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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
icon 안성자
icon 2009-06-14 06:48:34  |  icon 조회: 6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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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늘 상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인간이 생명의 하나님만 닮게 된다면 이 세상을 장악하는 힘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해본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차원의 입장에서 어떻게 닮아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이는 것들을 성실하게 넘을 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인의 입장으로 서 계신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더 낮은 차원으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러 높은 차원으로 가야만 한다. 그 차원은 눈으로 볼 수없는 차원이며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차원이다.

보이는 차원을 느끼는 차원까지 발전시키려면 쉬운 일이 아니다. 절대로 거짓으로는 안 된다.느끼는 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동안 갔던 길은 죽지 않고도 느끼는 기술을 터득하여 진행해오고 연맹해 온 것이다. 그러나 그 기술은 참이 아니었기에 언젠가는 들통이 나게 되어있었다. 사람들은 방향을 잃어가고 있다. 바로 인간의 한계에 도달된 것이다. 그러한 한계들의 폭발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 요란하게 들려올 것이다.

그동안 불행하게도 인류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채워야 할 것들도 보이는 것으로만 굳이 채워야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정작 가야할 목적지에 도착되지 못하고 있다. 보이는 것들은 일차원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은 그 다음차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보이는 것으로는 도저히 채워지지 않으며 느끼는 가치로만 채워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그 상태에 머물러있다고나 해야 할까? 그처럼 사람들은 아직도 일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보이는 차원에 머물러 있는 한은 영원히 목마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아무리 채워도 갈급증을 호소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목마름의 해결을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했던 저해요인들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인간의 보이는 그대로만을 인정하고 판단하여 보기에 좋지 않는 것들은 피하고 생략하면서 진행해 버렸다. 인간의 보이고 들리는 육의 속성 때문에 대가 지불 없이도 육의 느낌만으로도 대치 할 수 있었으며 그 느낌을 참이라고 믿고 진행 해버린 우를 범해버린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도 거의 모든 것들을 그런대로 장악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을 믿는 방법도 하나님의 능력을 그와 같은 방법으로 느끼고 활용하여 지금까지 진행해 온 것이다.

둘째 결국 그 길은 보이는 현상을 따라가게 되고 목적도 보이는 결과만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길은 처음 인간의 목적인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지는 길이 아니고 인간은 제쳐두고 환경을 따라가는 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육을 사용하여 쉽게 얻어지는 결과들은 결국 보이는 외형만 만들어지는 육의 종착역에 도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보이는 그대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그것들을 이루기 위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많은 기술개발을 할 수 있었다. 인간의 보고 들리는 육감의 발달로 피하고 생략하는 기술도 놀랍게 발달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 아직도 그 길이 옳다고 고집하며 그 길만을 좇아가고 있다.

넷째 육은 보이는 현상에만 관계되는 것이며 육을 빈번히 사용해 버리면 육에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속성과는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어느 사이 하나님도 육만 닮아지는 기술로 오래 동안 겉만 닮아지는 길로 가버렸으며 참 하나님을 닮는 길과는 멀어져버렸다.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러한 방법이 최고라고 진행해 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아직도 보이는 것들로의 실망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가치의 참 맛을 아는 경지에 도달한 모델이 없었다. 그러므로 실망이 의미를 몰랐을 뿐더러 아직도 보이는 현상만을 고집하고 있으며 참 가치의 의미 또한 모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이 변하는 길을 가지 못하고 보이는 현상만을 따라가게 된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본인이 직접 실망을 하는 과정동안에 가치를 만들어나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실망의 대가 지불을 통해야 만이 얻게 되는 것이며 그 길이 원래의 의도대로 자신이 만들어지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보이는 모든 것들의 참 의미를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잘못된 길은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결국 육의 발전은 참이 아니기에 언젠가는 썩게 되어 소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타난 볼 수 있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보이는 것들은 모두 육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차원만 고집하고 옳다고 가게 되지만 육은 언젠가는 육으로 끝나게 되며 반드시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언젠가는 소멸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세상의 요란함은 바로 그러한 징후들의 나타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목적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방법으로는 결국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보이지 않는 느낌의 차원에 도달되기 위해서는 보이는 차원이 무엇인지 이론이 아닌 실제적인 앎이 중요했다. 보이는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보이는 것들의 접촉을 실제로 해 보아야만 된다. 더구나 보이는 현상들의 증거가 없는 느낌의 차원은 이론이나 얼렁뚱땅한 방법은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것들로부터 실망을 직접당하거나 체험해보아야만 진정한 실망이라 할 것이다.그런데 사람들은 행동하기 전에 육의 느낌으로 실망하는 길을 피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보기에 실망 할 것이 당연한 사실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 길을 자초해서 가느냐며 실망하지 않을 길을 골라서 자원해서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렇게 골라서 가다보니 결국 그 길은 영원히 갈증이 해결이 안 되는 길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몰랐던 것이다.

