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기대어 사나? 돈이냐 하나님이냐
무엇에 기대어 사나? 돈이냐 하나님이냐
  • 김성회
  • 승인 2009.11.16 1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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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신앙이 함께할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의 컨퍼런스

'돈과 예수'라는 주제로 열린 남가주 열린말씀컨퍼런스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불편하지만 꼭 알아야 할 진실과 마주하게 만든 자리였다. 올해로 5회째를 맞은 열린말씀컨퍼런스는 11월 12일부터 4일간 애나하임의 늘푸른선교교회(송영재 목사)에서 열렸다.

세리토스장로교회·세계로교회·남포교회·뉴라이프선교교회·늘푸른선교교회의 공동주최로 열린 이번 컨퍼런스에는 정민영 선교사(국제 위클리프)를 비롯해, 최정권(첼튼햄장로교회)·한규삼(뉴저지초대교회)·노진준(세계로교회)·정대성(콜로라도 뉴라이프선교교회)·이국진(필라사랑의교회)·박성일(기쁨의교회)·김한요(세리토스장로교회)·김태권(필라델피아 임마누엘교회)·박영배(플러튼뉴라이프선교교회)·송영재(늘푸른선교교회)·한성윤(나성남포교회)목사가 강사로 참여했다.

컨퍼런스에 참여한 강사들은 강한 어조로 신앙과 물질은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며 성경적 근거를 들어 제시했다. 4일간의 일정을 통해 경제적으로 궁핍한 이 시기를 물질의 풍요가 아닌 더 깊은 신앙심으로 이겨내자고 입을 모았다.

   
 
  ▲ 정민영 선교사는 "돈을 사랑하는 것은 믿음을 떠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며 물질로부터 지배당하는 삶을 경계했다.  
 
다음은 첫 강사로 나선 정민영 선교사(국제 위클리프 선임 부총재)의 강의 요약문이다.

누가복음에서 6장의 산상수훈은 대단히 불편한 메시지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예수의 메시지인 만큼 기초가 되는 말씀으로 봐야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재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본문을 보면 예수가 가난 자체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가난과 고난은 '인자로 말미암는 고난'이라는 것에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본문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를 대조시킨다. 23절의 "그들의 조상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와 26절의 "그들의 조상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였다"가 병행된다.

가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예수가 새로 만든 가르침이 아니고 구약 시절부터 하나님께서 복음의 본질을 깨닫게 하시려고 여러 번 가르치셨던 일관된 메시지임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가난함, 나를 버리는 것에 대해 주시는 말씀이다.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는 예수를 잘 믿으니까 주님께서 내게 주실 것이라고 예측하는 그런 내용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전하는 다른 메시지를 따라가지 마라.

영적 가난과 물질적 가난

가난의 의미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영적·정신적 가난이 있다. 우리는 스스로 합리화시키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로 말이 바뀐다. 이것은 가난한 심령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다는 차원에서 중요하다.

겸손함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한 주교는 겸손에 대해서 "사랑 때문에 자신을 비우는 것이 겸손일진데 하나님이야 말로 겸손 자체이시다. 그 분 위에 더 높은 것은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시는 길밖에 없다. 구원 이야기는 곧 하나님의 지속적 겸손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겸손은 또 우리의 전적인 은혜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행위를 공로로 드러내는 행위가 은혜의 반대말이다. 그것이 곧 교만이다.

두 번째로 예수는 더 나아가서 물질적 가난을 말한다. 우리가 방어적으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불가능한 것인가?'라고 질문하지 말고, '이 악한 세상에서 부를 축적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나를 위해서 많은 재물을 쌓는 일이 정말 옳은가?' 그것을 먼저 고민해 봐야한다. 그 고민에서 예수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착취와 빈익빈 부익부와 장기간 고착화된 경제 부조리라는 틀 안에서 우리가 비록 합법적 경제 행위를 한다 해도 복음적인 양심을 가지고 볼 때 이것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상이다. 타락한 세상이 오물처럼 던져놓은 이 물질을 가지는 것을 하나님이 보실 때 공의로운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한다. 많은 부를 축적해서 하나님을 도와드리겠다는 십자군적 발상은 옳지 않다. 부의 축적을 축복과 동일시하는 관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초대교회는 예수를 따라 가난한 자의 편에서 종교 개혁을 했다. 크리스텐덤 시대로 와서 다시 기득권의 편에 서왔다. 얼마 전에 한국의 한 신문 종교란에는 통렬한 기사가 실렸다. "백 년 전 한국 민중이 기독교를 품은 이유는 한반도 역사상 무속이나 도교나 불교나 유교나 토착종교나 수입종교나 모든 종교가 기득권에 빌붙어 있는 종교였는데 기독교만이 유일하게 민초의 편을 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가 있었지만 민초 편의 종교였기 때문에 부흥했던 것임을 알아야한다.

