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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삶의 정체는 보이는 기술획득의 초보수준이다
icon 안성자
icon 2009-05-07 02:22:30  |  icon 조회: 5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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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관심과 사랑으로 지켜보아주시는 분들의 댓글에 답변 드린 내용을 소개 해 볼까합니다. 먼저 정성스런 댓글 주신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우려하시는 부분을 소신껏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첫 번째 “하나님 또는 교회에 대하여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리스도의 참 복음으로 받아 드리기가 좀 거북스럽다는 부분입니다.” 님 이 보시기에 제 글속에서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인간적인 사고나 판단으로 하거나 한다는 것으로 보시고 말씀하시는 것 같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인간이 어떻게 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제가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은 순수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말씀하신대로 인간 스스로 어떻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알기 시작한 것은 벌써 수십 년 전에 인간의 힘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된 때부터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겼기에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 걸어갔습니다.

한 동안 하나님의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아니하려고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얼마동안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기도의 응답도 들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그런데 웬일입니까? 삶은 날이 갈수록 기도하면 할수록 열심히 하면 할수록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답니다. 그런데 본인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부분이 있었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환상을 보았다 응답을 받았다 좋아하지만 본인은 아무런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당시 본인의 처지를 한탄하는 자괴감에 빠져 늪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삶은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세상에서 인간들에게 당하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어려워 하나님을 찾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잘 찾는데 나는 찾을 수 없으니 어찌된 일이냐고 여쭤보기를 수없이 많이 했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장소로 옮겨주시곤 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그렇게 옮겨간 곳들이 나의 수준을 높이는 작업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처음엔 하나님의 음성을 초인처럼 듣는 초보적인 사람에서부터 말씀, 성경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 말씀과 은사를 겸한 사람들 갖가지 은사를 사용하는 기발한 사람들, 찬양을 많이 하는 사람들 말씀과 찬양을 겸한 사람들, 영성의 입문을 알게 하는 곳, 더 깊은 영성을 하는 곳 등 수많은 세월동안 될수록 많은 과정을 터득케 하셨습니다.

그러는 과정 중에 본인의 삶은 거의 초토화가 되어져 갔답니다. 당시 본인의 느낌은 본인의 육의 껍질을 한 꺼풀에서 시작하여 수십 꺼풀을 벗겨 내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육의 껍질이 벗겨져 가면서 조금씩 제자신이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하루에도 굵직한 사건들이 생겨나지만 도저히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 속에서 고통을 통과할 때 나의 육의 독소들이 빠져나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한만큼 독소들이 빠져 나가게 되고 빠져 나간만큼 벗겨지게 되고 벗겨진 만큼 나도 모르게 분별력이 상승되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새로운 생명으로 자리가 채워지는 다시 말해 보이는 것의 대가지불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가치로 쌓여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보이고 들리고 현상적인 반응은 일차원적인 획득이라면 보이지 않는 가치는 보이는 것들을 통하여 가치를 얻는 2차원적인 획득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해서 찾기 위하여 고통의 몸부림을 쳤는데 결국 2차원적인 가치획득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 고통의 정체가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현상이 나쁘거나 고통과 연관되는 것들은 회피하거나 본인과는 상관이 없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고라면 본인만 손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통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본인도 처음엔 다른 분들과 같은 생각으로 얼버무리려는 자세였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우주의 많고 많은 생명체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치밀하게 움직이실까 고민하던 차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기준이시다. 모든 정상의 의미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가도록 설정이 되어있으며 그러기에 나아가는 방향 또한 하나님의 운행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한 것들을 기준으로 만들기 위하여 오늘도 과정을 진행하시고 계신다.

그러면 그 많고 많은 움직임을 어떻게 작동하실까? 우주의 공기는 하나님의 기준의 공기를 향하여 진행하고 계시고 그 기준에서 미달된 만큼 문제가 발생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불협화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어 졌답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모두 정상적인 하나님의 기준을 만드는 도우미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우리를 만들어주는 그 도우미들을 모두 싫다고 쫓아버리고 없애지 못해 야단이었다. 그러한 행위들은 결국 육으로 잘 보이고 잘 들리는 사람들이 정답을 알아내어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었다. 그들이 잘 보이는 것들은 보이는 그대로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망하게 하는 것으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 보이고 잘 들려 정답을 알게 한 사람들이 엄밀히 보면 지금의 앞서가는 사람들이나 지도자들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보이고 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당장에는 길이 보이지 않아 안 되고 당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면서 2차원적인 가치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은 당연히 당장 보이고 잘 들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지배를 당하거나 빼앗기는 일들이 진행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보듯 일차원적인 획득은 당장에는 앞서가는 것 같고 좋아 보이지만 결국 이차원적인 가치를 획득한 것과는 의미가 다르고 그 길은 참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한 정체는 참이 만들어지게 되면 서서히 가짜의 정체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 해석하면 지금 나타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은 그러한 가짜의 표출이 시작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위에서 보듯 그러한 내용들은 성경에 기록된 것들이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리 할 것입니다. 궤변이다. 성경의 근거를 들이대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도 할 것입니다.

