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밤나무'와 '너도 교회'
'너도밤나무'와 '너도 교회'
  • 권연경
  • 승인 2010.03.10 18: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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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희망, 제자들의 반란'(2) 교회의 '자폐성'이 복음 진로 막는 방해꾼

너도밤나무라는 나무가 있다. 우리 주변에는 잘 안 보이지만 한때 내가 살았던 런던이나 뉴욕에는 가로수로 너도밤나무가 많았다. 이 나무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옛날, 산신령이 무슨 일인지 산 아래 마을 사람들에게 단단히 화가 났다. 마을 사람들이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싹싹 빌었더니, 산신령은 그러면 자기가 사는 산에 밤나무를 백 그루 심으라고 했다.

겁이 잔뜩 난 마을 사람들은 백 그루를 심고서는 혹시라도 모자랄까봐 세고 또 세어 확인을 했다. 그런데 산신령이 내려와 나무를 세어 보니 한 그루가 빠지는 거다. 또 세어 보아도 마찬가지다. "구십칠, 구십팔, 구십구." 더 이상 셀 나무가 없었다. 이젠 죽었구나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조그만 나무 하나가 모기만한 소리로 "백" 하고 나섰다. 그러니까 산신령이 고개를 돌려 "너도 밤나무냐?"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후 그 나무를 '너도밤나무'라고 했다나 뭐라나.

어쨌든 너도밤나무는 가시가 훨씬 부드럽고 뭉툭하여 진짜 밤나무와 다소 차이가 난다. 하지만 속을 까 밤송이를 꺼내면 밤과 거의 비슷하다. 오히려 색이 더 진하고 마치 기름을 살짝 바른 것처럼 윤기가 돈다. 속을 열어 보아도 정말 밤 같다. 그래서 기분 좋게 한 입 깨물면 그제야 진한 배반감과 후회에 치를 떤다. 기대했던 고소함 대신 떫은맛만 입 안에 꽉 찬다. 그러면 “너도 밤나무냐?” 하며 던져 버린다. 나도 런던의 교회 앞에서 한번 그랬다가 아예 담장에 내던지고 구둣발로 밟아 버린 적이 있다. 밤 따먹을 일이 없는 산신령은 속아 넘어갈지 모르지만, 밤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은 못 속인다. 맛이 없으면 버림받는다.

성장과 성공, 복음의 진로 가로막는 방해꾼

제자들이란 천국의 백성 혹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짠맛과 빛을 드러내는 존재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사항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단순히 ‘너희는 소금이다’ 혹은 ‘너희는 빛과 같다’ 하는 식으로 비교하지 않고 ‘땅의 소금’ 그리고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빛이 아니라 제자들이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세상이 가진 나름의 빛을 그대로 발산해 내는 존재들이 아니라, 예수님께로부터 천국 복음의 빛을 받아서 그것을 어둠 속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비추는 존재다. 즉, 제자들은 세상을 위한 빛, 곧 세상에 빛을 비춤으로써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혹은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섬기는 빛이라는 것이다. 애매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땅의 소금’이라는 표현 역시 같은 생각을 전달한다고 볼 수 있다. 땅은 세상의 다른 말로 쓰인 것이며, 따라서 땅의 소금이라는 것은 곧 그 짠맛으로 땅을 이롭게 할 소금이라는 의미다.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은 우리가 어차피 제자된 마당에, 이제 어떻게 할까 하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다. 이 말씀은 제자됨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애초부터 제자들이란 짠맛을 유지하면서 세상에 빛을 비출 목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땅을 이롭게 해야 할 소금이며, 이 세상을 밝혀야 할 빛’이라고 선언하셨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 어둠에 있는 자들을 밝히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제자들이 이 땅에 사는 이유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동일하다. 예수님은 천국을 도래케 하는 하나님의 메시아로서,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큰 빛을’ 비추기 위해,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기’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마 4:16). 그리고 이 빛의 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해 제자들을 자신과 같은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어둠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천국의 빛을 비추기 위한 것이었듯, 제자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바로 아직도 어둠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비추기 위함이다.

우리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른다. 교회가 자기 나름의 원리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적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그 뒤를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제자들의 모임이라면, 여기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은 바로 오늘 교회를 위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이 세상에 교회라는 이름을 달고 존재해야 하는 유일한 목적은 이 세상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독자적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집단이 아니라 애초부터 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다. 높은 바위섬 위에 세워진 등대가 자신의 멋진 위용을 마음껏 뽐내기만 하면 되는 예술품이 아닌 것처럼, 세상이라는 산 위에 지어진 교회는 자기의 아름다움에 취해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어두운 바닷길을 항해하는 배들에게 빛을 비추는 것이 등대의 존재 목적이다. 마찬가지로 어두운 삶의 길을 더듬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의 빛을 비추는 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다. 교회가 세상을 위한 존재임을 망각하여 자신의 행복에 도취한다거나, 심지어 이 세상과 경쟁하는 또 하나의 집단으로 살아간다면 교회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들에게 밟힐’ 수밖에 없는 모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성장과 성공을 외쳐도 예수님이 수행하시는 천국 사역에는 아무 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오히려 복음의 진로를 가로막는 방해꾼이 되고 말 것이다.

