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데 물어볼 수 없었던 '삼위일체 교리'

송병주 목사의 '삶과 신앙의 의문을 찾아서' 1편

2010-07-23     송병주

목회자 중심의 메시지가 아니라 성도들의 관심에 답하기 위한 '삶과 신앙의 의문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연속 설교(선한청지기교회 송병주 목사)를 연재합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항상 공격의 대상이었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을 머리 셋 달린 괴물로 만들었다', '로마적 이교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악한 교리다'는 등의 공격이 많았고, 그래서 폐기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여호와증인을 2대째 50년간 믿어온 분과 심각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나보고 그런 말을 했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닌데, 로마의 우상숭배에 빠진 기독교가 하나님이 아닌 겸손한 분 예수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거짓 교리를 만들어 겸손한 예수를 더러운 우상으로 변질시켰다. 하나님이 아닌 분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사단이 하는 짓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대답했다. “예수는 하나님이신데, 근대의 이성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인간으로 만드는 거짓 교리를 만들어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인간으로 변질시켰다.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사단이 하는 짓이다.”

그분의 견해대로 결국 우리 둘 중의 하나는 사단이다는 결론을 맺고 끝을 낼 수밖에 없었다.

삼위일체에 대한 단순한 결론 = '묻지마 다쳐'

삼위일체 신앙의 문제는 이단의 문제가 아니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이 삼위일체를 전혀 다루지 않는 것 또한 문제다. “이해하기 어렵다. 잘못 건드리면 이단 소리 듣는다. 무조건 믿음을 가져라. 몰라 묻지마!” 분위기로 일관한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무서운 분, 잘못 건드리면 큰 일 나는 분”이 되어 버렸고 결과 삼위일체 속에 담긴 풍성한 은혜는 모두 사라진 채 교리 속에 봉인된 전설처럼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삼위일체에 대한 결론은 단순한 결과를 남겨 두었다. “묻지마 다쳐!”

이단이나 개신교나 모두 삼위일체를 분명코 잘못 접근하고 있다. 삼위가 드러난 이유, 일체를 이룬 이유… 모든 것의 중심에는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구원의 열정이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잘못된 접근 바로잡기

먼저 삼위일체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벽이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를 갖게 한 장벽은 바로 삼위일체를 철저하게 '존재론적 이해'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하나님 세분께서 천국에서 어떻게 존재하시는 열심히 연구한 것이다. 독수리 오형제가 합체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이 땅이 아닌 저 하늘에서 세분이 어떻게 붙어 다니는지 알려고 하는 의미 없는 연구를 한 것이다. 세분이 천국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우리가 안다고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삼위일체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없는 하나님의 관계 연구가 아니다. 기억하라. 삼위일체는 우리 때문에 이 세상에 드러나고 계시된 지식이다.

삼위일체는 절대 철학적, 존재론적 지식이 아니다. 내 삶의 모퉁이마다 나타나는 경험적이며 구원론적 지식이다. 삼위일체는 죄인 된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령의 열정을 체험하고 경험하여 고백하게 되는 지식이다.

나를 불러주신 아버지의 사랑,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아들의 사랑, 나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고백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감격과 찬양으로 터트리는 탄성, 감탄사가 바로 삼위일체의 고백인 것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사랑합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그러므로 이것은 책상 앞에 앉은 신학자들이 펜대 굴려가며 이해하는 신학이 아니라 시장에 좌판 깔아놓고 나물 파는 할머니도 고백할 수 있는 구원의 감격인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현장은 저 하늘 위가 아니라 바로 내가 구원받는 구원의 현장이다. 삼위일체는 천계의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속계에서 일어나는 구원의 간증에 있다. 삼위일체는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구원받는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 천국에는 예수님이 대신 죽어야 구원받을 천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이 땅의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였다. 천국에 방언을 받아야 할 천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이 땅의 구원받은 백성들을 인치시기 위함이었다.

