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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저를 붙잡고 있는데 어떡하죠?
icon 안성자
icon 2009-05-07 23:40:01  |  icon 조회: 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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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께서 주님이 저를 꽉 잡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성령님으로부터 자유 해지느냐고 성령님으로부터의 자유가 진정자유냐고 물어 오신 답변을 드려볼까 합니다.



님 의 논리라면 나는 원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억지로 붙잡고 계시는 것으로 들려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분들도 하나님께서 꽉 잡고 계시는지 질문을 드리고 싶군요. 하나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에게 선택의 자유의사를 허락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고 보니 본인의 자유의사가 아니면 도저히 끝까지 갈 수없는 힘든 길이기에 그러실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라고 생각도 했습니다. 언제어디서나 자원하는 자에게 눈동자처럼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고 계십니다. 님께 서는 스스로 붙잡히기를 자원했다는 표현이 맞다고 봅니다. 그래서 본인은 언제까지 부모의 옷깃을 붙잡고 있을 것이냐고 반문을 드린답니다.



오늘은 진정한 자유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더러 자유 하라고 하면 방종해야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더구나 성령님을, 기도를 자유 하라고 한다면 기겁 을 합니다. 떠나라는 의미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참 자유의 의미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육으로 의지하던 것과 기도 또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의 행위이므로 그렇게 육으로 접근하던 것들을 영으로 바꾸라는 의미입니다. 육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놔버리라는 보이는 육에서 자유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영으로 이동하라는 의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육에서 자유하게 되면 영으로 이동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인간의 육으로는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육에서 영으로 전환해야만 제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채워지지 않고 영원히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유의 참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육이 아닌 영으로 연결 된다는 의미입니다. 육을 놔버리고 가치로 이동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부모에게 육으로 의지하거나 육으로의 만남은 영원히 의지하는 것에서 떠 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육에 있을 때 부지런히 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영으로 될 때만이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영은 모든 것들로 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육으로 의지만 하고 살았던 습관을 놔버리고 영이 되어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하게 되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모든 것을 전수받아 완벽하게 스스로 부모님처럼 되는 것을 말합니다. 가끔 인간적으로도 스스로 잘 헤쳐 나가게 되면 때로는 부모의 도움이 귀찮게 여겨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간혹 어린아이들이 잘하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해 보겠다고 앙탈을 부리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어떤 것에서 참으로 자유하기까지는 수많은 부딪힘과 아픔을 통하여 드디어 한계선을 넘게 되는 때부터 자유의 맛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보이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승리입니다. 물론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과 함께 라야 만이 가능케 됩니다. 그 때부터는 걸리는 것도 손에 질것도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도 과거의 보여 지는 것으로의 풍요의 차원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보이는 것이 아무리 풍요로워도 느껴지지 못했던 포만감에 항상 젖어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보이는 것들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보이는 것들로부터의 심각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꿔졌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는 보이는 것 뒤에 가치를 보게 될 수 있게 됩니다. 인생은 자유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날마다 자유를 향하여 자유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쉽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자유 하는 것도 어른이 되어야 가능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는 말 할 것도 없으며 육에서 영으로의 이동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유는 하루아침에 되어 지지 않습니다. 점진적으로 되어져갑니다. 어쩌면 어린아이가 성장해가는 것과 같이 자유도 대가 지불한 만큼 점진적으로 획득하며 가게 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유하지 않겠노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참 자유의 맛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의지하는 것을 떠나지 못하는 한은 자유의 길과는 멀어집니다. 어쩌면 그처럼 스스로 의지하고 속박당하기를 자원하여 그 상태를 즐기고 있다는 표현도 맞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육은 오래 머물러 버리면 속박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체질화를 만들어 자기의 현주소로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속박의 상태이면서도 속박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만이 최고라고 여기게 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 것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 일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인간의 여정은 혼자태어나 결국 혼자가 되어 지는 길로 가게 됩니다. 태어나 살아가는 과정은 다시 인간적인 혼자가 아닌 하나님의 속성을 덧입은 혼자가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바로 그것이 참 자유인이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유의 맛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또한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가 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유 하기 전에 먼저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함께 자유 해야만 합니다. 어찌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자유하게 되면 하나님을 자유하게 되는 것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려운 것은 인간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또 그 가운데서 어려운 것은 혈육입니다.



