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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의 스승이었던 서철원 교수에 대한 반론
icon 어부
icon 2014-07-18 19:51:15  |  icon 조회: 4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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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와 구원에 대한 논평

서철원 교수의 논지는 '예수를 믿으면 곧, 성령을 받는 것이고, 성령을 받았으면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다'로 요약될 수 있다. 따라서 '중생 후 별도의 성령세례'라는 공식은 오순절계통의 주장이고, 개혁신학의 주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중요한 것은 구원의 순전히 은혜로 얻는 것이므로 인간적인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 성령세례를 받는다는것은 칼빈주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물론 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강의 초안을 다 읽고 느낀 것은 주경신학적인 것만이 아니고,개혁 신학적 입장에서 볼때 과연 참으로 칼빈주의 신학이 바로 세워질 수있을까 하는 의문을 일으키게 하므로 본래의 동기 곧 개혁신학을 세우고자하는 동기로부터 빗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필자에게는 약간의 염려가 된다.



I. 무엇보다 먼저 언급된 '중생'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가 문제다.



'중생후의 별도의 과정','한 생명의 출생','중생할 구약시대의 백성'. '중생 후의 성령 세례도식', '변화되고 중생되는 기간'등의 표현을 가지고 서 교수의 중생관을 단정하기는 곤란하나 다음과 같이 이해해도 무방한 것 같다.



첫째, '중생하면 예수는 믿게 된다'는 것은 좁은 의미의 중생을 말한다.

그 성경적 근거는 요한복음 1장 12,13절,3장 3-15절 베드로전서 1장 3절,23-25절 야고보서 1장 17,18,마태복음 16장 16, 17절 마태복음 11장 27절,에베소서 1장17절 등인데, 이러한 말씀들이 뜻하는 거듭남을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중생은 한 생명의 출생이다. 따라서 출생한 후에 또 하나의 출생이 추후에 공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을 또다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 믿을때, 한생명이 출생한다'는 것이다.



셋째, 사도바울의 경우는 중생하는 기간이 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중생이 출생과 같느냐는 것이고, 출생이면서어떻게 기간을 갖느냐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질문을 상기할 때 중생을출 생이라고 볼수는 없다. 중생이란 옛 자아를 뽑아버리고 새로운 자아나개혁신학, 특히 바빙크 신학의 강력한 주장인 것을 아는 우리는 중생이라는 개념을 가능한 한 쓰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본다.



바빙크 신학이 이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어디에도 새로운 피조적 생명이 들어온다거나, 이러한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거듭나는 기간'이라는 표현은 옳다고 보여진다. 사도바울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중생시기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이다. 다메섹 도상의 3일쯤의 기간 어느 시점에 중생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이로써 개혁신학에서 주장하는 중

생시기(시점)의 불확실성이라는 교리를 생각하게 된다.

요컨대 서교수는 중생을 좁은 의미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좀더 넓혔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중생에 해당되는 용어가 '아나겐나오( 다시나다)'가 쓰인 부분을 더 깊이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디도서 3장 5절에 ' 중생의 씻음'이란 말이 나온다. 이것은 바로 그뒤의 표현처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다. 여기서 새롭게 하심이란 '아나카이노오(다시 새롭게 하다)' 에서 나온 말로써 중생의 씻음과 같은 뜻으로 보면 중생의씻음과 같은 뜻으로 보면 중생의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이것은 문맥상(그 다음절) 성령이 풍성히 임하실 때 이루어진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과 같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중생의 씻음 곧 성령의 세례와 같은 역사가 일어난다. 바빙크의 해석에 의하면 도르트 신조의 중생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과 같은 성령의 불가항력적 역사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중생이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몸의구속, 곧 몸의 부활에 이르러서야 완성에 이른다. 마태복음 19:28 '세상이 새롭게 되

어'는 '중생의 때' 곧 몸의 부활이 있을 때, 곧 인자가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심판하실 때에 일어나는 중생을 가리킨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중생이다.

니고데모의 질문에 부응하는 제2의 출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 잠재의식 상태에서의 중생 또는 유아의 중생까지 포함시키면 네 가지의 중생관이 있는 셈이다. 성령 세례와의 관계 또는 구원과의 관계를 말할 때에는 이 가운데서 어느 중생을 가리키는지를 밝히면 오해의 소지가 줄어든다.



II.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성령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이다.

