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본회퍼가 쓴 '10년 후'라는 글 전문이다. 1942년 성탄절 무렵, 작성해 지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낸 글이다. 독일 비밀경찰의 가택수색에도 남아 잇을 수 있었던 것은 본회퍼의 부모가 집 지붕의 기와와 서까래 사이에 숨겨둔 것이 훗날에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옥중서간>의 역자는 "히틀러 집권 하의 10년 동안의 독일의 정신적 상황과 저항운동에 관한 분석으로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불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동호 교수가 미주뉴스앤조이 아카데미 특강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옥중서간 >발췌해 직접 번역했다. (기자 주) 딛고 설 땅이 없다 딛고 설 땅(근거)이 이리도 없던 사람들이 인류 역사에 있었을까? 가능한 대안이라고는 하나같이 참을 수 없고 비열하며 무익하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 가능한 모든 대안에서 눈을 돌려 과거로부터 혹은 미래로부터 힘의 원천을 찾고자 한다. 그들은 그저 몽상가로 남는 게 아니라 차분하게 그리고 확신을 갖고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의 성취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 어느 세대이건 역사의 전환기에는 우리들과 같은 느낌을 가진, 책임 있고 사려 깊은 사람들이 있었던 게 아닐까? 모름지기 정녕 새로운 것, 이미 존재하는 대안들 속에는 없는 법이니까. 확고히 설 자 누구인가? 거대한 악의 가면무도회가 윤리적 개념 전부를 혼란에 빠뜨렸다. 전통적 윤리 개념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악이 빛으로, 자비로, 역사의 필연법칙으로, 혹은 사회정의를 가장할 때 헷갈릴 수밖에 없다. 한편 성서에 의지해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악은 워낙 뿌리 깊은 세력이란 것을 확인하는 데서 그친다. 이른바 “이성적인” 사람들의 오류는 명백하다. 의도는 드높지만 현실 인식은 서툰 그들은, 이성의 적용으로 부서진 구조물을 원위치로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야가 흐릿한 그들은 모든 세력들을 공평하게 대하고자 하는데 그러는 동안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적대하는 세력들의 틈바구니에서 힘만 소모하고 만다. 세상의 비이성에 절망한 그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하고 세상일에서 발을 빼거나 강한 편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그보다 더 딱한 것은 도덕적 열광주의의 총체적 실패다. 그들은 오직 도덕 규칙만을 철저히 들고나가면 악의 힘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붉은 보자기를 든 투우사가 아니라 그 보자기를 향해 돌진하는 싸움소와 같이 힘을 탕진하고 패배한다. 그들은 본질이 아닌 문제에 얽혀들고 똑똑한 사람들이 쳐놓은 올무에 빠진다. 그 다음엔 양심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결단을 요구하는 엄중한 상황 속에서 홀로 외롭게 싸운다. 그러나 그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싸움의 규모 때문에, 오직 자신의 양심 말고 다른 조언이나 격려가 없는 그들은 산산조각나고 만다. 악은, 고결하고 매력에 찬 온갖 모습으로 그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양심은 힘 빠지고 흔들리게 된다. 결국 그는 명석한 양심이 아니라 타협한 양심으로 만족하고,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게 된다. 오로지 자기 양심에만 의지하는 사람은, 불량한 양심이 더욱 강하며, 미망에 빠진 양심보다 더 건강할수조차 있음을 알지 못한다. 많고 많은 갖가지 선택지들 가운데 그래도 의무야말로 출구처럼 보인다. 하달된 명령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것이고, 책임은 명령권자에게 있지 명령을 받은 사람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무의 한계에 자신을 한정한 사람은 누구도, 악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무찌를 수 있는 행동을 오직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감행하지 못한다. 의무의 인간은 결국 악마의 명령도 의무로 수행해야 하는 처지에 떨어진다. 어떤 개념에도 얽매임 없이 세상과 솔직하게 맞짱 뜰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무슨 흠 없는 양심이나 평판보다는, 어쨌든 해야만 하는 일을 높이 친다. 타협으로 성과를 낼 수 있다면 공허한 원칙은 기꺼이 희생하며, 아무 실효도 없는 중도의 지혜를 버리고 성과만 있다면 과격한 선택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바로 그 자유 때문에 망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더 나쁜 결과를 막기 위해 덜 나쁜 것을 선택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피하고자 하는 더 나쁜 것이 너 좋은 것일 수도 있음을 그는 깨닫지 못한다. 비극의 원자료가 바로 여기 있다. 이 곳 저 곳에서 사람들은 공공 논쟁을 외면하고 사도덕의 성소로 도피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자기 곁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대해 입 다물고 눈 감게 된다. 책임 있는 행동에 따르기 마련인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려면 자기기만이라는 대가를 치를 수밖엔 없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가 하지 않은 일 때문에 그는 마음의 평화를 갖지 못한다. 이 마음의 불안 때문에 그는 아주 망가진 사람으로 되거나 바리새인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위선적인 바라사이 사람으로 된다. 굳건히 서는 자 누구인가? 궁극적 표준이 이성도, 도덕 규칙도, 양심도, 자유도, 개인적 덕성도 아닌 사람. 믿음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충성으로, 순종과 책임의 행동에 부름 받았을 때 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된 사람. 