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괴한 난장판 되어버린 한국 교회 회복하는 길
해괴한 난장판 되어버린 한국 교회 회복하는 길
  • 황은영
  • 승인 2010.01.18 22:3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교회의 종교개혁, 어떻게 가능할까

한국 교회의 2007년의 화두는 부흥의 초혼제였다. 90년대 초반까지 이루어진 성장 신화의 환상에 매몰된 교회는 몇몇 대형 교회의 성공 스토리 속에서 모두 양적 성장을 위한 ‘현란한 기술’을 추구해왔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동네 구멍가게보다도 못한 교회의 난립과 경쟁의 격화, 이로 인한 저질 목회자들의 난립과 말씀의 저질화, 성례전의 형식화를 가져왔다. 이는 교회의 영적 권위의 퇴보로 이어졌고, 삶과 말씀을 이어주지 못하는 교회의 저속화에서 드러난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쏟아졌다.

이 모든 것을 일거에 날려버리기 위한 전략이 부흥이었다. 제단을 쌓고 불이 내리기를 소망하고 자신을 자해했던 갈멜산의 사제들처럼. 이들은 기괴한 율동으로 그 몸을 찢고, 또 찢어지는 기성으로 자신의 목을 괴롭혔지만 그들이 기다리는 불은 오지 않았다. 왜? 그것은 그들이 바알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알을 섬기고 있는 한국 교회

우리는 종교개혁을 기린다. 근거 없는 거짓된 권위에 대해서 오로지 말씀과 복음에 의거해서 그 권위가 타락해 온 다양한 더러운 흔적들을 지우고, 인간적인 권위와 그로 인한 차별을 철폐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모든 사람들에게 열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종교개혁을 기리는 것은 단순히 개혁파나 루터교의 교단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이 실재로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초대 교회의 복음 선포로 향하게 하고 그 복음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어둠이 긴 만큼 빛에 대한 갈망이 깊어지며, 갈망이 깊어지는 만큼 곧 빛이 도래하게 된다면 한국 교회의 개혁이, 회복이 그만큼 임박해온 것은 아닐까. 한국 교회의 대다수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대체 어떤 회복을 추구해야 하는가? 즉 되돌려서 회복됨 즉 개혁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바라고 앞으로 이루어질 개혁은 어떠한 개혁인가?

무엇보다도 임박한 개혁은 말씀의 회복이다. 무엇이 말씀의 회복인가? 지금도 말씀은 넘쳐나지 않는가? 한국 교회에는 깃털같이 귀를 간질이며 매끄럽게 설교하는 명설교가들이 24 시간 TV를 통해서 아름다운 설교를 전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를 동경하는 무수히 많은 목사들이 이들의 방송을 보고 이들의 설교를 연습하고 흉내 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그를 동경하는 모래알 같이 헤아릴 수 없는 신학생들이 아름다운 음악적 기교로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길에 접어들고 있지 않은가? 길바닥에 차이는 게 목사의 설교 시디이고 테이프이다. 그런데 뭐가 부족하다고 말씀의 회복인가?

말씀의 회복은 복음의 회복이다. 그 복음은 곧 단순한 사실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병든 이 세계의 회복을 성취하셨고, 그를 믿는 사람들은 바로 그 회복을 먼저 누리는 구원의 삶으로 아무런 공로 없이 받아들여지고 또 그로 인한 새로운 삶의 은사를 누린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은 입술로, 피켓으로, 전도지로, 복음을 말로만 전파하지 않는다. 그것은 찢어진 스피커이고 깨진 종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의 삶으로, 성령에 의해서 흘러나온 사랑의 삶을 통해서, 복음을 전한다. 그 자신의 삶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공로 없는 믿음 속에서 성령이 그를 온전히 사로잡아서 그의 삶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의 삶의 원리가 흘러넘치는, 즉 성령의 권능인 사랑과 자유의 힘이 흘러넘치는 그러한 삶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미 천국의 복음의 증거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빛이 환히 빛나고 그리고 우리에게 미치고 또 우리를 통해서 뻗어가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전파하는 전령이며, 이점에서 그리스도의 오심 뿐 아니라 우리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 자체가 복음이다.