이제 와서 왜 기독교가 기득권이 되었는가? 예수가 그 당시에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강자였던 바리새와 사두개와 서기관의 편에 서기보다 그들로부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세리와 죄인과 창기와 탕자의 편에 선 모습으로부터 반성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내가 통제를 하나? 하나님이 통제를 하나?

우리가 어떻게 돈과 신앙 문제를 조화롭게 할 것인가. 첫 번째는 통제다. 무엇을 통제하는 가와 누가 통제하는 가이다.

무엇을 통제하는가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안정성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부의 축적을 통해 나의 미래를 통제하겠다는 논리이다. 돈의 문제에 관한한 자유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안정성의 이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 믿음의 시금석이 있다. 덧없이 흘러가는 재물로 우리의 영혼을 통제할 것인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주권에 우리를 비움으로 그 안정성을 확보할 것인가가 충돌하게 된다.

사업이 어렵고 당장 내일 먹을 게 없으면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한다. 열심히 일해서 우리 미래를 통제해야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우리의 모습을 보라.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라고 예수는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결국 통제의 이슈가 누가 통제 하느냐와 연관된 것을 깨닫게 된다.

누가 통제를 할까. 내가 통제할까. 하나님이 통제할까. 산업혁명 이후로 모든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모더니티의 믿음과 과학의 힘을 가지고 모든 것을 통제 하는데 익숙해진 우리에게 성령의 바람이 들어올 곳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농축된 재화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면서 전능성의 힘을 가지게 되어버렸다. 토마스 머튼은 "현대 사회에서 돈은 성령이 교회에서 찾아야 할 자리를 악마적으로 찬탈해버렸다"고 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믿음을 떠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의존적인가, 독립적인가를 다투는 이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댈 것인가. 은퇴 자금에 기댈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주인을 정확하게 정할 필요가 있다.

썩을 재물과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어떻게 돈과 신앙 문제를 조화롭게 할 것인가. 두 번째는 가치의 이슈가 있다. 이 전 세계적 불황에서 모두가 고통 받는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을 선별적으로 뽑아주시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런 논리로 하나님을 검증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를 주시는 분이시다.

내가 신앙생활을 통해 얻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은 지금과 미래를 말하고 있다. 바울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내가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했던 그 여유를 보라.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서 세상이 나를 아무리 불쌍히 여겨도 내가 세상을 불쌍하게 여기는 진정한 가진 자의 여유를 가지자. 썩을 재물을 쌓지 말고 썩지 않을 영원한 부활을 하늘에 쌓아라. 가치를 기준으로 우리가 돈과 신앙이 부딪힐 때 어느 편에 강조점을 둘까를 판단해야 한다.

산상수훈에서 염려와 기도를 대조하고 있다. 염려할 만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라. 상황이 풀리던 안 풀리던, 사람의 이해와 기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안과 사랑이 바로 해법이 되는 것이다. 염려는 바로 세상적 가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반면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것이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십시오'라는 말을 묵상해보자. 기도의 진정한 정의는 무엇인가? '무엇을 얻게 해주십시오' 하는 기도는 기도를 빙자한 염려일 뿐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필립 얀시가 <크리스채니티투데이>에 사설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돈에 대해 성경은 세 가지 질문을 한다. 첫 번째, 당신은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가. 단순히 적법한 것으로 안 되고 하나님나라의 도덕에 비추어 엄격하게 봐야 한다. 두 번째,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가족이기주의적 입장에서 재물을 쓰고 있는가.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투자하고 있는가. 마지막 질문이 근원적 질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돈이 당신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업이 힘들어서 죽고 싶을 만큼 힘이 드는가. 은행 예치금이 없어져서 절망스러운가. 무엇이 여러분에게 안정감을 주는가.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한 편으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영적인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검토해볼 때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했다. 지금이 바로 '내 가치관은 무엇이고, 난 무엇에 기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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