하나님의 물음과 부름에 삶 전체로 응답하려는 책임 있는 사람. 책임 있는 이런 사람들, 어디에 있는가? 역사에 내재하는 정의 가장 놀랍고도 가장 부정할 수 없는 경험의 하나가, 악은 (가끔 놀랄 정도로 짧은 시간에) 그 어리석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자신의 목표를 그르친다는 것이다. 악행 하나하나마다 곧바로 벌이 따른다는 뜻은 아니다. 현세의 자기보전을 위해서라고 여기며 고의로 하나님의 법을 범하면 그와 정반대의 결과를 얻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이것을 배웠는데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사회적 삶에는 아주 강력한 법이 있어서, 그 법 위에 있다고 믿는 어떤 권세도 능히 이긴다는 것, 따라서 그 법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일 뿐 아니라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 정도는 적어도 확실히 추론할 수 있겠다. 이로써 왜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아퀴나스의 윤리학이 지혜를 가장 중요한 덕의 하나로 꼽았는지를 알게 된다. 신-개신교의 동기 윤리학이 주장하듯 지혜와 어리석음이 윤리학에 무관한 문제가 아니다. 실제 상황 전체 그리고 그 상황에 주어진 가능성들 중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인간 사회의 삶의 영원한 법이 모든 행동들 위에 부과한, 절대 넘어서는 아니 될 한도를 인식한다. 그리고 이 인식 속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선하게 행동하고 선한 사람은 지혜롭게 행동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모든 행동이 이 법이 정한 한도를 계속해서 위반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 위반을 원리상 법의 초월로 보고 따라서 그 나름의 특별한 법으로 삼느냐, 아니면 오직 그 영원한 법과 그 한계를 가능한 한 속히 재확립하고 존중함으로써만 정당화할 수 있는, 불가피한 위법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정치적 행동의 공개적 목표가 법의 회복이지 그저 자기보전이 아닐 경우 이런 입장은 딱히 위선이랄 수 없다. 궁극의 법과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적 경외가 또한 자기보전의 최선의 방법이고, 그러므로 꼭 필요할 경우에 잠시 이 법을 어길 수는 있지만 잠시의 필요를 하나의 원리로 바꾸어 그 나름의 법으로 내세우는 사람은 조만간 어쩔 수 없이 응보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게 아니라 세상의 질서이다. 역사에 내재하는 정의는 오직 인간이 한 짓에 상벌을 주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정의는 인간의 마음을 심판한다. 하나님의 역사 주권에 관한 짤막한 신앙고백 하나님은 악에서, 심지어 가장 흉악한 악에서조차도, 선을 내오실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활용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온갖 어려움을 이기는 데 필요한 힘을 주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나머지 하나님께만 의지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그 힘을 미리 주시지는 않는다. 이런 신앙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공포를 누그러뜨린다. 우리의 실수와 단점마저도 선을 이룬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우리 생각에 잘한 짓 못지않게 잘못한 짓도 하나님은 아무 어려움 없이 다루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시간에 무관한 운명이 아니라 성실한 기도와 책임 있는 행동을 기다리고 응답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어리석음에 관하여 어리석음은 악보다 더 위험한 선의 적이다. 악은 저항할 수도 있고 폭로할 수도 있고 필요하면 강제로 막을 수도 있다. 악은 적어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자기파멸의 씨앗을 언제나 내장하고 있다. 어리석음에 대해선 방어 수단이 없다. 항의도 강제도 안 듣고, 논리도 소용없으며 편견에 모순되는 사실을 들이대도 그저 믿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실을 반박하는 식으로 대응하기도 하도, 반박이 도무지 불가능해지면 사실들을 사소한 예외로 치부해버리고 만다.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은, 악당들과 달리, 완벽한 자기만족이다. 그런 사람은 아주 쉽게 공격성을 띨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러므로 악당보다 어리석은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을 이성으로 설득하려해선 안 된다. 소용이 없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그것이 윤리적 결함이지 지적 결함이 아니라는 점이다. 머리는 좋은 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고, 머리는 그리 좋지 않지만 어리석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특수 상황 부딪히면서 우리도 놀란 발견이다. 그래서 어리석음이란 타고난 소질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 획득한 성질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바보가 되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바보로 만들도록 허용한 것이다. 이런 결함은 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내는 사람들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 하거나 그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개인들 혹은 집단들 속에서 더 흔하다. 그렇다면 어리석음은 심리현상이라기보다는 사회현상일 테고, 역사적 상황에 사람들에게 작용하는 특정 형식, 혹은 특정한 외부 요인들의 심리적 부산물일 성싶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치권력이건 종교 권력이건 권력의 난폭한 과시가 인류 대다수에게서 어리석음을 폭증시킨다. 