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꼼수다’와 기독교 정당

성희롱범 정치 현장서 쫓겨나는데, 다른 성희롱범 정치한다는 기막힌 ‘역설’

2011-10-29     김용민

“이제 대한민국 지성은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를 아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로 갈릴 것이다.”

지난 7월 중순경 한 언론소비자단체 행사에 가서 호언장담했다. 과장 좀 섞은 것인데 상황은 점점 그렇게 돼 가는 듯하다. 참고로 나는 ‘나꼼수’의 PD다.

가장 이해하기 쉽게 순위로 상징되는 ‘성과’를 거론해 본다. 7월 초 팟캐스트(Podcast) 순위 국내 뉴스/정치 분야 1위를 기록하더니, 8월이 되기 전 대한민국 전체 1위를 돌파하고는 2위와의 격차를 갈수록 벌리고 있다. 한국은 좁았다. 9월 직전 전 미국 뉴스/정치 분야 1위 그리고 에피소드(회별) 1위 석권의 기록을 남겼다. 1등 기록은 특별하다. 대한민국 음원이 전 미국 1위에 오른 것도, 200위권에 든 것도 처음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청취자 숫자나 아이팟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저변을 따져 봤을 때에 미국 1위가 곧 세계 1위라고 평가한다.

‘나꼼수’가 전파되는 경로는 발행 부수 100만 부가 넘는 종합 일간지도, 가‧시청권 인원만 4,000만을 훌쩍 넘고 시청률도 상시 10%를 넘는 전국 단위의 지상파 방송도 아니다. 접근의 편의성은 고사하고 그 개념조차 난해한 ‘팟캐스트’다. 이는 애플의 스마트폰 내장 음원 플레이어인 ‘아이팟’(Ipod)과 ‘방송’(Broadcasting)이 합쳐 조어(造語)된 것으로, 이 신종 플랫폼에 실린 ‘나꼼수’는 유사한 종류의 스마트폰인 안드로이드, 또 웹을 통해 방방곡곡에 전파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스마트폰은 7월까지 대략 1,500만 대가 팔렸고 이 추세라면 연말까지 2,500만 대 보급이 무난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으니 시장성, 잠재성은 무한대라 하겠다.

과거 주류 언론이 독점하다시피 한 아젠다 세팅 또한 분산시켰다는 시각도 있다. ‘나꼼수’가 언급한 현안이 화제, 나아가 화두가 되곤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최대 ‘아킬리스 건’으로 통하는 BBK 의혹이 재점화됐고, 4대강 사업, 인천공항 지분 매각, 청계재단을 통한 재산 사회 환원 등에 가려진 ‘꼼수’가 들춰졌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통한 대선 행보, 곽노현 서울교육감 수사에 담긴 정치 검찰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헤쳐 ‘여론’을 자극했다. 고(故) 장자연 씨가 목숨을 던져 고발하려 했던 성 접대 의혹 또한 ‘은폐되지 않은 미스터리’로서 현존하게 된 양상이다.

‘사회’ 이슈만은 아니었다. 두상(頭狀)이 다른 사람보다 두드러져 칭호된 ‘큰 목사님’에 관한 비화 또한 ‘나꼼수’가 만들어 낸 화젯거리 중 하나다. 이뿐인가. 한국 개신교 각처에서 발산된 구설수도 공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간통 논란’ 김홍도 목사, ‘천안함 자폭설’ 김성광 목사, ‘빤스 발언’ 전광훈 목사, ‘기저귀 망발’ 고 임태득 목사 등. 이로써 이른바 몇몇 수구적 ‘기독교 정치 세력화’는 초동 단계부터 힘을 잃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도마 위에 올린 목사들의 교회 교인 수만 해도 만 단위가 넘는다. 그러나 누구에게서도 ‘목사님 비난’에 대한 반발을 듣지 못했다. 아마도 트집 잡을 여지가 없거나, 비판 의견도 수렴할 줄 알아야 한다는 진전된 의식을 품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받는다. “왜 일반인 대상 시사 프로그램에서 교회 비판적 내용을 다루느냐”고. 나는 한국 개신교 주류가 정당화의 표방 여부를 떠나 이미 보수 세력화돼 있다고 판단한다. 이 보수 세력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불온하기 짝이 없다.

