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학에 가까운 종교적 책임, 누가 던져준 짐인가?

정용섭 목사의 신학단상(17) '교회와 종말'

2011-09-04     정용섭

예수는 이스라엘의 민중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태가 중첩되어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이 그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예수가 말씀한 무거운 짐이라는 건 인생살이의 짐이 아니라 그 당시 유대교의 짐이었다는 사실이다.

예수 당시의 유대교는 왜 무거운 짐이었을까? 이 문제는 내가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이 분명하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막기 위해서, 또는 그의 긍휼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처음에야 기쁨과 환희로 그런 일을 감당했겠지만 그것이 규범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다음에는 두려움과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기 마련이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은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하다. 바리새인 같은 종교 전문가들이나 약간씩 흉내를 낼 수 있을만한 율법이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민중들은 그야말로 종교적 짐에 휘둘린 것이다.

내 생각에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들도 역시 이런 짐에 짓눌려 있다. 그들은 기쁨으로 그런 일을 감당한다고 하겠지만, 인간은 자학적인 방식으로도 나름으로 심리적 만족감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에 오늘의 종교적 책임들은 거의 자학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옛날 우리나라의 여자들이 시집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나름으로 사명감으로 자기 삶을 희생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런 삶의 태도를 오늘날 가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는지.

예수는 이스라엘 민중의 종교적 짐을 편하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제 더 이상 율법이 무의미한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충분한 그런 은총의 세계를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은총의 세계를 인정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해야 하고, 몸을 불사를 정도로 헌신적으로 살아야 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경지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무거움과 가벼움의 문제는 비단 종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직결된다. 우리의 일상은 대개 지나치게 무거운 짐으로 눌려 있다. 어떤 업적을 이루기 위한 욕망이 우리의 존재를 짓누르고 있다. 예수가 짐을 가볍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일상도 근본적으로 가벼워져야만 절대적인 세계, 또는 구원의 세계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질문하자. 삶이 가벼워진다는 건 무슨 뜻일까? 자기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하는가?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선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맡은 일들을 내팽개치는 것을 말하는가? 궁극적으로는 그런 것까지 포함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경지는 죽음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삶이 가벼워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무겁게 하는 것으로부터 가볍게 하는 것으로 삶의 중심을 옮긴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회심이야말로 이런 삶의 지름길이다. 우리의 삶을 무겁게 하는 것들이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자기가 성취하려는 의도에 의해서 벌어지는 일들이며, 거꾸로 가볍게 하는 것들이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바로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는 삶의 태도에서 나온 일들이다.

결국 우리의 삶이 가벼워지는 길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인식하고 그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찾는 데에 있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인간의 참된 안식은 하나님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가벼운 삶은 결국 가장 무거운 것과 연결된다. 하나님만큼 무거운 존재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통치, 존재, 그의 계시, 그의 미래와 그의 생명이라는 주제보다 더 심각한 것들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주제를 상실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교회마저도 사실은 이런 주제를 잃어버렸다. 수많은 예배와 찬송과 성서공부가 있지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식으로 온 세계에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거기에 정작 필요한 무거운 주제에 관한 진지한 태도가 전혀 없다. 다만 인간의 열정만 난무할 뿐이지 진정한 영성이 사라졌다. 인간의 감수성과 감성은 우리를 감동시키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미래에 관한 치열한 고민은 없다.

이는 흡사 젊은 연인들이 사랑의 리얼리티에 들어가는 경험 없이 단지 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려고 공연히 애를 쓰는 것과 같다. 서로 보고 싶다는 그 감정만 자극하기 위해서 온갖 이벤트를 만드는 데만 마음을 쏟고, 상대방의 인격과 삶의 심층으로 들어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렇게 감성 위주의 사랑이나 감성 위주의 신앙생활을 통해서는 인간의 참된 만족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데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은 그런 패턴을 반복하고 강화하는 일에 몰두한다. 결국 그런 젊은 연인들은 사랑이라는 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기독교 신앙은 종교적 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오늘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2000년 전 이스라엘과 똑같이 종교적인 무거운 짐으로 휘청거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무거움을 짐짓 감추기 위해서 우리는 그렇지 않은 척 자기 자신과 이웃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삶의 가벼움을 위해서, 이것이 곧 구원의 상태인데, 우리는 무거운 주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수밖에 없다.

정용섭 목사 / 샘터교회 담임·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고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