서교수에 의하면 '성령받는것','예수를 믿을 때 받는 것','성령께서 신자에게 오시고 내주하시는 것','선물로 받는다는 것'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횬은 그 자체에 잘못됨이 없다. 모두 옳은 표현이다. 그러나 이로써 성령 세례의 본질적 의미가 구체적으로 밝혀지기에는 미흡하다. 왜냐하면 성령세례가 언급된 부분이 신악에 일곱번 나오는데 마태복음 3:11절, 마가복음1:8, 누가복음3:16,사도행전1:5,11:16,고린도 전서12:13절 등 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특히 복음서에 나오는 부분에 언급이 없다는 것은 무의식적이면 모르되 의도적이었다면 문제가 된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회개의 의미를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회개는 일생동안 지속되어야 하되 종교적인 능력 곧 위로부터의 강한 능력으로 되는 회개가 곧 칼빈주의적 회개임은 다 아는 일이다.

세례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어 회개케 하거니와 그의 뒤에 오신 분은 능력이 많으시므로 권능의 성령으로 곧 회개 곧 성령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불같은 성령으로 돌같이 굳은 심령이라고 아브라함의 자손 곧 마음의 할례를 받은 백성으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은 구약 전체 속에 흐르는 약속의 말씀(아버지의 약속)이다 (행1:4이것은 세례 요한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자 예수께서 하신 아버지의 약속이다(요14장-16장).

더욱이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신다(고전12:13). 법정적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지체가 그리스도의 하나된 일이지만 유태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가 질적으로 하나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곧 성령 세례로써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성령 세례를 주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의 뿐이시다(요1:33) 기름부음을 입은 기름부음을 주신다. 그는 세상의 죄를 지고 갔을 뿐이다.

우리에게 기름부음이 곧 성령세례다. 이밖에 성령세례는 권능받는 것(행1:8,8:19),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행2:4),성령이 내리시는 것(행8:15-17,행10:44),성령부어주심 (행10:44), 성령이 임하시는 것(행11:15,행19:6).선물을 받는 것(행2:38,행11:17), 생명을 얻는 회개(행11:18), 더 자세한 하나님의 도(행18:26), 성령을 마시는 것(고전 12:3,요7:37-39) 등의 뜻을 함축적으로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III. 시차에 관한 문제(구원의 서정)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중생 후냐 동시냐, 성령을 받은 후냐 동시냐 물세례 후냐 거의 동시적이냐, 첫 축복이냐 둘째 축복이나에 관심을 집중시켜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기를 좋아한다. 심지어 이 시차 여하에 따라개혁신학이냐

오순절파냐가 판가름 날 정도로 사태를 악화시키는데 고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중생 후 성령 세례' 도식이냐, 혹은 '중생 즉 성령 세례' 도식이냐의 논쟁은 중생과 성령 세례에 관한 정의가 확립되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생은 넓은 의미가 없다. 중생을 넓은 의미 곧 칼빈이나 도르트신조, 또는 한국교회의 전통(1884-1964, 약 80년간)에 따른다면 중생 후가 되기도 하고 거의 동시일 수도 있다.

1907년에 한국교회가 성령의 강력한 능력으로 큰 회개의 은혜를 입었을 때, 언더우드 선교사는 마침 안식년차미국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한국교회가 이제야 성령의 세례를 받았구나라고 했다. 총회사기에 보면 이것은 중생의 은혜라고 했다. 그 당시의 신학이 유치해서 모두 잘못된 판단을 했던가? 결코 아니다. 전적으로성경에 맞는 옳은 말을 한 것이다. 이래서 한국교회는 오순절 계통인가?결코 그럴 수는 없다. 오순절 계통은 1914년 후에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전에는 아직 계통이라고 할 수 없는 단계였다.

여하튼 안수여부물세례 전후 여부, 신앙동시여부 등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첫째, 성령 세례의 시세자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여부, 둘째, 수세자들의 주변환경, 세째, 계시의 역사적 진정성 등에 따라서 각양 모델이 나타날 수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복잡한 변수를 고려해 넣지 않고 기계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은 균형잡힌 신학이라고 할 수 없다. 무엇인든지

획일주의는 다양하게 나타는 영계의 일을 바로 설명할 수 없게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순절계통의 '중생 후 세례' 도식이나, 일부 개혁신학자들의 '중생 즉 세례(좁은 의미의 중생)' 도식이나 모두 일리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치우쳐 굳어지거나 획일하게 선을 긋는 것은 조직신학일 수 있으나 교의신학은 아니다. '교의'란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자기의 '이데올로기'를 주장하기 위하여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그대로 기록된 말씀에 맡겨야 한다. 따라서 경험위주도 안되거니와 무경험위주도 금물이다.

