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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목사, 분열의 씨앗인가? 기사,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icon 김창선
icon 2011-06-02 08:41:35  |  icon 조회: 6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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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를 비롯하여 여러 기독언론 매체를 만나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들이 많아 자주 방문합니다. 그러나 가끔은 마음이 어수선한 글을 접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영희 목사, 분열의 씨앗인가?> 라는 기사 인지라 내용을 여러번 읽어 본 후 느낀바를 몇 자 올립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분석하여 올리신 글에 대한 저의 부족한 편견일 수도 있겠죠. 그러기에 많은 망설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독자들에도 의견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는지라 서로 나누어 보는 것도 괜찮다 싶어 부족한 글이지만 올리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내용은 전반적인 분량에 비해 기실 표현코저 하는 알맹이가 너무 두리뭉실 한 반면 오직 ‘분열’이라는 단어 하나만 출렁거리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거기에다 곁길로 빗나간 것은 언론의 자유라는 그럴 듯 한 펜이 아닌 가시채를 들고 특정인의 지나간 일들을 필요 이상으로 언급하며 은근히 건드리는듯한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기왕지사 ‘분열의 씨앗인가?’ 라는 멋진 제목을 내 걸었다면 그에 걸 맞는 심층취재와 언론 양심에 따른 다양한 모양의 분석도 반드시 겸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신대의 교수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정치를 논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성경에 기초한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는 교회의 권력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의해 행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록 집단의 결정도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개인의 결정보다는 오류를 덜 범한다는 것이 장로교회의 신념이다. 특히 장로교회 는 대의주의, 합헌주의, 관계주의라는 세 가지 큰 정치원리를 갖고 있다” 라고 강조했습니다.

알아 듣기 쉽게 꼭꼭 씹어서 넣어 주는 장로교회 정치의 3대 원리를 되새겨 보면서 과연 본 기사가 담고 있는 그 거창한 분열의 씨앗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어떻게 뿌려 졌는지를 위 원리에 맞춰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지면이 많지 않기에 거두절미하고 간략하게 짚어 봅니다.

첫째, 대의주의, 한 마디로 말해 전체의견을 수렴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설명하면 어느 특정 회원 목사의 면직이라는 실로 중차대한 사안을 결정을 할 때 어느 개인 단독 선포였느냐 , 아니면 약간 모양새를 갖춘듯한 소수 임원회만의 결정이였느냐, 아니면 말 그대로 ‘대의’ 를 근간으로 한 전체의견이 어떤 절차와 방법으로 받아 들여지고 결정 했느냐 입니다. 이미 다 알려진 사실대로 이영희 목사님의 면직 결정은 대의주의를 아예 무시한 소수주의(?) 형태의 임원회에서 결정되었기에 화근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하여 짚고 넘어 간다면 그 소수의 임원회만 모여 의논하고 노회장 단독으로 선포해 버린 그 때 ‘문제 여성의 육성 녹음 테이프’ 가 확실한 증거로 채택되었다는 구차한 변명을 무슨 노획물처럼 첫 단계에서 펼쳤습니다. 그러나 “그 녹음 테이프를 직접 듣고 확인한 나머지 급히 면직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는 그 때 그 임원진들은 이제 와서는 그 누구도 녹음 테이프의 ‘녹’자 자체도 꺼내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왜? 녹음 테이프라는 게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 마다 이 거짓된 증거물에 대하여 양심의 소리를 하라고 여러 경로를 통해 말하기도 하고 글로 표현을 해 보지만 모두가 한결같이 약속이나 한듯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진실보도를 추구하는 언론이라면 바로 이러한 논쟁의 불씨가 무엇인지 진위를 파악해 보려는 작은 노력이라도 기울여 봐야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처럼 많은 분량의 내용에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이는 모양으로 참고 기사 제목까지 착실하게 붙여 줄 수 있는 성의라면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이 테이프 존재 자체에 대한 언급 한 줄이라도 해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녹음테이프, 그 자체는 이미 다 알려진 공개된 비밀입니다.

