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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교회 개혁 (어느 장로님 글, 군자대로행을 읽고 나서)
icon 김창선
icon 2011-08-22 08:33:53  |  icon 조회: 5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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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천지 어딜 가도 ‘개혁’이라는 단어가 춤을 추는 시대입니다. 너도 나도 개혁을 외칩니다. 정치도 개혁, 학교도 개혁, 법조계, 검찰 경찰 사회봉사 단체…너도 나도 개혁….심지어 시골 마을회관도 개혁…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서도 개혁을 외칩니다. 외치는 사람도 가지 가지입니다. 세제 및 의료 개혁안을 추진하는 미국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숨 죽이고 살았다가 이제부터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외치는 중동 국가 여자들에 이르기 까지 너도 나도 개혁입니다.떴다 하면 개혁, 외쳤다 하면 개혁입니다.

급진개혁, 중도 개혁, 뜨거운 개혁, 달짝지근한 개혁, 개혁세력이 개혁 안됐으니 고치자고 하는 개혁… 그저 개혁하면‘확 뜯어 고쳐야 한다’는 등 팔장 걷어 부치고 달려드는 모습부터 연상하게 됩니다. 개혁이라고 하면 무조건 때려잡고, 뜯어 고치고, 시셋말로 깔 건 까고…쫓아 낼 건 확 쓸어 버려야 한다는 선입견이 예사롭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의 군사혁명 문화가 만들어 놓은 서슬퍼런 개혁은 때려 잡는 것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부정부패 척결’ 에서 나오는 척결이라는 단어의 뜻은 ‘뼈에서 살을 발라낸다’ 는 뜻입니다. 당시 개혁은 피가 철철 넘치는 소름 끼치는 언어 인플레를 만들어 가는데 한 몫을 단단히 했습니다.

벽에다 한 줄로 세워놓고 디립다 따발총 갈겨대는 인민재판 같은 개혁도 있었으니 ‘무정한 자요 피 흘리기에 발 빠른 자와 같은’ 개혁이였다는 말입니다….그 좋은 ‘개혁’ 그 단어 자체가 아차하면 생사람 잡아 죽이기 딱 알맞는 그런 형국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혁이라는 말이 점점 닭살 돋는 표현이 되어 가고, 하도 흔하다 보니 급기야 왠만한 시간투자 없이는 약발이 안 받는 모습입니다.

이 지경이니 개혁의 논리도 함께 죽어 가고 …때로는 무작정 오기를 부리고 달려드는 투전판 개평꾼 같은 모습도 있습니다. 그 개혁의 의미는 마치 오뉴월 더위 개 혓바닥 쳐저 내리듯 축축 쳐져 내려 가는 곳도 있습니다. 교회 역시 개혁에는 절대 안 빠지고 한 가닥 하는 곳입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 알기 전부터…교회를 알기 전 부터…. 교과서에서 배웠는데……그게 그만 잘못 주입된 경향이 많이 있는 것이 바로“교회개혁 현장”인 것 같습니다. 세상 지식의 밥 그릇에다 교회 개혁의 정신을 넣고 그 곳에 양념장까지 확 부어“개혁 비빔밥”을 만들어 내려고 하니 한 마디로 밥맛이 달아 나는 겁니다.

마틴 루터가 어쩌고, 깔벵이 저쩌고, 쯔빙글리까지 들먹거리는 유식찬란하게 말빨 세워 나간다 해도 그 속에 ‘하나님 없는 개혁’ ‘사랑과 용서가 없는 개혁’은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그 자체가 맹탕입니다. 더 나아가 그 자체가 실로 개혁의 대상 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개혁, 그 것은“처음으로 다시 돌아 가는 것”바로 그 것입니다.

Reformed Church 라는 것, 개혁교회라는 것, 그 것은 첫 모양새로 돌아 간다는 뜻입니다. Re…다시, 되돌아, Form….모양새, 틀, 구조, 원론적인 것…옛날로 돌아 가는 것…한 마디로 ‘빠꾸 오라잇 뒤로 뒤로…처음 처음으로…그 처음으로…” 그 처음이 어딥니까? 우리들이 만났던 주님 첫 사랑, 그 회한의 언덕이 어딥니까? 당신이나 ..나나 ..우리 모두가 태여 나기도 전…억만겹 날밤 새우기 전…그 전의 모습…그 것이 처음입니다. 그 것은 사랑이고, 용서며, 구원의 언덕입니다.