하기에 우리의 복음은 한갓된 말에 갇히지 않는다. 이미 우리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가 그의 피 값으로 사서 새롭게 태어난 새로운 삶을, 즉 병든 우주와 병든 인간의 세상이 앞으로 실현되게 될 새로운 삶을 앞당겨서 실행하는 삶이다. 바로 한국 교회의 문제는 바로 우리의 삶에 육화된 복음이 없다는 사실에 있으며 역으로 한국 교회의 회복은 바로 개별 기독인의 삶에서 육화된 기독인의 삶이 회복되는 사실에 있다.

이는 한국의 교회의 개혁이 시급하고 곧 이루어진다고 믿고 그것을 위해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러한 천국 복음, 즉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의 복음을 전파하게끔 요구한다. 그리고 그 지점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프로젝트를 요구할 것이다.

신학의 회복, 말씀의 회복

신학의 회복과 말씀의 회복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의 신학은 많은 부분 말 자체를 위한 말일 뿐이거나 혹은 다른 말을 찍어 누르기 위한 방편으로, 혹은 신학자가 교수직을 거래하기 위한 밑천이나 목사가 그 권위를 더하기 위한 자본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신학은 바로 교회를 위한 신학. 즉 기독인이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복음의 빛 속에서 살아가고 사유하고 행위 하게 해주는 사고의 틀로서의 신학을 필요로 한다.

신학은 고답적인 신학자의 두텁고 어두운 책상에서 해방되어서, 모든 기독인에게 하나님의 다스림에 속한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우리들의 고백의 이야기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신학은 천박한 이단 판별가의 둔탁한 칼이 아니라, 기독인이 성령의 열정을 가지고 옛 시대와 옛 에온에 사로잡힌 모든 실재에 대해서 예민한 지성과 용솟음치는 열정을 가지고 싸우는 예리한 검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모든 기독인은 그 삶에서 복음적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것을 위해서 투쟁하는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전문적인 목회자와 전문적인 신학자가 존재한다. 목회자는 돈 많은 장로나 혹은 돈 많은 교회 혹은 거대한 교회에, 다시 말하면 성장의 논리에 사로잡힌 이들이 아니다. 그는 그러한 지점에서 바알에 속해 있다. 신학자는 그들에게 매일 매일의 월급을 주고 더 나아가서 권위를 주는 교단의 패권적 지배에 메인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항상 고민한다.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라고. 옳은 것 같지는 않아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우리는 교회가 혹은 교단 신학교가 우리를 먹여 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물과 배를 버리고 쫓도록 하셨고, 두벌 옷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과 그 의로움을 구하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신다고 하셨다. 우리가 바알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얕은 지능을 가지고 이윤의 인과성과 정치적 산술을 계산하고 결국 현재 한국의 교회의 타락을 만들어낸 이들을 섬겨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현명한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의 오고 계심을 우리의 비전을 통해서 보고 이를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밖에 없다.

율법과 선지지가 가르쳤고 예수가 이룬 삶으로의 회복

평신도의 삶의 회복이다. 목회자와 신학자와 평신도 사이의 위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나눈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에 복음의 내용이 바로 서 있고 이것이 설교단에서 온전하게 선포되었는데 평신도의 삶이 패역하다면, 우리는 그 지점에서 성령이 떠나셨다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복음의 내용이 흐려져 있고, 고작 예천불지 수준의 저열한 겁박만이 횡행하거나 혹은 심리적 위안을 주는 돌팔이의 교리만이 떠돌아다니거나 혹은 물질적 성공과 대인 관계적 성공을 이야기하는 악마의 잡설이 설교단을 감싸고 있다면, 한국 교회의 평신도의 삶의 질적 저하의 책임은 바로 직접적으로 무능하고 저열한 성직자 그룹에게 있다.

우리는 개혁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바로 복음의 전파와 확고한 정립을 통한 평신도의 삶의 회복에 그 목표를 두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직자가 평신도에게 선사하는 시혜적 지도가 아니다. 이것은 목회자과 신학자 그 자신의 삶은 물론 일반 평신도의 삶 모두를 포괄하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의 삶의 모습과 꼴의 회복인 것이다.

