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행군’

2016-01-10     강만원

왕정시대에 왕이 되는 조건은 혈통이며 태어난 순서다. 같은 혈통이라도 1초라도 먼저 태어나고, 남자라면 응당 왕위계승서열 1위에 오른다. 자질과 능력은 사실상 상관이 없다.

당시는 ‘최상의 제도’ 였지만, 지금 우리는 역사를 통해 머릿속으로 기억하는 그런 제도에 대해서 ‘한물간 유산’으로 바라볼 뿐이다.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더 이상 ‘왕정복고’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유는, 왕정이 국리민복을 위한 바른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왕정이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배경은, ‘왕권신수설’같은 가상의 이데올로기에 갇혀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왕은 하늘에서 내린 자인가? 터무니없는 소리다. 사실인즉, 그런 제도는 왕정시대의 기득권자들이 갈고닦은 ‘탐욕의 빌미’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라고 다르지 않다. 가톨릭의 교황제도는 말할 것도 없고, 개신교의 목사제도 역시 하나님의 그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특별한 권능을 주셨다는 ‘성직주의’의 오류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신약성경 어디를 봐도 ‘성직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성직주의의 빌미가 된 ‘외식’을 무섭게 질타하셨을 뿐이다.

‘하나님이 사제나 목사에게 특별한 권능을 주셨으며, 그들은 태초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런 허구, 이런 오류, 이런 교만, 이런 탐욕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가 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가 아닌 종교는 당연히 기독교일 수 없다.

‘성경적인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의 지체를 사역자로 세우기 위함이며, 교회의 지체는 성도다. 따라서 교회에서 성도가 사역자를 세우는 것이 성경적인 제도다. 물론 ‘사역자’라는 말이 요즘 한국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목사의 종노릇하는 ‘봉사자’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성경 어디에 ‘교단’에서 사역자를 세우라는 말이 있던가? 디모데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조차 디모데를 ‘감독’(목사, 장로)으로 세우지 않았다. 교회에서 교인들이 의견을 모아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장로들이 교인들을 대표해서 디모데를 사역자로 세웠다.

무척 험한 길이 되겠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주께서 동행하시고 주께서 인도하시기 바랄 뿐이다. 교회가 정치목사들의 탐욕과 타락의 ‘소굴’이 되지 않고, 주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신앙공동체이자 구원의 터가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날 교회권력의 상징인 교단이나 목사가 아니라, 모름지기 교회와 성도가 신앙의 주체가 돼야 한다. 이제... 뜻을 같이 하는 형제들이 지금처럼 ‘강 건너 불 보듯’ 할 일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지 동참하고, 동역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침내 때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감동이 가슴을 울리지 않는가.

교회가 진정 교회가 되는 첫 걸음은 목사(사제) 권력의 타파다! 물론 이 길은 개혁이나 갱신을 넘어, ‘교회 혁명’의 불길에 뛰어드는 것이며, 십자가를 져야하는 고난의 행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강만원 / <아르케 처치> 대표,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저자, <루나의 예언> 역자, 종교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