사실 보수(保守)는 한자어 그대로 ‘지키는 것’이다. 그 가치는 통상 민족, 국가, 사회, 가정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으로 해석된다. 이를 위해 도덕, 질서, 안보, 자유, 인권이라는 가치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와는 상반되는 비리 인사의 중용, 불․탈법에 대한 관용, 외교․통일 분야 난맥 노출, 권력 남용, 약자 억압 등으로 퇴행적 국정 운영을 해 왔다는 비판을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집권한 한국의 보수주의 정치 세력-한나라당은 듣고 있다. 이로 인해 대의(大義)는 망실되고 소리(小利)에 집중했다는 비판이 야당 시민사회단체로부터 제기됐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의 현실만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대토지를 소유하는 거대 지주와 귀족 계급의 정당인 영국 보수당은 200년 가까이 성공적으로 존속하고 있다. 산업혁명과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선거권의 대규모 확대, 1․2차 세계대전과 같은 대외적인 환경의 변화, 대영제국의 몰락 등 급격한 정치적 환경 변화 속에서도 보수당은 집권하거나 제1 야당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그 이유를 ‘권력의지’에서 찾았다. 가치(기득권 유지) 추구의 지상 과제로 ‘집권’을 꼽았고, 이 ‘집권’을 위한 것이라면 이념적 원칙을 후 순위에 둘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데, 기본적으로 이념적 정체성을 가진 보수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애써 멀리서 그 근거를 찾을 필요가 없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를 자임하는 주류 집단이 일천한 이념 체계를 은폐하기 위해 유용하게 쓰는 수단을 보라. ‘진보에 대한 공격’이라는 일관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지 않나. 보수의 정당성이 진보에 대한 반대 논리로 강조되는 양상이라는 설명이다. 그 반대 논리에 있어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친일 반민족 행위로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처단을 받게 된 보수 세력은 분단 상황과 이승만의 미흡한 통치 기반을 이용해 자신의 처지를 피심판자 신분에서 심판자로 역전시킨다. 이 과정에서 친일 행위를 수사하는 조사관은 사회주의자로 몰려 처단되는 역풍을 맞는다.

이러한 불순한 양태는 되풀이됐다. 제주 4.3, 여수 순천, 한국전쟁 양민학살, 진보당, 민족일보, 인혁당 및 민청학련, 광주민주화운동, 각종 간첩단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 비판 세력 압살 및 통치 기반 강화 수단으로 보수는 반공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사회주의가 발호하면 맥락 없는 반공주의로, 반미 사상이 대두되면 친미 주장으로, 반독재 투쟁 와중에는 안보 또는 안정론으로 임기응변했다. 보수의 기풍은 결국 기회주의로 규정돼도 무리가 없다는 결론이다.

근현대사 과정 속에 한국 개신교의 양태도 마치 의지적이었던 것인 양 보수주의의 공식에 충실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식으로 식민통치에 부역했다. 해방 이후 이 같은 과거에 대한 추궁을 피하기 위해 의지적으로 반공주의를 강조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발원지로 상당한 개신교세가 형성돼 있던 38선 이북 지역의 경우 소련 공산군의 진주로 땅을 빼앗긴 지주계급이 대거 월남해 영락교회 등을 구심점으로 규합해 반공‧보수 정서를 발산하는 핵이 됐다.)

여담이지만, 최근 접한 한 고서(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서울:규장문화사, 1982), 55~56쪽)에서 잠시도 눈을 떼기 힘들었다. 본문 중 편저자와의 인터뷰에서 행한 한경직 목사의 발언이다.

“(전략)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지난해 제주4·3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도민 연대가 발간한 ‘서북청년단(서북청년회의 또다른 이름)의 실체를 규명한다’라는 자료집을 보면 이들이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는 명분 아래 백색테러를 노골화했다고 적시했다. 자료집은 또한,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은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공공연히 자행했다”며 “잡혀간 이들을 구하기 위해 가족들이 금품을 싸 들고 오기 때문에 나중에는 금품을 노리고 억지로 빨갱이로 몰아 잡아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백색테러를 일삼았던 단체의 중심이 영락교회라면 보수는 단지 경향성에 그치는 가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이들은 국가적 변란마다 안보 논리를 앞세워 독재 정권을 비호하거나 비우호적인 정권을 공격하는 양태를 띄었다.

더 근원적으로 살피자면, 한국 개신교의 ‘보수적 정체성’은 미국 근본주의 세력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미국이 열강을 자임하며 아시아 진출에 열을 올릴 때 선교사를 동원해 그 첨병 역할을 담당케 했다. 사실 한국 땅에서 활약한 선교사의 업적 특히 한국 사회 근현대화의 공헌을 모두 폄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쓰라 태프트 밀약’에서 보듯 미국은 그저 자국의 이익에 충실할 뿐이었다. 2차 대전 후, 통치권은 빼앗아 갔지만 눈 밖에 난 일본 왕의 보위를 보장해 준 계략도 마찬가지다. 행여 미국의 영향력이 축소될까 봐 해방 한국의 주도권을 임시정부가 아닌 (통치 기반 확충을 위해 제휴한) 친일파에 휩싸인 이승만 세력에게 실어 준 파행도 다르지 않다.

미국 때문에 살아난 이들이 또 있다.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침략 전쟁의 동참을 호소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일 ‘반미’ 노선을 표출했다가 꼴이 우습게 된 당시 한국 개신교 주류 목사들이 그렇다. 이들은 ‘참회’하듯 친미주의자로 거듭나고는, 공산주의를 새로운 주적으로 설정한 뒤 가열한 투쟁의 일도를 걷고 있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의 반공 이념은 이런 기회주의에 기반한다 하겠다. (지금은 어떨까. 이 고리는 여전하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을 초청해 ‘평화’ 운운하는 집회에 간증자로 세운 뻔뻔함을 보라. 미국 근본주의 개신교 집단을 배후로 둔 네오콘의 발호와 무관하지 않다.)