이것이 심리학적 사회학적 법칙인 것 같다. 일부의 권력이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적 능력 같은 인간의 어떤 능력이 성장을 멈춘다든가 파괴된 다기 보다는 권력의 횡포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사람들이 독립적 판단 능력을 상실하고(얼마간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현상을 스스로 판단하기를 포기하는 것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흔히 고집이 센데, 그 때문에 그가 독립적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실, 그런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은 슬로건, 표어 따위를 상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주술에 걸려 있고 눈이 먼 상태이며 그의 본성 자체가 오용 남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수동적인 도구로 된,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악도 저지를 능력은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악임을 알아차릴 능력은 없다. 사람됨에 복구할 수 없는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악마적 인간 오용의 위험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어리석음의 극복은 훈계로써가 아니라 오직 해방의 행동으로만 가능하다는 것도 분명해진다. 많은 경우에 외적 해방이 내적 해방에 앞선다는 점도 분명해지며, 따라서 외적 해방이 발생할 때까지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런 상태에서, “민중”이 정말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알아보려는 노력이 왜 헛일인지, 그런 물음이 책임 있게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사람들에게 소용없는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물론 이 특수 상황에서 그렇다는 것이지만.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시편 111:10)이라는 성서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게 살고자 하는, 내면의 자유만이 어리석음을 치유하는 유일한 약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어리석음에 대한 이런 생각에는 위안이 되는 것도 좀 있다. 이런 생각은, 사람들 대부분은 어떤 상황에서건 어리석다는 식의 생각을 결코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권력층이 민중의 지혜와 정신의 자주성을 더 기대하느냐 아니면 민중의 어리석음을 더 기대하느냐 하는 것이다. 인간 경멸? 우리에게 인간을 경멸하는 태도로 기울 위험은 아주 심각하다. 우리들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 그런 태도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메마르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 아래 적은 생각이 그런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성 싶다. 우리의 적들이 저지른 최대의 오류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사람은 그 사람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경멸하는 어떤 것도 우리 자신에게 아주 없는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부터 다른 사람에게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어째서 우리는 인간에 대해, 쉬 부서지고 쉬 흔들리는 인간의 약함에 대해서 그렇게도 차갑게 대해왔을까? 우리는 사람들을, 그들이 한 일, 하지 못한 일이라는 면에서 보기보다는 그들의 겪은 고통이라는 면에서 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보람 있게 다른 사람들 – 특히 연약한 형제들 - 과 관계를 맺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의 관계, 그들과 사귐을 가지려는 의지이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멸시하시기는커녕 인간을 위한 인간으로 되셨다. 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온전한 간격을 회복하기 위해 결연히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의 가치의 무질서 속에 망해갈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마구잡이로 경멸하는 것이 군중의 특징이다. 한편 내면의 불확실성, 거드럭거리는 사람의 호감을 사보려는 흥정과 굽실거림, 그리고 자신을 군중의 수준으로 낮아지려는 노력 들은 스스로 군중보다 나을 가없게 되는 첩경이다. 우리 자신에게 또 다른 사람들에게 마땅한 자세가 무엇인지 망각할 때, 질적 인간성의 감각과 예의를 지키는 힘이 없어질 때 혼란은 문 앞에 다가와 있다. 물질적 안락 때문에 무례를 눈감아주면 스스로 위엄을 포기하는 것이고, 혼란의 수문을 열어 우리가 지켜내야 할 댐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다른 때라면 만인의 평등을 주창하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임무일지 모르지만, 오늘날은 인간의 위엄과 예의를 열정적으로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책무이다. 우리가 우리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는 오해나 우리의 태도가 반사회적이라는 식의 싸구려 암실랑 그저 묵묵히 감수키로 하자. 이런 것들은 인간의 위엄과 질서에 대한 대중의 판에 박은 저항이다. 이 문제에 대해 혹하거나 입장이 불분명한 사람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정녕 비난받아 마땅하다. 사회의 모든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동시에 고귀함(nobility)의 새로운 감각이 태어나고 있다. 고귀함의 새로운 감각은 옛 사회의 온갖 계급으로부터 사람들을 모아 하나로 묶고 있다. 