그 곳으로 가는 것…그 것을 찾는 것…그 것이 교회개혁입니다. 때려잡자 김일성식으로 … 때려잡자 목사가 아니라 그 몹쓸 죄인 앞에서 나를 다시 돌아 보는 것..그러므로 진정으로 내가 갈 길…벧엘 언덕을 찾는 것,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 가는 것….그 것이 교회에서 외쳐야 하는 진정한 개혁입니다.

교회개혁 정신이 잘 못 되다 보니 개나 소나 다 뛰면서 마녀사냥하듯 목회자들을 잡아 나섭니다. 한국의 대형교회들을 물고 뜯고 까벌리는 그 모습이 오늘의 슬픔입니다. 곁에서 보기에는 시원하고 통쾌한 모습, 하나님의 공의가 삐까뻔쩍할 것 같은 이 모습…이 것은 현대 한국교회의 처절한 눈물입니다.

아울러 그 것을 빤히 보면서도 울기는 커녕 맹숭 맹숭 바라보고 있는 우리 크리스챤들의 너절한 이 모습 자체가 말 할 수 없는 비극중의 상 비극인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 잘못도 천차만별 가지 가지…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도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할 일은 “용서” 그 것 뿐입니다. 사회법 정의의 개념하에서 형사적 처벌을 하는 것은 그 곳의 할 당연한 몫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주인된 우리 스스로가 세상개혁 흉내 내는 것, 그 것을 우리는 온 몸으로 막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들은 용서해야 하고, 터트려 나가려 하면 할수록 통사정하면서 말려야 하는 것, 그 것이 우리의 진정한 몫입니다. 그 것이 교회를 살리는 개혁입니다. 그리고 나서…문 걸어 잠그고 서로 끌어 안고 울며 불며 회개하는 것… 그래야만 예수가 삽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말씀이 살아 나는 겁니다. 그래야만 전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훼파하기 위한 사탄의 계략의 최우선 목표는 ‘목회자 죽이기’ 입니다.

무지한 백성들의 마음에 ‘간악한 마음들을 나누어 심어주어’ 주의 종들을 판단하는 오만 방자의 쓴 뿌리를 키워 나가게 한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와 평안을 위한 단어가 있다면 그 것은 ‘일체’ 입니다. 카톨릭은 그 일체의 평안을 위해 성경을 닫았고, 개신교는 ‘만인제사장’ 표현을 앞세워 성경을 열었습니다.

열었더니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많이 알게 되니 고상한 판단력도 넓어지고 영성도 높아 집니다. 그 넓고도 높아진 그 틈새로 사탄이 파고 들어 ‘제 멋대로 교리’가 설치며 ‘니가 복음 내가 복음’ 오만 잡 것들이 설칩니다. 급기야 교회 깊숙히 들어 온 사탄의 계략은 성도의 눈에 콩커풀을 씌우고, 성도의 마음 속에 희얀한 분별력(?) 도 넣어 주더니만 드디어 성공! 축배의 잔을 높이 듭니다. 종교개혁 이후 나뉘어진 피의 역사는 나뉘고 또 나뉘고….세월을 거듭하더니 가공할만한 분열을 가지고 왔습니다.

한국기독교 현대사는 나뉘는 역사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흐터지며 나뉘는 신령한 축복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통탄할 일은 ‘성도들의 마음 나뉨, 흐터짐’ 바로 그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탄이 후비고 들어 온 틈새에서 알량한 판단이 나오더니만 이제는 주의 종 판단하기를 오구구짜리 런치 스페셜 시키듯 간단합니다.

“저 설교는 시덥지 않고, 저 분 스타일은 구식이고, 저 설교는 화끈한데… 너무 길고…” 급기야 식당에 가서 주문하듯 요청도 갖가지 입니다. “강해설교 하지마라, 원고 설교 해라 마라…이 것 넣라 저 것 쳐라….”