자 그럼 평신도의 삶의 회복은 무엇인가. 아니 그리스도인의 삶의 회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전적인 돌이킴으로서의 회복이다. 무엇을 위한 돌이킴인가? 그것은 이전의 자기 사랑에 휩싸여서 자신이 신인양 쾌락을 누리고 권력을 누리고 또 자신이 신인양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배우고자 하지 않던 게으름의 삶에서 벗어나서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에 휩싸여서 자기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드리는 것이다.

여기서 기존의 한국 교회는 마치 교회 벽돌과 앰프 껍데기를 사서 모으는 데 돈이나 바쳐라, 노력 봉사를 위해서 시간을 바쳐라 식으로 오용해 왔다. 하지만 이미 예수는 그 모든 거짓된 하나님 숭배의 탈을 쓴 자기 숭배에 대해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으리라 말씀하신 바 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드리는 것은 곧 그 자신을 이웃을 위해서 바치는 삶이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저 먼 허공에 뒷짐을 지고 앉아있는 내 머리 속에서 윙윙거리는 가상의 그분을 위해서 바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희미한 목소리는 결국 그 상징을 조작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야비한 혹은 우둔한 성직자들에게 오용되곤 한다. 자신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삶이란 바로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언제나 그 뒤에 서 계시는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모두 드리는 삶이다.

자신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삶이란 결국 하나님의 법, 즉 하나님을 우리의 정서와 의지와 지성을 다해서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나 자신의 삶만큼 사랑하는 것을 성령의 힘에 의거해서 그 삶에 온전히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삶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삶은 단순히 우리의 사적인 일상사에서 교양 있는 얄팍한 친절함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노력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정서와 의지와 지성을 다해서 고통 받는 이웃의 삶을 통해서 들려나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삶이다. 우리는 중산층 기독인의 벽을 치고, 그 벽안에서 고통 받는 이웃에게 무감정하게 계산을 토대로 이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을 통해서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목소리에 우리의 정서를 가지고 끌려갈 수 없다.

더 큰 사회적 차원의 선한 정책에 대한 지적인 고민 없이, 간헐적인 자선쇼를 통해서는 우리는 역시 고통 받는 이웃의 목소리를 분별 있게 들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재산과 안락함을 지키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단순하게 가벼운 여흥으로서 이웃 사랑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역시 이웃의 목소리를 위해서 우리의 삶을 바치는 의지를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이웃의 고통에 무감각해서는 이웃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그 속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우리는 이웃의 고통의 근원과 해결책을 분석적으로 사유하지 않고는, 이웃의 신음소리를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며, 그 속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허탄한 감상주의와 섞여버린다. 우리가 이웃의 고통을 치유할 의지에 사로잡히기보다는 나의 미래의 고통을 차단한 안락에의 의지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고통 받는 이웃의 목소리를 향해 우리의 몸을 돌릴 의지를 가지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음성에 따르지 못하게 된다.

바로 평신도의 삶의 회복이란 율법과 선지지가 가르쳤고 예수가 이룬 삶,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지성과 의지와 정서를 다해서 돌아가는 회복인 것이다. 칭의의 복음은 바로 여전히 실패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서 하나님이 제공하신 약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칭의가 우리의 삶의 방종과 나태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활용된다면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오물구덩이에 처넣는 꼴이며, 한국의 교회의 개혁이 시급하고 곧 이루어진다고 믿고 그것을 위해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유명무실해진 말씀과 성례전과 권징

결국 이것은 말씀과 성례전 그리고 권징의 회복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 교회에서 말씀과 성례전 권징은 이미 죽어버린 지 오래이다. 권징은 교회 간의 경쟁 체제에서 이미 용도 폐기된 것에 불과하며 혹은 간헐적으로 교회 내의 정치 투쟁의 효율적 무기로 악용되는 것에 불과하다. 성례전은 이미 무의미하게 빵 먹고 포도 주스나 마시는 퍼포먼스로 전락해버렸다.