먼저 사도를 포함한 120명의 경우 중생 후(좁은 의미)에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은 확실하다. 물론 물세례 후였고 안수없이 받았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고 자녀의 명분을 얻었으며(요1:12,13) 아버지의 계시를 받았고(마16:17) 진리의 말씀으로 깨끗한 자들로서 이미 욕했다 (요13:10,15:3). 더욱이 이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및 승천을 보고 믿었고 이러한 구속사

적 사건들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구원서정에 어떤 간격 또는 시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주권에 따라서 고넬료가정에게는 복음이 전파됨과 동시에 이것을 믿었고, 믿음과 거의 동시에 성령이 부어져, 성령 세례가 주어졌으나 사마리아인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이들은 고넬료보다 먼저 복음을 받은 일이 있었고 (요4:1-42).나중에 빌립의 전도를 듣고 복음의 말씀을 받았다

(행8:12-14). 이들은 빌립을믿은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복음전도함을 믿었다. 우리 한역성경이 옳다.

더욱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을 듣고, 요한과 베드로를 보냈다. 빌립의 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다. 단순히 빌립을 믿은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 경우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고 따라서 120명의경우와 구원 서정에 관한한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넬료 가정과 사도 바울의 경우는 거의 동시에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따지면 믿음이 먼저 있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것이다. 믿음없이 보혜사 성령을 받을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받지 못한다. 끝으로 아볼로와 열둘쯤 되는 제자들의 경우는 확실하지 않다.

전자의 경우(아볼로)는 상당한 기간이 지났을 수 있고, 예베소의 경우는 확실히 구주예수를 믿었는지를 가려내기힘들다. '제자들'이라든가,'믿은 후(피스튜산테스는 완료분사이므로 본동사의 시제보다 앞선다)'라든가를 보면 이미 예수를 믿은 제자들로 볼 수있으나 사도행전 19장 4절에 의하면 아직 믿지 아니한 것같아 보인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다시 받은

것이다. 여하튼 사마리아형, 또는 고넬료형에 속한다. 이렇게 중생과 성령세례와의 서정만을 따진다면고넬료형(동시형),사마리아형(사도들도 포함됨-중생 후형),아볼로형 ( 상당히 기간을 둔 학자형) 등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러한 모델들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고넬료가 이방인이므로 모든 이방인들에게 동시형을 적용한다든가, 모든 혼혈족에게 사마리아형을, 모든 학자들에게 아볼로모델을 적용하는 곳과 같은 것은 바보가 아니면 컴퓨터에 입력된 기계에 불과하다. 모든 은사들은 고린도전서12:4-11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뜻대로 주어진다.있는자에게는 더 주어 넉넉하게 하시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도

빼앗으신다. 성령받는 일에 철칙이 있다. 세상(불신)은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믿으면 세상이 아니다. 이미 거듭났기 때문에 (좁은 의미) 믿게되고,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 여기서 믿고 성령받는 일에 있을 수도 있고,거의 없을 수도 있다. 어느 한쪽을 고집하는 것은 무리다. 왜냐하면 00000000000 란 본동사의 시제보다 앞선 시제이기 때문에 '믿은 후'가 원칙이나,특별한 경웨는 동시일 수도 있다 요한복음 7장 39절에 해석된 사

도요한의 신학은 시차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호이 피스튜산테스'곧 믿는 사람들이 장차(에벧론) 받아야 할 영(프뉴마 람바네인)이라고 한다.

믿는 자들이란 '이미 믿은 사람들'을 가리킴에 틀림없으나 본동사의시제가 미래를 뜻하기 때문에 그보다 앞선 현제시제로 번역한 것뿐이다. 더욱이 여기서 '믿는 사람들'이란 예수께서 말씀사힌 '누구든지 목마른자들'에 대한 해석이다. 사도들이나 그 당시 오순절전의 신자들만을 가리킨 말씀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누구든지' 시대 곧 신앙시대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도 똑같은 의미의 말씀이 계시되었다.