보수라는 이름의 잘못된 첫 단추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기풍을 왜곡했다. 우선 그릇된 성장 문화다. 친미‧독재 정권과 보수적 기풍의 개신교회 간 찰떡궁합은 놀라운 성장세로 표출된다. 다시 이야기해 압축 성장기 한국 경제와 개신교가 동반 양적 부흥을 했다. 경제성장률 면에서 압축 성장기에는 17.8%(박정희 8.5%, 전두환 9.3%)였고, 개신교 인구 비율은 1960년에서 1970년까지 10년간 약 500% 증가해 300만 명을 넘어섰고, 1977년에는 500만 명을 넘었으며, 1990년에는 1200만 명에 달했다. (물론 이 수치는 과장돼 있다. 1995년 인구센서스에서 자신이 개신교 신자임을 밝힌 사람의 수가 876만여 명이었다.) 물론 이 두 지표에는 개연성이 있다는 설명이 있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1960년대 국가가 주도한 개발 정책으로 도시로 대량 유입된 이농민을 주요 선교 대상으로 하는 목회 모델의 성공 사례로 해석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로써 한국교회의 성장 기준은 물량으로 고정됐다. 적은 교인 수, 적은 헌금 액수는 덮어놓고 ‘축복 못 받은 것’으로 낙인찍히고야 말았다.

또 하나, 정치 세력화다. 한국 개신교계 주류는 권력의 통치 기반을 자처하는 타락을 범했다. 주일 설교 시간에 국가 통치 시책에 대해 적극 지지하는 내용을 설파하고, ‘국가조찬기도회’를 만들어 교회의 이름으로 권력자를 축복하는가 하면, 관제 시국 집회에 연사로 나서 지원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정통성 없는 권력에 대해 주류 교회가 당위성도 명분도 없던 자신의 과오를 떠올리며 동병상련의 정을 느꼈던 것일까. 당시 상황을 회고한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어느 시기에는 로마서 13장 설교를 자주했는가 하면 노무현 정부 때는 그 설교를 들을 수 없었고 20년 전 국가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치던 그분들이 거리로 나서서 가상의 ‘공산 정권’과 투쟁하는 선봉에 서기도 하는 등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척척 합리화시키기를 볼 수가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정권 창출에까지 손을 뻗쳤다. 충현교회 소속인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가 출마한 1992년 대선 당시 나라사랑협의회를 정점으로, 이명박 소망교회 장로가 한나라당 후보로 나선 2007년 대선에서도 변종 조직인 ‘이명박 기도 모임’을 가동해 본격적인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참여정부 시기에는 대형교회가 나서 미군 철수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등의 운동을 벌이며 조직력을 다져 왔다. 또한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신자에게 주일예배 설교를 통해 우파 사상을 주입하는 일이 잦으면서 교회의 보수 세력화 또는 보수 정치의 외연 확대를 도모해 왔다.

이런 가운데 장로 대통령이자 ‘고소영 인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개신교인 중용 기조가 뚜렷한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도 개신교계의 정치 세력화 움직임은 끊이지 않는다. 전광훈 목사가 앞장 선 가칭 기독교자유민주당 창당 움직임이 그렇다. 나는 <미디어오늘>에 이런 해석을 남겼다.

“결국 한나라당이라는 우호적 정당이 있음에도 보수 개신교계가 정치 세력화하는 근원에는 ‘기득권 지키기’ 논리가 있다 하겠다. 개신교계는 장로 대통령이 주도하는 정부 여당에 실망한 게 많다. 무슬림이 막강한 자본을 앞세워 위력을 나타내고 다닐 게 분명한 이슬람채권법을 추진했고, 종교사학 권한 행사에 장해 요소인 개정 사학법을 원상태로 돌려놓으라는 재개정 요구에 미진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와중에 개신교계 주류 목사들의 기득권 논리에 대한 교회 밖에서의 비판 여론이 고조되는데다 개혁 압박마저 느끼고 있다. 교세의 약화, 재산의 사회 환원 또는 공적 감시 작동이 현실화되는 날만은 막고 싶은 것이다. ‘정치’는 그런 의미에서 유일무이한, 최후의 선택지로 보인다.”

‘나꼼수’가 왜 교회 문제를 들춰내느냐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대한민국에서는 누구에게나 정치 결사의 자유가 있지만, 그 결사된 정치 조직체와 조직체의 행위에 대한 비판을 피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없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다. 일련의 보수 정치 세력화는, 신학적 차이나 기독교 사회 윤리에 대한 시각차로 볼 문제가 아니다. 비행(非行)에 다름 아닌 퇴행적 정치 행위기 때문이다. 보수이건 진보이건 그 경향성 자체를 문제 삼고 싶지 않다. 그러나 교회라는 공적 아니 영적 조직의 불순한 동기에 따른 ‘세력화’는 타락에 다름 아니다. 이게 두 번째다. 마지막은 이거다. ‘졸라 웃겨서.’ 성희롱범은 정치 현장에서 쫓겨날 위기인데, 또 다른 성희롱범은 정치를 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기막힌 ‘역설’인가.

김용민 / 시사평론가

* <복음과상황>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