결국 인간은 모든 관계성은 물론이요 보이는 것들에서 자유해야만합니다. 자유의 참의미는 육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가치와 다시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육을 통하여 가치를 만들 때마다 통과되는 부분에서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 부분에서는 다시는 잡히지 않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는 매이지도 않게 됩니다. 자유가 그렇게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보이는 것들을 통하여 참 자유를 만들어 나가야 만이 참이 될 수 있습니다.그것이 자유와 생명을 위한 대가지불이고 대가지불만이 정직한 것이고 진실입니다. 자유는 된 만큼만 되어 지기 때문에 거짓을 부릴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식들이 성장하면 홀로 살아가라고 분가를 시켜줍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가를 원치 않습니다. 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의 부모는 낳아주고 길러주는 살아있을 때만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영원히 도와 줄 수 없다. 살아 계실 때 부지런히 부모님의 모든 것을 전수받아 자유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릅니다. 육의 부모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십니다. 모든 것입니다. 영원하십니다. 육의 부모가 줄 수 있는 것보다도 비교 할 수 없는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말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면서 정작 육의 부모님께 하는 것과는 다르게 행동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섭섭해 하실 것 같습니다. 당신을 온전히 육의 부모님보다도 대접을 못해드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육의 부모에게는 하루 빨리 독립을 원하면서 하나님께는 영원히 의지만 하려고 하니 말입니다.



본인도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들을 키워보니 스스로 자립해서 부모의 도움 없이도 잘살아가는 것처럼 뿌듯한 게 없답니다. 어찌 보면 자식은 부모에게는 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식들이 잘 자라서 스스로 제 갈 길을 잘 가주는 것이 부모로서는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답니다. 그런데 아직도 사람들은 자유는커녕 더 의지만 하려합니다. 누구라도 자유 해야 한다고 하면 난리가 납니다.



또 자유하지 못함의 의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하나님의 힘만 의지하여 믿는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됩니다. 모든 것들을 성령님을 의지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자기 것으로 만들어질 때까지는 잠시도 멀리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언제까지나 의지만 계속한다면 영원히 자유 할 수 없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스스로 의지하지 않아도 언제어디서나 마음만 드리면 우리에게 필요 하실 때 역사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을 오히려 나에게 필요 할 때마다 찾고 의지하기에 놓을 수가 없게 됩니다. 처음부터 의지하고 찾았던 습관이 오래 길들여져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언제어디에나 우리를 보고 계시는데 자신들이 필요 할 때 성령님을 찾으면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길과는 반대로 가게 됩니다. 육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가게 되면 더 잘 가게 하시고 제대로 가게 됩니다.



어린아이를 키워보면 알게 됩니다. 혼자 걷는 연습을 시킬 때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손을 놔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모험을 시도하면 이내 빨리 혼자 걷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 부지런히 하나님의 속성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때가되면 성령님의 손을 놓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떠나거나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이 부모와 더 빨리 하나가되는 길입니다. 그 길이 부모의 모든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빨리 만들게 됩니다. 그러한 관계가 결국 더 건강하고 서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자유의 의미는 한계의 지점을 통과한 것입니다. 한계 안에서의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자유 한다는 의미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자유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은 참 자유가 아닌 영원히 신세만 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인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식들이 스스로 잘 살아가기를 걱정하고 바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언제까지나 부모를 의지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든다면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는 것을 자유라고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어렸을 적엔 부모를 의지해야만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스스로 자유 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언제까지 부모에게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엄격히 말하면 자유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매인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으로의 맺음은 육이 존재 할 때만 가능한 것이므로 그것 또한 영원한 연결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영과 연결이 되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어쩌면 “네가 내안에 내가 네 안에”의미가 되겠지요. 그러므로 영으로 연결 되는 것은 떼려야 땔 수없는 관계가 되어 지게 됩니다. 하나가 되는 매임의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이제라도 모두 서둘러 자유 하는 길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안 성자 www.trueroad.co.kr
2009-05-07 23: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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