이 말씀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한마디로 거의 동시에 일어날 수 있으나 믿은 후 얼마 동안의 기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으로 보아야 성경해석에 무리가 따르지 않게 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고집하면 신학이 너무 굳어져 버린다. 스스로 자승자박의 어리석음에 빠질 필요는 없다. 이것은 둘째 축복을 고집하는 오순절 계통이나 이것을 극구 부인하는 일부 개혁신학자들에게나 모두 똑같이 적용된다.



IV. '성령받음'의 의미

'성령을 받는'라는 표현은 구약에는 거의 없고 다만 하나님의 신이 임하신다(민24:23,삼상10:10, 삼상19:20,23,대하15:1) 든가, 감동하신다 (삼상11:6, 대하 24:20) 등은 더러 나온다. 그때에는 성령이 임하셔도 잠정적인 것이 특징이지만 항상 내주하시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지속적으로 내주하시는 영을 신약은 성령을 받는다고 한다.



또 중요한 것은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는다고 할 때,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과 동질 동등의 영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행8:15-17, 행10:47,19:2,요7:39,눅11:10-13).따라서 이러한 오순절 성령을 받기 전에도 성령의 감화나 역사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성령의역사로서 좁은 의미로 거듭나 예수를 구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된다.

만약 이것을 부인하면 오순절이전 곧 예수의 낮아지신 시기는 물론 구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역사가 없고 따라서 좁은 의미의 중생이 없다는 것이 되고 결국 믿음(11장)도 없고, 칭으(롬4장)도 없다는 것이되고 만다.

이것은 칼빈이 그토록 강조한 신구약의 통일성 또는 유사성에어긋나게 된다

는 것을 의미한다(기독교 강요II권 10장).



제임스 던(James.D.G.Dunn)의 주장 곧 오순절 성령받음과 동시에 믿음이 시작됐다고 한 것은 그 이전에 믿음이 없었다는것이 되므로 그의 신학이 오늘날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한동안 (약10여년간) 보수 신학계를 석권할 정도였으나 지금은 어림도 없다.



서교수도 이러한 오류에 빠질까 염려가 된다. 예컨데 '예수를 믿는 그 시간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러면 성령세례 받기전에는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 된다. '예수 믿으면 중생하고, 성령을 받는다'는것은 옳은 주장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생을 좁은 의미로 보면잘못된 것이고 넓은 의미로 보면 잘 해석해야 옳은 말이 된다.

'중생하면 예수 믿게 된다'고 해야 옳고, 믿으면 중생한다는 것은 넓은 의미로는 가능하다. 그리고 넓은 의미의 중생은 곧 성령 세례이므로 '중생하면 믿게되고, 믿음으로 성령 세례 곧 넓은 의미의 중생의 은혜를 입는다 '고 하면 성경대로 바로 된다. '성령을 받을 때 참 크리스챤이 된다'것은 사마리아인들의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의말슴, 곧 복음을 받았고, 따라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요1:12,13)예수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거듭난 증거다.

만약 이것을부인하면 빌립의 전도는 전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더욱이 이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복음의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는 성령의 감화 또는 감동 정도가 아니라 시몬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역사한 오순절 성령이였다. 신약에서 성령을 받으면 곧 충만함을 입는다. 충만과 지속적 내주와 직결되는 것이 곧 성령을 받는 것이다(갈3:2,요7:39).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임하실 때 방언으로 주를 찬양하게 하여 성령받음이 확실치 않다는 것인가? 고넬료 가정의 예룰 들어 믿음과 동시에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다 보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임하신 것은 그 후에 무수한 이방인들이 받아야 할 성령역사와 내주의 시작에 불과하다.

'성령받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것도 이상한 말이다. 성경에 이러한 표현이 없다. 인용된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고 한다. '아들인 고로 성령을 받는다"고 한다. 인용된 로마서 8:9절에는 하나님의 아들인란 말이 없다. 누구든지 법정적으로 양자가 아니면 양자의 영을 받지 못한다.

세상(불신)은 받지 못한다. 그러나 자녀가 부르짖을 때, 구하고 두드리고 찾을 때 천부께서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눅11:9-13).