삼위일체는 이 땅의 죄인들을 살리기 위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총력전의 결과이다. 삼위일체를 '신비'라고 말하지 말라. 오히려 죄인인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신비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셨다. 우리 때문에 하나님은 숨길 것 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셨다. 밑천 다 드러내셨고 다 보여준 것이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는 계시의 정점이다.

여호와, 임마누엘, 보혜사

이런 관점의 전환 속에서 삼위가 어떻게 나타났고, 일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각 위격의 대표적인 이름을 통해서 살펴보자. 후술하겠지만, 삼위의 각 위격이 나타난 이유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였고, 결국 삼위가 하나 되신 것도 우리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총체적 표효이자, 일반적으로 성부로 인식되는 존재는 '여호와'이다. 여호와의 이름 역시 인간의 구원, 우리와 함께 하심을 근거로 한다. 여호와라는 말은 영어로 "I am who I will be"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의미는 “I will show you something. At that time you know who I am”가 된다. "뭔가 보여줄 테니 그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쉽게 말해서 김두환이 종로를 거닐고 있는데, 15살짜리 노상강도 셋이서 김두환에게 통행료를 내라고 했다. 김두환은 “나! 김두환이야”라고 말했는데, 이들은 웃으며 “네가 김두환이면 난 김두환이 할아버지다. 딴 소리 말고 돈 내”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두환이 돌려차기로 셋을 쓰러뜨리고 목을 밟게 되자 그들은 비로소 “형님” 하게 되고, 이때 김두환이 “내가 김두환인 줄 알겠느냐?” 하게 된다. 여호와를 김두환과 비교해서 그렇지만, 이것이 I am who I will be라는 이름 속에 담긴 의미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여호와,구원의 이름

여호와는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이름이다. 여호와의 이름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여호와의 이름이 나타나는 순간은 항상 고통 받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있고, 그들을 살리는 여호와의 구원이 실현되고, 그리고 “내가 여호와인줄 알겠느냐”로 이어진다. 강퍅한 바로가 백성들을 핍박할 때, 앞은 홍해바다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달려올 때, 그때 함께하시며,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말과 적군을 무찌르시며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시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여호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하실 때 경험하게 되는 구원의 이름이 여호와인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이 계시되는 곳은 저 하늘이 아니라 바로 구원이 필요한 우리의 삶의 현장 한 가운데인 것이다. 출 3:12을 찾아보자.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너와 반드시 함께 있으리라” 13절부터 자신의 이름이 여호와인 것을 본격적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여호와의 속성은 “반드시 함께하리라”는 약속 위에서 시작된 것이다. “여호와”란 이름의 근본 전제가 무엇인가? “구원받아야 할 백성 그리고 함께하심”이다. 이 약속은 10가지 재앙에서도 홍해 앞에서도 그리고 40년 광야생활에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신실하게 성취되었다.

성자의 대표적인 별칭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의 의미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 한가운데 눈에 보이도록 몸을 입고 하나님이 직접 함께하신 성자의 이름이다. 아예 이름 자체가 “함께하심”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하신 것이 성자 임마누엘이다. 이 이름도 여호와와 동일하다. “구원받아야 할 백성 그리고 함께하심”이다.

보혜사,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한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벌거벗음이다. 우리를 살리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신 계시의 정점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벌거벗겨지는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셨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에 대한 신비감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수수께끼가 아니다.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에게 파악당하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철옹성이 아니다.

삼위일체는 우리를 살리려고 몸부림치신 사랑의 하나님의 벌거벗음이다. 애미와 애비의 심정을 갖고 우리를 살리려 몸부림치신 가슴의 논리의 결과이기에 그 심정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눈물과 감격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눈을 감아본다. 나를 부르신 아버지, 범죄하고 떠났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금도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본다. 나의 병든 마음과 육신을 치유하신 아들, 여전히 완악한 나를 위해 벌거벗겨져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흘리신 아들을 본다.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 하는 성령님의 오열에 가득한 기도의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역사하시는 삼위하나님은 이런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한 마음으로 한 열정으로 한 눈물로 역사하고 계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만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상하다. 삼위일체라는 이 교리적 표현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눈물이 흐른다.

송병주 목사 / 선한청지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