인간은 그 여정과 목적은 알고 보면 실망하기 위하여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처음엔 보이는 현상만을 인정하고 보이는 대로 좇아가기에 그 끝자락에는 당연히 실망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보이는 것이 다인 줄 알고 당연히 보이는 것들로 만족을 이루려 했지만 영원히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당하는 실망이 실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망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그동안 인간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실망의 의미는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게 되는 의미일 것이다. 그 지점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 영원히 사는 존재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모든 보이는 것들과 부딪힘을 통하여 보이는 실체를 파악해야하며 실망을 생명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모르는 부분이 남아있다면 호기심이 남아있다는 것이며 호기심이 남아있는 한은 실망도 생명도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조차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육의 성질상 정답을 미리 알게 되므로 그 실력을 발휘하여 이론이나 지식의 전달로 피하거나 버려버리거나 직접 당하는 기회들이 생략되어버렸다. 그러한 매체를 통한 실망들을 미리 알게 되어 참 실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해버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로인해 아직까지도 실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참 의미는 실망을 통하여 실망을 거치는 동안에 자신을 부인하고 고쳐지게 된다. 보이는 것은 육이요 보이지 않는 가치는 생명인데 보이는 것을 당하면서 보이지 않는 가치로 만들어 채워야 진정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을 만드시는 것이다. 그런데 실수와 실망을 통하여 만드신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몸으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가기까지는 너무 많은 괴리는 당연한 것이다. 당연히 많이 고쳐져야 만이 하나님의 경지까지 가게 되므로 실수나 실망은 당연한 것이다. 더구나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은 출발부터가 실수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목적과 인간의 목적이 다른데 실망과 실수가 당연할 수밖에 없는 길을 실망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다른 길을 간 것이다. 인간의 육은 실수나 실망을 통해서만이 고쳐지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모두가 실망과 실수를 기피하는 바람에 그러한 실망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 도저히 실망의 늪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들이 보이는 눈으로 옳고 그른 길을 판단하여 간 것이 큰 실수라는 것이다. 그들은 찾는 답은 오답이 당연하며 진정한 답은 그들 자신이 변화되는 길이며 실망을 겪는 과정 속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보이는 차원에서 보이지 않는 차원의 이동은 역시 과정을 겪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 답을 아는 것은 실망의 길을 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가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실망하는 과정을 충실히 하는 동안 내면의 가치가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로 연결이 되는 것이었다. 처음엔 진정한 실망은 인간에게 중요한 일인 것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보이는 모든 것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을 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융통성이 없고 바보 같은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렇게도 바보같이 당하기만 하여 보기에 딱하고 안 되었던 그 길이 참의 길이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자신들도 알지 못하고 간다. 어느 정도 실망을 거치게 되면 불순물이 빠져나가게 되고 눈이 밝아져 분별이 더 명확해지며 그때부터는 말없이 실망을 찾아 나선다.

가면 갈수록 점점 이 세상의 참의미를 알게 되고 자신의 내면에 가치가 쌓여지고 자신의 눈이 점점 밝아지게 된다. 그 길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닮는 길이고 생명의 길이다. 직접 해 보는 것만이 자신의 가치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가되면 보이는 것들의 실체를 알게 되고 보이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실망 때문에 두 번 다시 보이는 것들을 인정하지 않게 되며 따라가지 않게 된다.

세상에 연륜이 있는 분들 중에는 보이는 것들로 부터의 체험이 많이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한 체험을 인간의 힘에 의해서만 의존하여 왔기 때문에 체험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그 길을 따라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수없이 많은 실망의 사건들을 만나게 하신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실망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만나게 된다. 가장 많이 실망하는 것들은 인간을 통한 것들이었다. 결국 다양한 인간들의 접촉을 통하여 인간의 실체를 알게 된다. 인간으로부터의 많은 실망을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보이는 것들의 실상을 터득하게 되면 드디어 보이는 것들의 실상을 알게 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러한 과정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시는 것은 물론 실망을 당하고 극복한 후에는 자신의 결핍이 고쳐져 있으며 그러한 과정동안에 내면에 가치로 쌓여간 것이다. 가치가 쌓여간 만큼 눈이 밝아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따라가게 되면 이세상의 것들은 허상이며 어차피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보이는 육의 의미와 보이지 않는 가치인 생명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런데 또 신기한 것은 보이는 것으로는 그렇게 만족함이 없던 것이 어느 사이에 포만감에 젖어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동안 보이는 것들을 보이지 않는 가치로 바꿔치기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의 포만감 때문에 스스로 바보처럼 살았다고 고백하지는 않게 될 것이며 이미 목적지에 도착이 가능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들도 보이는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보이지 않는 가치를 만들어 나갔다면 보이지 않는 가치의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내면이 채워지면 외형도 따라서 채워지게 된다. 그리고 설사 그것들이 채워진다 해도 그것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게 된다. 그 차원은 이미 벌써 누려본 것들이며 그로인한 실망까지도 해 본 것들이기에 그것들의 실체와 실상을 알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것들에 만족하고 있거나 향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심해 보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가치는 먼저 행위가 이루어진 다음에 오는 다시 말하면 이 세상 보이는 것들의 대가 지불 후에 보이지 않는 가치로 바꿔서 내면에 채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는 것은 한 차원 낮은 것이고 대신 느끼는 것은 그 다음 차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채워진 모든 것들만이 영원한 것들이 된다.



안성자 www.trueroad.co.kr
2009-06-14 06:4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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