하이델베르그신조(116문답)도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한다. 기도하는 자는 거듭났고 예수는 믿는 자다.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고 믿으면 자녀의명분 곧 법정적 권리를 얻는다(요1:12,갈4:5) 이러한 권리를 갖는 자가 양자의 영을 받으면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사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조금더 나아가서는 서교수

도 바로 말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확실치 않다. '믿음으로아들이므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셨다. 믿음의 도를 들을 때 아들이 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아마 이것은 믿음과 동시에 성령을 받는것을 의미한 것으로 보면 처음의 주장과 맞으나 구원 서정에 따른 서술이면 전후 관계가 다르므로 자신의 주장에 어긋난다. 따라서 헛갈리게한다.

에베소서 1:13-14절의 말씀의 시상과 시제를 모두 동시적인 것으로 본 것은 본문을 잘 살피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로이드 존스도 이 말씀에 근거하여 '중생 후 성령의 권능받음'을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그는

자신이 주장한대로 이것이 곧 청교도 신학이라는 것이다. 여기 본문의 '피스튜산데스'는 완료분사이므로 '에스브라 기스데테( 인침을 받는다)' 보다 앞선 시상이므로 믿음 후에 인침을 받는 것이다.물론 고넬료나 바울처럼 거의 동시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믿음 후

에 인침 곧 성경의 세례를 받는다.



V.성령 세례의 조건

이 조건(condition) 에 관한 문제를 바로 정립하느냐에 따라서 알미니안주의냐 개혁신학이냐가 판가름 난다. 서교수는 개혁신학자답게 오순절계통에서 주장하는 믿음,회개,기도,순종,전적 의뢰,세례,죄사함들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이것이 강력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깔3:2-14). 기도도 우리의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고 믿음의 발로다. 누가복음 18장의 과부가 원통함을 푸는 비유는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에 관한 교훈이다(눅18:1). 따라서 그 결론도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것이다 (눅18:8). 믿음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다. 순종은 성령을 받은 후에 일어난다.

순종하는 것은 현재고, 성령을 받은 것은 그전이다(행 5:32). 회개, 죄사함, 세례 등도 예수를 믿는 것이 회개요, 믿으면 곧 죄사람을 받게되고, 이것을 가시적으로 인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받는다자기를 맡기는 것도 성령을 받아야 참으로 맡겨지는 것이고 그전에는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되질 않는다.

베드로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했으나 세번이나 부인했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이 조건일 뿐이다. 그런데 개혁신학에서 자칫하면 이 믿음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갈라디아서 3장2절의 '듣고 믿음으로'는 디아가 아니다.

엑수인데, 이것은 궁극적인 원인은 아니로되 '믿음으로부터'라는 뜻을강하게 나타내는 전치사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는 00000 믿음으로써(수단)이다.갈라디아서 3장 6절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믿음)을 의로 보셨다고 한다(창15:6). 혈육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고, 또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 일은 모두 성령으로 시작하는 일이다(깔3:3). 성령으로 시작했으며 끝까지 성령으로 마쳐야 한다. 인간이하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주님의 말씀은 인간의 믿음에 공로를 돌리고자 함에 있지않고, 하늘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신 그 결과를 중요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을 믿음으로 받는다. 그런데 서교수의 '믿는 것으로 받는다'는 표현은 믿음이 곧 성경을 받는다는 뜻인지 혹은 믿음이 수단이 되어 받는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서교수의 의도는 전자인 것으로 보인다.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수단임을 명시하고 있다.

성령을 받으면 물론 강한 믿음이 생긴다. 그러나 이 성령을 받기 전에도 믿음이 있었다. 이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더욱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한편 다음과 같은 표현은 자가당착에 이르게 하는데 어떠한 의미인지 궁금하다."그들이 (에베소의 제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 받는데, 그들은 이 회개와 신앙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성령받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중생 후 성령 세례받는다는 도식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회개와 신앙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동시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동시설'과 서로 맞지 않는다. 더욱이 회개가조건인듯이 보이

므로 알미니안주의가 아닌가?



