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권세를 조롱하라'
'돈의 권세를 조롱하라'
  • 박지호
  • 승인 2008.11.24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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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윤 목사, '잉여 재물을 나누는 것이 돈을 모욕하는 방법'

"무엇이든 소유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죄성이 있는 한 돈은 살아 움직인다." 남가주 열린 말씀 컨퍼런스 둘째 날 워크숍에서 한성윤 목사(나성남포교회)는 돈이 가진 악마적인 속성을 지적하며, 물질 속에 숨어 있는 영적인 권세를 경계했다.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하는데, 사람들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붙잡으려 한다. '돈 = 축복'이라는 등식을 만들어 부를 축복의 척도로 삼고, 이를 좇으라고 권장하기까지 한다.

한 목사는 돈을 선악의 개념이 아닌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여기는 물질관을 비판하면서, 예수님이 유독 돈에 대해서만 맘몬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 목사는 "인간이 돈을 만들었지만, 도리어 인간이 돈을 경배하게 됐다"며, "돈은 힘과 권세를 가진 영적인 존재"라고 설명했다.

한 목사는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복과 재물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돈을 의지하고 두려워하거나, 잉여 재산을 투자해서 더 많은 수익을 만들어내려 하지 말고, 어렵고 힘든 이웃에게 나눠주는 삶의 방식으로 돈을 대적하라고 제안했다.

다음은 한성윤 목사의 강의를 요약한 것이다.

어떻게 돈을 사용할 것인가 하는 점보다, 돈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고민해보자. 사람들은 돈을 가치중립적인 존재로 여긴다. 돈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고, 누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돈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쓰는 사람이 문제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다. 예수님이 특정 대상을 의인화한 경우는 '돈'이 유일하다. 맘몬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돈에 신성을 부여했다.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이며, 힘과 권세를 가졌다는 뜻이다.

무엇이든 소유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죄성이 있는 한 돈은 살아 움직인다. 리처드 포스터는 <심플 라이프>라는 책에서 돈은 악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했다.

"성경이 돈을 힘이라고 명명할 때 막연하거나 비인격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매력이란 말처럼 단순한 구매의 힘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과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돈의 배후에 실질적인 영적인 힘이 있어서 돈을 활성화시키고 생명력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돈은 활동적인 행위자요. 그 자신에 대해서는 법이요. 돈은 인간으로 하여금 돈에 헌신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능력이 있다."

인간이 돈을 만들었지만, 어느새 돈은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은 돈을 숭배하게 됐다. 화목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집을 샀지만, 집은 어느새 부의 척도가 되어 사람들을 옭아맸다. 인간이 집을 지었고, 땅도 나눴지만, 그것 때문에 망하고 고통당하는 아이러니한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신약 시대,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복과 재물

하나님은 재물과 복에 대한 개념도 변화시키면서 완성하셨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이 장수와 풍요로움을 누린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외적인 번영이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진정한 축복인 것이다. 구약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고, 그가 오심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재물이 과거에 복을 나타내는 표상이었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복과 재물이 된 것이다.

이는 무소유를 주장하는 것도, 사유 재산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것은 성령을 속였기 때문이지 돈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돈을 자신의 소유물로 주장하는 것이 문제다. 그 순간부터 돈이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내가 돈이 있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항변하는 주장의 핵심에도 결국 돈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돈은 인격적인 존재이며, 악마적인 힘과 권세를 가졌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고지에 올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고지론'과 함께 비판을 받는 것이, 깨끗한 부자가 되라는 '청부론'이다. 돈은 인간의 욕심과 함께 있을 때 맘몬의 역할을 하는데, 깨끗한 부자가 과연 가능할까. 부패와 불의의 속성을 가진 맘몬을 깨끗하게 벌 수 있는 방법도, 깨끗하게 쓸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래서 청부론을 새로운 형태의 기복신앙이라고 규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편 '자발적 가난'이라는 개념이 있다. 가난해지려고 일부러 노력하는 것이다. 성경이 어디까지 가난할 것을 요구하는지 기준이 애매하지만, 성경은 가난의 태도를 가질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려면 무언가 소유해야 한다는 전제가 뒤따르지만, 어떻게 하면 가난한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요구된다.

그렇다고 돈을 버려?

우상을 버려야 하듯, '거짓 신'인 돈 역시 버려야 한다. 하지만 버리는 방법은 다르다. 무형의 영적인 존재를 투사한 거짓 우상은 태우거나 없애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돈은 우리가 생산한 노동력을 대표하는 실체이기 때문에 그냥 없앨 수 없다.

돈을 버리는 첫 번째 방법은 돈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돈 대신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의지하지 않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통장 잔액이 줄어들면 왜 남을 돕지 못하는가. 무섭고 두렵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돈이 없어질까 봐, 빼앗길까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돈이요, 아버지요, 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물이요, 기업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른 우상처럼 돈 역시 미워해야 한다. 대적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상적인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돈 앞에는 장사가 없다. 바울이 다른 교회로 헌금을 보낼 때 두 명을 함께 보낸 것도 돈이 가진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을 미워하고 대적하려면 만들어진 목적대로 돈이 인간을 섬기게 해야 한다. 돈에게 종의 자세를 가르치라는 말인데, 말처럼 쉽지 않다. 우선 돈을 흐르게 만들어서 돈의 권세를 축소시켜야 한다. 소유하고 축척하려는 힘을 거스르라는 말이다.

이를 실천하려면 일정 정도 이상의 잉여 돈이 생기면 그것을 움켜쥐지 말고 나눠야 한다. 돈이 인간을 섬기도록 만들기 위해서, 잉여 자본으로 더 많은 재물을 쌓으려 하지 말고, 어렵고 힘든 이웃과 나눠야 한다. 이렇게 나누고 흘려보내는 것이 바로 돈을 대적하고 모욕하는 방법이다. 돈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들지만 그것을 나눔으로 하나님이 재물에 부여한 진정한 의미를 되찾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8장 9절)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진 부요한 자였지만, 스스로 가난하게 됨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만든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 역시 스스로를 가난하게 만들어 이웃을 부요하게 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그런 태도야말로 세상을 당황하게 만드는 하나님나라의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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