설교는 이제 두렵고 떨림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리가 아니라, 신도 유치를 위한 교회의 경쟁력의 하나로 이해되던가, 교회 내의 권력 투쟁을 잠재우는 프로파간다로 활용되던가, 혹은 예배의 필수 장식품으로 전락되어버렸다. 한국 교회의 위기는 다름 아니라 참된 복음과 복음적 삶이 설교단에서 전파되지 않고, 또 그러한 복음의 내용이 성례전이라는 형식과 분리되어 제 갈 길을 가는 데 있으며, 복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교회 공동체 내에서의 서로의 덕을 세우는 진지함이 결여된 점에서 온다.

실재로 이 세 가지는 한국 교회에서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버렸다. 설교 시간에 흘러나오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치열한 성찰과 신학적 고민을 반영하기보다는 단순히 즐거운 여흥의 하나로 전락되어 버렸고, 성례전은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연합이라는 심오한 사상에 대한 이해 없는 공허한 집단 퍼포먼스로 꺼져버렸고, 권징이야말로 그야말로 고객을 자기 발로 내쫒는 바보 같은 짓이 되어버렸다.

이제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켰냐고, 이것은 심지어 양적 성장은 질적 성장의 결과물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정당화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 목표를 위해서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쇼맨쉽, 혹은 화려한 교회 성전, 정교한 프로그램, 사역자들의 사역 스킬, 혹은 인맥 가능성 등이다.

이 모든 난장판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로 말씀과 성례전 그리고 권징을 복음의 진리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교회적 실천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가 바로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의 그리스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다스려짐으로 편입됨,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우리의 것으로 덧입게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서 우리의 옛 자아를 죽여 나가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서 우리의 새로운 자아를 우리 몸 안으로 덧입혀나간다.

그렇다면 바로 설교 역시 이러한 그리스도의 연합에 철저히 근거지워져서 왜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아갈 것 인가를 다루어야 한다. 또한 성례전 역시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이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어떻게 내주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나서 바로 성례 속에서 그 내주하심을 받아야 한다.

또한 권징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무엇이 그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무엇이 맘몬을 섬기는지를 분별할 수 있고, 그 분별을 토대로 자신의 형제자매들에게 훈계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권징은 아마도 상업화된 교회 시장 속에서 교회의 자리를 더욱 더 좁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징의 목적은 배제가 아니라 서로 덕을 세움에 있다.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못하는 이들, 여전히 자기 사랑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맘몬을 섬기는 이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돌이키게끔 권고하는 것은 형제와 자매들의 의무이다. 그리고 바로 교회의 존재의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서 자신을 버리는 자기 부인을 실행하는 거룩한 공동체여야 한다.

복음을 오해한 한국 교회

기존의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실천하고 살아왔다는 데 있다. 한국 교회는 그 동안 복음을 단순히 지옥 갈 영혼이 의롭다 여김을 받고 천국에 가게 되는 것으로만 이해해왔다. 하기에 복음은 명제적으로 간결하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복음서를 본다면, 그리고 바울의 서신을 읽는다면, 성경이 전하는 복음은 단순한 내세적 겁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성경이 전하는 복음은 간단하게도 결국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다. 성경이 전하는 복음은 단순히 죽은 영혼이 기타를 치고 명상하고 생명나무나 따먹고 물장구나 치는 내세의 복음으로 환원될 수 없다.

성경이 전하는 복음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드러나는, 병든 세계를 회복해나가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그리스도의 삶에서 이루어지고, 십자가를 통해서 이전의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리심 속에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고, 교회는 바로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 속에서 세계의 완성을 증거한다는 기쁜 소식이다.

하기에 우리가 전할 바는 한갓된 말이 아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하는 바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 그 자체, 즉 우리의 삶인 것이다. 천국 복음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기쁜 소식은 결단코 설명되거나 진술되거나 혹은 서술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오로지 보여 지고 맛보여지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이다.

황은영 / 예일신학교 기독교 윤리 석사과정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SunnyBoaz 2010-01-20 09:20:01
황은영님의 진단과 치유법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참된, 성경적 교회의 3대 지표가 순차적으로 회복되고, 여호와의 영광이 개개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지역교회에서 드러나게 될 때에야 비로서, 한민족 교회는 지난 100년간 존재하던 과도기 상태의 교회를 벗어나서, 한민족 120년 교회사 가운데 1910년 이전처럼 참된 교회로 탈바꿈 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자비를 간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