VI. 고린도전서 12장 13절 신학계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장절이 성령론에 관한한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이다. 사도행전을 기피하고 교회에 입각한다고 하면서 이본문을

가지고 제2축복을 주장하는 것을 막아보고자 한다. 여기는 제일도 없고 제이도 없다. 이쪽저쪽을 옹호할 만한 말씀이 아니다. 과거에일어난 사건들을 한마디로 줄여서 요약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단순과거의동사니 해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자신의 주장대로 성경이 쉽게 따라와 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9장 7절에 이 본문을 넣어서 해석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이와같이 유대인이나 사마리안이나 팔레스틴의 고넬료나 에베소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 따라서 사도행전에 맞지않는 구원서정이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가 설립될 때부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차별없이 성령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고, 성령 세례와 함께 성령을 마셨다'는 것은 이것이 한번만 일어난것이 아니다. 여러번 일어난 것을 종합적으로 요약해서 말한 것이다. 더욱이 성령을 마시는 것이 성령세례와 동시하고 하는데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이 성령세례라는 것이 된다. 왜

냐하면 성령을 마시는 것은 충만을 뜻하기 때문이다(요7:37-39,계20:17).

예수는 믿음과 동시에 곧 성령을 마신다고 볼 수 없다. 초신자의 믿음과 성령의 충만이 서로 구별된다는 것은 스토트(J Stott)를 비혹하여 가핀(Gaffin)및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다.



VII. 오순절 계통

20세기 오순절 운동의 특색은 둘째 축복에 있지 않고 방언여부에 있었다.

로페카의 벧엘성경학교 학생들이 19세기 말엽에 사도행전을 면밀히 읽은 결과 성령을 받은 증거가 방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고,계속 기도하는 중에 오즈만(Ozman) 부인이 방언을 하게 되자, 그날이 우연히 1901년 1월1 일이었다. 이러한 방언은 교부 시대에도 있었고 1803년에는 영국의 어빙(Irving)목사가 시무한 교회 안에서도 일어났다.

어빙목사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목사였고 이것이 노회에서 문제가 됐으나 방언 때문이 아니라 공예배(새벽기도)에서 방언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 때문에 행정적인 규제를 받은 일이 있었다.

한편 성령 세례도 오순절 계통에서 비로소 강조된 것이 아니다. 서교수가 지적한 대로 웨슬리와 동시대인이었던 플레쳐(Fletcher)목사가 이것을 강조했고 언더우드 선교사와 같은 시대에 뉴옥의 장로교회 심프슨(S-mpson) 목사가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순절 운동이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14년경에 하나님의 성회가 조직 할 때부터였다. 이때까지는 기성교회들이 모두 비상한 관심을 가졌고 한국교회도 1907년에 큰 은혜를 사모했다.

그러나 토페카에서와 같이 방언이 성령 세례 받은 증거라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무리들 때문에 기성교회와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독자적인 교단이 형성되는데 이르게 되었다. 무디 성경학교 교장이었던 토레이 목사도 방언 때문에 방언파와 갈라질 수 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중생 후 성령 세례'도식이 마치 오순절 계통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원래 구원의 서정이 두 단계로 생각되는 것은 건전한 편이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은 너무 지나치게 계급주의적 단계를 설정하여 스콜라 번쇄 신학으로 전락했고 종교개혁신학은 이것을 분리하여 둘 또는 세 단계로 보았으나 종교개혁 후에 스콜라적 신학이

다시 되살아나 아홉가지의 서정까지 세분되다가 20세기 중반기에는 6-7가지로 줄어들었고 카프탄(Kaftan)에게 와서는 하나로 축소 되었다. 베르카우어 (Berkouwer)에게서도 거의 무시되었고, 칼빈신학교의 후크마는 부르심과 영화를 제외시키고 그 중간의 것만 다르면서 하나 뿐이라 했다.

이러한 것을 감안할 때 로마서 8장 20절에 있는 그대로 세가지(부르심 의롭다하심,영화롭게 하심) 정도는 인정해야 마땅하고 신분이나 지위 또는 위상으로 보면 둘 정도가 적당하다.

그러나 오순절 계통은 둘째 축복을 말하지만 실상인즉 셋 이상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 세례의 조건들이 셋 이상에서 일곱까지로 늘어나기 때문에 복잡한 사정이 될 수밖에 없다. 너무 많아도 안되고 하나 뿐이라는 것도 성경에 맞을 리가 없다. 따라서 '중생 후 성령 세례'또는 '중생 후 성령받음' 도식이 마치 오순절 계통의 전유물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청교도 신학의 중요한 사상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성령 세례가 아니고, 성령의 인침이었다.

'중생 후 인침' 또는 '중생 즉 인침'이었다. 중생을 좁은 의미로 보면 전자가 맞고, 넓은 의미로 보면 후자가 맞다.

