겠지만 나는 이게 현대 교회의 세속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개신교가 쇠퇴하고 있는 유럽에서는 방언이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헌데 미국교회와 한국교회는 근세기에 큰 부흥을 이루었다. 교회 역사에 전무후무한 수만 명의 초대형 교회도 이 시기에 탄생했다.

즉 교회가 돈과 권력이 모이는 육식공룡이 되면서부터 영적으로 혼탁한 성령 운동이 동시에 태동했다. 아니 역으로 보자면 왜곡된 성령 운동이 사람을 더 많이 모으고 교회당을 더 크게 키웠다는 표현이 보다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터무니없이 성행한 랄랄라 방언

하지만 아주 약간의 상식만 있는 사람이라면 랄랄라 방언이 얼마나 허구이며 기만인지 매우 쉽게 알 수 있다. 현대 방언은 신학의 문제이기 이전에 상식의 문제다. 누구라도 좋다. 요즘 소위 통역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 10명만 모아서 특정인의 랄랄라를 5분 동안 들려주고 각자 노트에 통역을 적으라고 하면 된다.

만일 그 중에 단 두 사람의 내용만 일치해도 나는 현재의 주장을 모두 취소하고 랄랄라를 성령의 사역으로 즉시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00년 간 고린도식 랄랄라 방언을 동시에 통역해서 서로 일치한 기록은 단 한 건도 없다. 백 명이 하면 백 명이 다르고, 천 명이 하면 천 명이 모두 다르다.

설사 백 보 천 보 양보하여 많은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외국어가 아닌 '하늘의 언어'로서 랄랄라 방언이 실제 성경적 가치를 지닌 존재라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큰 의문이 남게 된다. 왜 현대 방언은 한결같이 모두 랄랄라로만 나타나냐는 거다.

만일 현대 방언이 정말 그들의 주장처럼 성령의 사역이며 성경의 방언이 현재도 그같이 반복하여 재현된다면 외국어 방언 또한 동시에 많이 나타나야 더 정상이 아니냐는 것이다. 균형상 적어도 반 정도는 외국어 방언이 나타나야 정상이다. 그런데 왜 그 좋은 외국어는 다 놔두고 하필이면 그토록 난잡한 랄랄라만 터무니없이 성행하냐는 것이다.

한국교회 랄랄라 업계의 대부격인 C목사의 방언을 녹음해서 들어보면 이건 아예 언어도 아니고 거의 그냥 육갑떠는 수준이다. 게다가 어쩌다 뱉어내는 그의 통역은 더욱 가관이다. 초등학생도 그걸 들으면 배꼽을 잡는다.

교회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랄랄라가 성령의 역사란 증표나 근거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도리어 악령의 역사일 가능성이 거의 100%다. 사탄은 속이는 자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다가온다. 그래서 제 아무리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이 방언을 한다고 해도 그걸 함부로 포용해선 안 된다.

오순절 방언은 외국어다

장로교 보수 교단에 출석하는 내 가까운 지인 중에도 학생 시절부터 오랜 기간 랄랄라를 했던 분이 있다. 그러나 다행히 늦게나마 그것이 가짜인 걸 깨달고 단호히 버렸다. 본인이 구하지도 않았는데 혀가 꼬이며 저절로 받았다거나 또는 자신이 매우 간절히 구해서 랄랄라를 한다고 해도 그게 성령의 은사라는 보장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아울러 힌두교나 불교나 이슬람교 일각에서도 얼마든지 랄랄라 방언이나 접신 현상이 있다는 걸 간과해선 안 된다.  

더구나 랄랄라 방언은 개신교를 온통 목회업자의 장사판으로 물들였다. 삯꾼 목사들은 랄랄라를 지극히 좋아한다. 이보다 더 좋은 종교 영업이 없다. 랄랄라에 빠지면 신도들이 종교 생활에 더 몰두하고 헌금도 더 열심히 내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동안 방언 장사를 크게 벌린 목회자치고 부자가 아닌 사람이 별로 없었고, 또한 그 끝이 좋은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아무튼 앞으로 랄랄라 방언과 연관해서 소위 '오순절운동'이란 말은 함부로 쓰지 마시기 바란다. 이는 성경의 방언에 대한 모욕이며 신도들을 속이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오순절에 일어난 방언은 분명히 유라시아 지역 15개 이상의 다양한 언어였지 뜻도 없고 씨알도 없는 랄랄라는 절대로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방언과 관련하여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전14:9)"고 경고한 가르침을 잊어선 안 된다.

한국 개신교의 무분별한 방언 지지자들은 이제 무당 작두 타기를 멈추어야 한다. 무당이 날선 작두를 탄다고 해서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보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랄랄라는 교회모독이며 동시에 신성모독이다. 자기 자신조차 이해 못하는 헛소리나 환각에 심취해 가짜 방언이나 귀신 방언에 빠진 걸 신령한 신앙 생활로 오도하는 기만 행위는 단호히 근절해야 마땅하다.

랄랄라는 무당 헛소리다. 그리고 헛소리는 기도가 아니다. 그건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단순히 시간 낭비, 심력 낭비, 그리고 인생 낭비일 뿐이다.

"우리는 공중기도에서나 개인기도에서나 이해력을 동반하지 않은 말은 하나님께서 심히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느낀다." - 장 칼뱅(Jean Calvin),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