새로운 고귀함은 희생, 용기, 그리고 자신과 사회에 대한 분명한 의무감으로, 또한 그에 걸맞은 존경심을 요구하는 데서 발생하고 존속한다. 새로운 고귀함의 감각은 또한 높든 낮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자연스러운 존경심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상실된, 질에 대한 감각과 질적인 것에 기초한 사회질서를 회복해야만 한다. 질적인 것은 어떤 대중적 평준화에 대해서도 최대의 적이다. 사회적으로 그것은, 온갖 자리 찾기의 거부 , “스타” 숭배 중단, 위와 아래를, 특히 가까운 벗을 선택할 때, 열린 눈으로 보는 것, 그리고 공공영역에 진출할 용기를 갖는 것과 사생활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 등을 의미한다. 문화적으로 그것은, 신문과 라디오로부터 책으로, 정신없이 바쁜 상황으로부터 서두름 없는 여가로, 산만함으로부터 집중으로, 선정성으로부터 성찰로, 대가 예찬으로부터 예술로, 속물근성으로부터 겸허함으로, 휘황함으로부터 단아함으로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 양적인 것은 경쟁하고 질적인 것은 서로 보완해준다. 아래로 부터 보기 비할 데 없이 큰 가치를 갖는 경험이 있다. 우리는 세계사의 대사변들을 밑으로부터, 쫓겨난 자, 의심받는 자, 박대 받은 자, 권세 없는 자, 억눌린 자, 욕먹은 자의 시각에서, 요컨대, 고통 받은 자의 관점에서 보는 법을 한때 배웠다. 이때 시기심이나 질투심이 마음을 갉아먹지 않게 하는 것, 크고 작은 일, 슬픔과 기쁨, 강함과 약함을 신선한 눈으로 보게 되는 것, 인정, 인간다움, 정의, 자비를 인식하는 우리의 눈이 맑고 자유로우며 흐리멍덩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유와 행동으로 세계를 탐구하는 데 사람들의 행복보다는 그들이 몸소 당한 고통이 더 유용한 열쇠요 더 보람 있는 원칙임을 배워야 한다. 밑으로부터 보기는, 영원히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의 당파적 소유물로 되어선 안 된다. 오히려 한결 더 높은 만족을 기준으로 하여 삶의 모든 차원을 온전하게 보아야 한다. 더 높은 차원의 만족이라는 기준은 “아래로부터”라거나 “위로부터”라거나 하는 식의 언어를 넘어선다. 이것이 삶을 긍정하는 방식이다. 교회와 프롤레타리아 (성도의 공동체,193쪽 이하) 교회의 미래는 “부르주아적”이지 않을 터이다. 그것이 어떨지는 말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교회의 진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Thorwaldsen과 멘델손이 아니라 뒤러, 렘브란트, 바하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이라든가 사회주의 강령을 강요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가 프롤레타리아에게 다가가고 “대중”을 “회중”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아는 개별 인격들의 공동체이어야 한다. 그저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이 원칙을 벗어나선 안 된다. “대중은 거룩하다”는 틸리히의 생각(대중과 정신)은 그리스도교 신학과 아무 상관도 없다.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뿐이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에 교회를 묶어두셨으며, 누구나 이 말씀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무 형체 없는 대중 속에 계시되었다고 하는 “절대(the absolute)”를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체적 역사적 의지를 알며, 대중을 저주하기보다는, 대중을 dues absconditus, 숨어있는 하나님, 즉 긍휼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에게 굴복시켜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숨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처음 들어보는 말씀을 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밖에 구원은 없다. 대중에게 교회 공동체의 개념을 향하도록 해야지 거꾸로 해서는 안 된다. 사회학적으로 사회주의와 그리스도 공동체가 동일한 것도 아니고, 종교 사회주의자들이 흔히 말하듯, 사회주의 건설이 곧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그리스도교 공동체 개념 사이에 일정한 “친근성”이 있는 것도 분명하다. 이를 무시해선 안 된다. 이미 살펴봤듯이, 사회주의의 평등 개념은 신학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도 유지될 수 없다. 억지로 사람들을 똑같게 만드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비그리스도교적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개개인 고유의 각기 다름에 기초한다. 그러나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모든 신자가 다 사제하는 원칙을 따른다. 자유인은 자유인으로, 종은 종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과 종은 하나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또한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다. 다수가 소수를 종으로 삼는 것은 비그리스도교적이다.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는, 개인 위에 군림하는 어떤 지상 권세도 끼어들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과 공동체는 평형 속에 유지된다(모나드의 이미지).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와 개인주의는 함께 간다. 사회주의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차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떤 정치적 조직 혹은 경제적 조직으로도 성취될 수 없음을 인식할 때 분명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앞에 제시된 실마리를 붙들어야 하고, 대결과 논의가 힘들더라도 교회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삶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