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처치와 가정 교회
메가처치와 가정 교회
  • 이원석
  • 승인 2010.02.28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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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희망, 제자들의 반란'(1) 왜 [바울의 공동체 사상]인가?

한국 교회에 가정 교회 바람이 불고 있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는 제도화 과정에서 상실한 역동성을 발견하기 위해, 더 중요하게는 양적 성장을 위해 가정 교회가 그 대안으로 존중받고 있다. 가정 교회의 핵심은 소그룹인데 알고 보면 한국 교회의 소그룹 운동은 그 역사가 제법 오래된다. 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이하 순복음교회)가 1964년에 시작하여 한국 교회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한 구역 모임을 염두에 두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순복음교회의 성장 원인으로 두 가지를 꼽는데, 성령의 역사와 구역 조직의 운영이 그것이다. (그는 교회가 커 갈수록 소그룹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게 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한 통계에 따르면 1967년에 126개의 구역과 7,760명의 교인, 1977년에 2,055개의 구역과 4만 8,975명의 교인, 1985년에 4만 3,834개의 구역과 50만 3,041명의 교인으로 발전했다. 이렇듯 구역 조직 운영을 통한 순복음교회의 팽창은 여러 교회에 영향을 끼쳤다. 셀 교회의 대부격인 랄프 네이버 박사도 셀 교회론(<셀 교회 지침서>,<새로운 삶의 실천>, <그리스도의 몸> 등)을 형성하기 전에 순복음교회를 직접 수차례 방문해서 구역 조직에 대해 배웠다.

분명 구역 조직은 교회의 유기체적인 성격을 부각시키고, 교인의 은사와 잠재력을 펼칠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초대 교회가 대체로 가정에서 소모임으로 모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정 교회와 일정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초대 교회가 아직 성직자와 평신도의 이원적 구조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구역 모임 특유의 평신도 리더십 활용은 더 주목할 만하다(혹은 여 전도사를 중심으로 운영되는데, 이 또한 초대 교회가 여성 리더십을 존중하고 잘 활용했다는 사실과 유사한 면이 없지 않다).

   
 
  ▲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의 최영기 목사가 생각하는 가정 교회는 경건주의식의 ‘교회 안의 작은 교회’에 가깝다.  
 
구역예배와 가정 교회의 유사성

하지만 구역 모임의 평신도 리더십은 성직자, 특히 담임목사의 통제 하에 있다. 교회에서 제작하거나 선택한 교재를 사용하며, 교재 활용 방식과 전달 메시지에 대한 사전 강습을 받고 그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 결국 구역 모임은 담임목사를 정점으로 한, 잘 짜여 있는 위계에 자리하고 있다. 사랑의교회를 위시로 널리 확산된 제자 훈련 또한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요새 유행하는 가정 교회는 구역 모임보다는 진일보했다. 기존의 구역 모임은 예배가 중심이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정해진 공과 교재로 소규모의 예배 모임을 드린다(서울말씀사에서 출간된 조용기 목사의 <구역예배 공과> 시리즈 각권의 서두에는 항상 ‘구역예배 순서’와 ‘구역예배 공과 사용법’이 나온다). 인격적 측면보다 형식적 측면에 상대적으로 비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논의되는 ‘가정교회론’은 바로 이 인격적 측면을 강화한 소그룹 모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령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의 최영기 목사가 생각하는 가정 교회는(<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가정 교회로 세워지는 평신도 목회>, <성도의 속마음> 등) 경건주의식의 ‘교회 안의 작은 교회’에 가깝다. 무슨 말인가? 가정 교회란, "평신도가 지도자가 되어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이다.

최영기 목사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 도시마다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도시에 교회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에베소에는 에베소교회 하나, 로마에는 로마교회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시마다 집집에서 모이는 수많은 가정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는 가정 교회라는 이름 하에 모이는 것을 교회 안에 속한 하나의 소그룹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작은 교회로 볼 것이냐의 문제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설혹 가정 교회의 리더가 평신도라 하더라도 그가 짊어지는 리더십의 무게는 증폭된다. 하나의 가족으로서건(가정 교회), 세포로서건(셀 모임) 이 소그룹 안에서 작동하는 리더십과 멤버십의 관계는 자기 충족성을 띤다.