밤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하던 ‘복음의 판단꾼들’이 목회자의 한 점 흠집이라도 발견할라치면 쌩쑈를 다하며 벌려 나갑니다. 한국교회를 향한 사탄의 공략, “목회자 최우선 죽이기” 는 완전 대박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한국식당에라도 가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위 “자기 담임목사 씹어대는 소리” 참으로 가관인 이 소리가 10년새에 부쩍 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천국소망이 있습니다. 이 꿈과 소망을 위해 기도하며 세워야 할 진정한 교회개혁의 ‘작전상 전략’은 바로 ‘목회자 세우기’입니다. 죽었다 깨나도 꼭 해야 할 일은… 목회자만은… 목회자만은…꼭 꼭 세워 나가야 합니다.

그 곳으로 돌아 가야 합니다. 일흔두살 동네 이장어른 장로님이 스물다섯살 교회 전도사님께 90도 인사하는 그 곳으로 찾아 가야됩니다. 아무리 주의 종이 군자대로행을 설령 모른다고 해도 실천 안한다 해도 아론과 훌처럼 양쪽에서… 끌어 안고 포용하며 꽤째째한 길이지만 그 길을 함께 걸어 가 주는 것. 그 모습 속에서만이 절대절명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를 살리게 됩니다. 이 것이 작전상 후퇴 개념이라 해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복음 전파 전쟁’에 있어서는 일단 뒤로 접고 헤쳐 나가야할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도 잘못한 것 있소…나도 죄인이요….퍽 꼬꾸라지면서 다 함께 회개의 미스바로 모이는 것, 우리의 잘못된 그 알량한 정죄의 칼과 우상들을 깡그리 묻어 버릴 마므레 상수리 나무 아래로 꺼억 꺼억 울면서 가는 것, 그 것이 교회 개혁입니다. 교회 어른들에게 열 올리며 대들은 소위 지식빨 넘치는 분들은 실천적 대안을 함께 내놓으면서 그 분들께 찾아 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 용서를 비는 것… 아니야 아니야 우리 생각이 주님 기쁨되지 못했어… 우리 탓이야…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구… 그 것이 교회 개혁입니다.

‘하마가 새끼를 어떻게 낳는지’ 그 것도 모르는 주제에 욥이 왜 그처럼 쥐어 터지고 완전히 박살이 나야 되는지 그 까닭을 도대체가 모르는 우리는 그저 장대에 달린 놋뱀만을 바라봐야 됩니다. 나무에 달린 예수를 ‘그저 바라 볼 수만 있어도 좋은 개혁’ 입니다.

어느 신학교수가 그랬죠…갈라디아서는 참으로 위험한 책이라고….너무나 화끈하게 가슴을 치기에 그렇다고… “이 것이냐 저 것이냐 딱 부러지게 하나를 선택하라!’ 고 다그치는(?) 바울의 표현이 면도날 처럼 섬짓하기 때문이라나요…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끝내겠느냐? 성령이냐? 육체냐? 둘 중에 하나 ! 과연 너희의 구원이 율법의 행위로냐 ? 믿음으로냐? 똑 바로 말해! 둘 중에 하나! 그래…좋아 .. 어떻게 무엇을 원하냐? 축복이냐? 저주냐? 양자 택일!” 처절하게 울부짖었을 것 같은 사도 바울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말하면서도 갈라디아 교회에 만큼은 기도 부탁을 안 했다고 하는 무서운 사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묻고 있습니다. 어줍잖은 개혁을 손에 들었다면 내려놓고 양자 택일…한 곳을 정하십시요… 때려 잡는 것이 능사가 아니요…틀렸다고 마냥 끌어 내고 까 벌리는 것이 절대 가치가 아닙니다. 교회 개혁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 가는 것, 회개 하는 것. 용서하는 것 바로 그 것입니다. 그 원래의 첫 사랑, 첫 모습으로 모두가 다 같이 묵묵히 걸어 나가는 것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니 너희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아무 말 않는 것…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그 뜻을 구하는 것… 그 것이 교회개혁입니다.
2011-08-22 08:3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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