두번째, 합헌주의 입니다. 아무리 죽을 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이미 정해 놓은 법질서 안에서, 그 테두리 안에서, 사사로운 감정이나 외부의 입김작용 같은 것 없이… 그야말로 무색투명 깨끗하게,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이 합헌주의 아닙니까? 이영희 목사님은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당회가 노회에 보고 했고 이영희목사님의 그 노회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법 적용 범위 자체가 법을 어겼을 때도 그 법에 따라야 되느냐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법적용에 대한 거부, 그 자체는 법개념 아래서 자기보호를 말 할 수 있는 권리이며 이 것은 엄연한 합헌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노회의 초법적 적용, 그 자체가 불법이요 분열의 씨앗이 되는 것이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정해진 법 질서에 순종하겠다’ 는 그가 분열의 중심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은 앞 뒤가 안 맞는 모순입니다. 거기에다 곁들여서 거짓증거물까지 드미는 것이 과연 바른 교회정치가 이야기 하는 합헌주의 일까요?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과거 권력기관의 초법적 적용에 대해서 거부하며 자기의 양심에 따라 움직였던 사람들이 실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잘못된 것을 다시 바로 잡으려는 정의 사회 구현 정신이 바탕이 되어 억울했던 그들에게 단 한번이라도 소명의 기회가 주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용기 내어 일어서도록 서로 돕고 또 궁극적으로 함께 승리했던 것이 어제 오늘의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번째, 관계주의 입니다. 즉 당회, 노회, 총회등 상호 보완하고 협력하며 이끌어 가는 유기적 관계주의입니다. 더 핵심적으로 한 마디 딱 부러지게 말한다면 ‘치리’ 라는 중차대한 문제는 어느 특정 ‘회’가 단독 결정해서도 안 되지만 설령 했다 하더라도 해당자는 물론 그의 뜻을 이해하며 돕는 동료들이 얼마든지 상소할 수 도 있고, 또한 상위기관은 그 것을 당연히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더 공정한 잣대 적용을 위한 재판국과 치리회를 운영, 행여 실수는 없었는지 행여 지나치지는 안 했는지 잘 살펴 보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바로 상호 관계주의 입니다. 본 기사에서는 이 관계주의 정신과 그 과정을 그 얼마나 살펴 보고 다루었는지는 여러분들이 더 아실 것입니다.

만약 누가 저에게 이와 같은 세 가지 원리에 한 가지를 더 보태보라고 한다면 저는 ‘덕목주의’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덕을 세웁시다. 찢고 나누었다가 다시 꽤매어 주는 것도 하나님의 일 입니다. 이제는 서로 이해하며 도와야 할 때입니다. 바로 이 것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와 예수의 싸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장로교회에 예수교장로회가 있고 기독교 장로회가 있으며, 침례교회는 기침과 예침이 있고 성결교회는 기성과 예성, 그리고 순복음교회는 기하성과 예하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나뉘면서 발전되어 왔고 그 가운데서 상호 용납하고 교류하며 지내 옵니다. 역기능도 있었지만 더 많은 순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누구 하나 이들에게 대 놓고 “그 때 그 시절 그 분열의 씨앗은 누구인가?” 라고 말하는 사람도 지금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소위 그 분열 속에서 살아 왔고 그 토양안에서 성경을 배우며 먹으며 커 왔습니다. 오늘날 목회현장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목회자들은 ‘그 분열 분위기 자체’에서 성장해 온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기독언론매체도 그 분열이라는 것을 뛰어 넘는 단어, ‘초교파’를 외치며 함께 공존하며 도와야 한다고 앞장 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 드린 ‘덕목’ 을 확실하게 앞세우고 있지 ‘분열의 책임소재’ 를 말하는 교회와 목회자는 쉽게 찾기가 힘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 분열을 합리화한다고 단순한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이슈를 이 좁은 공간에서 논하기는 너무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진 사람이 주님 앞에서 통회자복하고 다시 새롭고 시작하겠다’ 고 하는 것이 분열의 씨앗이라면 만약에 어느 믿지 않는 사람이 ‘수 많은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나오라고 하는 그 주님이 분열의 원인 제공자인가요?’ 라는 생뚱맞는 질문에 우리는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복음의 본질은 어디에서 찾아야 됩니까?

베스트 셀러인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접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이론에 고개를 끄덕이며 지향해야 될 길을 찾아 우회전이나 좌회전 깜박이를 켜놓고, 정작 핸들은 반대 방향으로 꺾고 있는지 우리는 돌아 봐야 합니다. 더더구나 안타까운 것은 좌회전이나 우회전 깜박이를 켜 놓고 잊어 버린 채 그냥 한 길만 계속 달리고 있는 모양도 있는가 살펴봐야 합니다. 정말이지 수 많은 주변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것은 자신도 이웃도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는 아집이고 독단입니다. 누가 누구라고 말 할 것도 없이 이제는 화합과 상생, 이해와 관용, 용서와 사랑, 그 덕목이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한 때입니다.

이영희목사님, 당연히 노회에 가입되어 더 새롭고 더 많이 일 하게 하도록 서로 찾아 가 축하해 주는 그런 그림을 그려 봅니다. 만약 분열의 씨앗을 찾아 보고 따지려고 생각 한다면 제가 앞 서 말씀드린 그런 내용부터 재점검 해 보고 더 나아가 로마제국의 나뉨부터 시작된 교회분열의 역사 전체를 처음 부터 차근 차근 따져 봐야 될 것입니다. 부디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2011-06-02 08:41:35
74.73.116.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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