물론 잠깐의 표현으로 충분한 이해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앞뒤 사정을 볼 때 하나님으로 비롯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수십 년을 걸어오면서 걸음 걸음이 하나님의 걸음이었습니다. 본인의 모든 삶을 육으로는 전혀 보이고 들리지 않기에 본인의 위치를 자연과 같은 위치로 전락 시켜 버렸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의 오류를 인정하기에 출발음의 선택마저도 풀이나 나무처럼 하나님의 속도에 맞춰드린 모든 것을 수용으로 일관된 그런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그러한 경지를 가게 된다는 의미는 성경은 물론이요 성령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함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요.

다만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들은 영원히 성령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영원히 와는 거리가 먼 필요 할 때만 의지하는 일시적인 방편이라고 보아야합니다. 그들은 보이고 들리는 장점 때문에 성령님을 영원히 함께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재료들을 모두 피하거나 버렸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님을 자신의 것이라고 한다면 토를 다시는 분이 계실까보아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기준으로 설정된 환경에서 육체의 오류들을 빼어내는 작업은 당연히 하나님과 함께이고 하나님의 속성이 스며들게 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므로 통과되는 만큼 하나님을 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성령님을 필요할 때마다 요청 드려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24시간하나님의 틀 안으로 들어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4시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지요. 반면 성령님께 요청 드리는 것은 본인의 보이고 들리는 것에 따라 자신을 지켜달라고 요청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틀이 아니라 본인의 보이고 들리는 틀에 맞춘 것입니다.

본인의 보이고 들리는 기준은 오히려 인간의 차원이고 하나님의 차원과는 반대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육에 의한 것인데 참이라고 착각을 해버렸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의 모순을 인정하고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겨드렸으면 되었을 것을 보이고 잘 들리는 것 때문에 그리되었습니다. 본인은 그러한 것들을 육체의 기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보이는 기술의 판단으로 고통과 귀신을 쫓아버렸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방법은 일시적이고 하나님, 성령님의 체질로 바뀌어 진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또 육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리 열심을 다 해도 목마를 수밖에 없답니다. 보이는 것으로는 절대로 채워 질수가 없답니다. 육은 육 일뿐입니다. 가치는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로 채워야 채워지는 것인데 일차원적인 보이는 것을 채우려 하기에 안 채워 질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날마다 성령님을 떠나거나 말을 하지 아니하면 이상하다고 합니다. 이미 그렇게 입에 달고 다니지 않아도 하나님, 성령님께서는 자신 안에 크게 자리 잡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네가 내안에 내가 네 안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쯤 되면 옛날의 자신의 모습은 어디로 가버리고 하나님 때문에 살고 있게 되며 모든 포커스가 하나님입니다. 앉으나 서나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나님 얘기만 하게 됩니다.

본인이 글을 쓰는 것도 그러한 하나님을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같답니다. 글로써 표현하고 쓰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저를 그동안 빚어주셨기에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본인도 아직 그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중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기에 가끔 실수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빨리 가게 된 연유로 총대를 멘 것뿐이랍니다.

본인 또한 수십 년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의 손을 잡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답니다. 아마 지금도 믿음이 좋다고 하는 분들 대부분은 그렇게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일초라도 떠나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주장합니다. 성령님을 자유 하라고 말입니다.

또 본인의 글을 많은 분들이 혹시라도 인간적인 이론의 지식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본인은 과거엔 이러한 비밀들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다만 본인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저당 잡힌 사람처럼 따라갔더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되어졌답니다. 손안에 있던 모든 것들을 하나 둘 놓아버렸더니 자꾸만 내면의 가치가 상승되어 가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항상 포만감에 젖어 살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안 성자 www.trueroad.co.kr
2009-05-07 02: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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