지역 교회와 가정 교회들

가정(혹은 어느 공간이 됐건)에서 모이는 소그룹을 자기 충족성을 가진 모임, 즉 사실상의 교회로 상정할 때에 어려움이 발생한다. 지역 제도 교회의 패러다임과 가정 교회의 패러다임이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는 제도 교회의 권위에 대한 강한 비판을 내포한다. 그런 의미에서 휴스턴 서울한인침례교회를 위시해 여러 교회들이 가정 교회 운동을 도입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가정 교회의 본의와 엇갈리는 지점이 있는 듯하다. 애초에 가정 교회 도입의 의도가 교회의 양적 성장에 있기 때문이다.

가정 교회는 그 자체로 교회이다. 따라서 가정 교회의 성장이 곧 지역 교회의 교세 확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가정 교회들을 포괄하는 지역 교회의 담임 교역자가 각 가정 교회를 직접 통제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제도적 틀을 넘어선 인격적 관계에 가정 교회의 본령이 있다. 곧 교제를 강조하는 관계 공동체로서 이익 집단과 구별되는 인간의 얼굴을 한 교회가 가정 교회이다.

즉 가정 교회는 제도화의 길에 들어서기 이전의 원초적 양태에 해당한다. 바로 이것이 일군의 신약학자들이 가정 교회에 주목하는 이유이다(가령 홍인규의 '바울과 가정 교회'(<한국 복음주의 신약학 연구> 제2권, 도서출판 바울서신)나, 조병수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신학정론> 38 - 20권 1호) 등). 신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회의 양태는 기본적으로 인격적 관계를 강조하는 소그룹이라는 것이다.

   
 
  ▲ 로버트 뱅크스가 보여준, 모든 교인이 각자의 은사에 따라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상황과 심리의 변화에 따라 예배가 개방적으로 진행되는 놀랍도록 신선한 교회 모델에 나는 설복됐다.  
 
교회의 근간, 제도냐 교제냐

내가 가정 교회를 대안적 패러다임으로 생각하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과 관련이 있다. 그 계기는 호주의 신약학자인 로버트 뱅크스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신약학자이기 전에 대표적인 가정 교회 지도자이다. 여러 가정 교회 지도자들이 있지만, 신약학자답게 그가 내놓은 가정 교회 관련 서적은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목사와 여타 교인은 단지 기능적으로 구분(소위 은사의 차이)되는 것이 성경적으로 분명한데도 한국 교회의 조직 구조와 작동 원리는 이를 배척하고 있었다. 목사와 (소위) 평신도 사이에 위계적 구별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로버트 뱅크스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여 주었다. 모든 교인이 각자의 은사에 따라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상황과 심리의 변화에 따라 예배가 개방적으로 진행되는 놀랍도록 신선한(동시에 교회 초기에 실존했다고 하는) 교회 모델에 나는 설복됐다. 이게 초대 교회의 모습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교회에 대한 반감과 고민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초대 교회로 돌아가라는 말을 이만큼 웅변적으로 들려 준 책이 없었다.

물론 제도로서의 교회도 하나님의 우주적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이다. 또한 교회가 지금껏 형성되어 온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제도 교회가 여전히 주류를 이룰 것이고, 결국 메가처치(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가 이합집산하리라고 생각한다(승자독식 교회). 하지만 교단 중심의 제도교회로부터 벗어나 가정 교회를 추구할 이들 또한 점증할 것이다.

제도 교회에서 가정 교회로

현재 여러 대형 교회들이 가정 교회 운동을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가정 교회란 인격적 관계가 가능한 규모와 운영 방식을 전제한 개념이다. 메가처치는 가정 교회가 될 수 없다. 가정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교회의 규모와 운영 방식을 재구성한다면, 구성원이 서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돌아볼 수 있는 소그룹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소그룹의 구성 토대는 신앙이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성찰은 결국 만인사제직의 성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평신도(종종 병신도(病身/信徒)라고 불리는)의 내적 각성은 메가처치의 독식 현상과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 한국 교회는 메가처치와 가정 교회의 양극화로 특징될 것이다. 비록 양적으로는 메가처치에 더 많은 비중이 쏠리겠지만, 교회의 진정한 영향력에 있어서는 결코 가정 교회를 간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제 촛대가 옮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독자들은 앞으로 중대한 교회론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이 로버트 뱅크스의 <바울의 공동체 사상>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원석 / <복음과상황> 편집위원, 연구집단 카이로스 연구원

* <복음과상황>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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