우리가 '오순절 계통'이라는 말은 너무 자주 쓰게 되면 마치 장로교 안에는 그러한 사상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기 쉬운데 이것은 사리를 바로잡는데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가핀(Gaffin)교수는 미국의 정통장로교회를 오순절 교회라고 한다. 지당한 말이다.

오순절 성령이라는 용어도 오순절 계통의 전유물인 것 처럼 떠맡길 필요는 없다. 만약 우리 교회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이 오순절 성령과 동질이 아니면 이것은 사도성을 상실한 이단적 교회 밖에 될 수 없다.



VIII.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구원서정 여부

단회성과 서정여부를 각론으로 다루어야 하나 여기에서는 함께 묶어서 다룬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그때''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에게' 그와 같은 모양으로' 강림했다는 의미에서 단회적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구원사적 의미로 '시작됐다'는 의미에서 단회적이다. 시작은 단 한번뿐이다.

이러한 의미 외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으나 대표의 원리는 결코 적용될 수 없다. 120명은 대표의 자격이 이미 상실될 수밖에 없다. 대표는 언제나 한 사람뿐이다.(아담과 그리스도,롬5:12,고전15:25). 더욱이 오순절에 오신 성령이 그 뒤에 오시지 않고 한번만 오신 것을 주장하면 이것은 1500년 이상이나 전통적으로 고백된 휠리오꾸베(Filioque)교리에 어긋난다.

성령이 계속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교리는 요한복음 15장 26절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보혜사 성령이 나오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이것을 부인하면 이단사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서교수는 '성령께서 세상에 오심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번에 오셨다'고 했는데 성경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밝혀야 한다.

더욱이 단번에 오셨다면 '신자들이 오신 성령을 받아 모시게 된다'고 했는데 이미 오신 성령을 어떻게 모시는지 궁금하다. 한번 오신 성령이 어디에 계시는가? 이 세상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불신)은 받지 못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막연한 자연세계인가? 성령은 이미 어디든지 계신다(시139편,창1:2). 120명 속에? 교회당에? 사도들 속에? 대체 이미 오신 성령이 어디 계신다는 말인가? 120명 위에 누구 위에 임하셨단 말인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사도들 속에? 신자들 속에? 이들에게서 오늘날까지 성령이 나오신단 말인가? 이것은 이단 사상이다. 도대체 이미 오신 성령이 어디 계시며 어떻게 우리에게 오시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시도하면 할수록 이단사상에 빠지는

것을 예외 없이 보아온 필자는 이렇게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성령은 교리에 진술된 그대로 항상 위로부터 하늘 곧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신다. 각자에게 오신다. 이것이 곧 신의 주권을 높이는 칼빈주의다.

누가 그렇지 않다 하는 자있는가?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120명 모두에게 이들의 구원 서정상 필요했다. 사도들이나 우리들이나 다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도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행1:4,5). 성령 세례는 구원 서정에 반드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미 목욕했지만 성령세례가 필요했다. 전적으로 바빙크의 말을 빌리면 전존재의 변혁이 필요했다. 구원의 서정이란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은덕'을 말한다. 오순절에 오신 성령이야말로 사도들에게 주신 큰 은덕이었다.선물이라는 말이 이미 은덕임을 보인다 '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덕이요, 이 도덕들의 순서가 구원의 서정이다. 120명은 의롭다 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오순절에 영화롭게 되었다. 이것이 구원 서정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학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출처: theology.ac.kr


서철원 교수님은 신대원에 있을때 저의 은사이셨습니다. 신학적으로 훌륭한 분이었지만 성령론에 있어서 만큼은 동의하기 힘든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2014-07-18 19: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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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2014-07-20 14:02:21
방언을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조용기 목사와 그를 우상처럼 따르는 사람들...

방언이랍시고 거짓 영에 평생 놀아난 조용기 목사에게 오히려 동정이 갑니다.

님들이시여,
님들은 제발 조용기 목사의 전철을 되 밟지 말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어부 2014-07-18 22:51:33
스승을 잘못 만났던 정이철 목사. 불쌍한 자 입니다, 오히려 동정이 갑니다.

사당동 2014-07-18 22:39:51
서철원 교수는 총신에서도 인기가 없었습니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고 남의 견해는 듣지 않는 고집불통이라고 할 수 있었죠.
그래서 교수들 사이에도 인기가 없었고, 학생들 사이에도 인기가 없었죠.
좋아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싫어하는 학생도 있었단 사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