앞에서 너도밤나무의 예를 들었다. 만약 교회가 맛 잃은 소금처럼 교회다운 맛을 내지 못하면 “너도 교회냐?” 하며 버림을 받을 것이다. 설사 다른 속셈이 있어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지는 몰라도 구원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교회가 무의미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교회 간판을 내리고 대신 ‘너도교회’라는 이름을 달아 줄 것이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표현을 빌자면 다른 곳으로 ‘촛대를 옮기는’ 일인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것이 곧 선교

교회가 세상을 위한 공동체라는 중요한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요한복음 17장을 보자. 17장은 흔히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전’ 곧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고, 승천하실 때가 되었음을 인식하고(요 13:1),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 같은 설교를 하신 후 드리신 기도다. 산상수훈이 예수의 첫 ‘취임 연설’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중요하다면, 요한복음 17장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의 사역을 정리하는 마지막 ‘결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제자들 역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요 17:14, 16). 물론 이것은 예수님의 설교 중에 이미 나온 사항이다(요 15:18~19).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게 나타나는 사항 중 하나가 이 세상과의 구별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다 마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아들 예수와는 달리, 그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 더 머물러야 한다(11절). 물론 예수께서 먼저 가셔서 처소를 예비할 것이지만(요 14:1~3),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지금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때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아버지께서는 자기를 사람들에게 계시하기 위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아들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람들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셨다. 그리고 이제 돌아가실 때가 이르러, 아버지께서 자기를 보내신 것과 같이 자기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 아직도 하나님을 알고 영생을 얻어야(17:3) 할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아버지께 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다. 제자들이 아직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갑자기 손님들이 들이닥쳐 방 정리를 할 동안 잠깐만 밖에 있으라고 하는 것처럼, 먼저 가서 처소를 예비할 동안 아쉬운 대로 좀 참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일부러 이 세상으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이 ‘파송’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실 때와 마찬가지로 뚜렷한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마치 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을 위한 천상의 계시자로 일하셨던 것처럼, 이제 제자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동일한 명령을 받은 존재로서 이 세상에 남아 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있어 이 땅에서의 삶은 그 자체가 선교인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가 했던 일을 할 뿐 아니라 더 큰 일까지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

교회에 가장 치명적인 실수 초래하는 '자기만족'의 유혹

제자들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계속 세상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이신 예수를 선포하고, 이를 통해 예수께서 아버지의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도록 하는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자기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 두셨다는 의미에서, 이 땅으로 보내진 제자들의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도가 아직은 제자가 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도로 확대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이 기도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예수님의 관심사는 지금 그와 함께 있는 현재의 제자들만이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기도하는 내용은 제자들의 연합인데, 의미심장하게도 이 제자들의 하나됨은 제자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 곧 앞으로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곧 제자들이 서로 연합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세상은 이것을 보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자들이 하나되는 것은 이를 통해 세상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므로 연합을 그 특징으로 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선교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의 삶이 ‘선교적’이라는 것은 제자들이 다른 목적을 위해 살다 보니 생겨나는 부대적인 결과가 아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제자들의 선교적 성격은 제자도의 본질에 속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동일한 관심사를 23절에서 다시 한 번 표현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예수께서 제자들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예수의 메시아 되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려는 선교적 목적 때문이다. 제자들의 하나됨이 다른 이유로도 중요할 수 있지만, 그것은 현재 예수님의 관심사가 아니다. 적어도 이 기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목적은 선교적인 것이다. 세상이 제자들을 보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도록 하시기 위해 제자들의 연합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항상 직면해 온 자기만족의 유혹은 경계해야 할 가장 치명적인 실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고백서인 아우그스버그 신앙고백서에는 “교회란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가 올바르게 시행되는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교회와 하나님나라’라는 강연으로 잘 알려진 피터 쿠즈믹이라는 유고 출신의 신학자는 “교회는 종말론적 안목을 결여하고 있다”며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생각할 것”을 주창했다. 또 “자칫 교회가 세상에서 맡고 있는 선교적 직무를 잊어버리고, 교회로 하여금 이른바 교회중심주의(ecclesiocentricity)로 빠지게 된다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온전한 의미에서 성경적 교회론은 선교(missio) 없이는 결코 모임(교회 : congregatio)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표명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교회 생활이 신앙생활과 같다는 생각은 자폐 증상

한국 교회처럼 선교에 열심을 내는 교회를 두고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선교를 태만하게 할 위험을 논하는 것은 일견 어불성설인 듯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열심을 분출하는 하나의 통로로서 선교 ‘사역’을 생각하기 이전에 제자된 우리의 삶이 가진 선교적 본질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먼 곳에 복음을 전하러 가는 몸짓 이전에, 어디를 가든지 가지 않든지, 혹은 우리가 말로 복음을 전하든지 전하지 않든지, 우리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교적 정황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제자들의 삶을 규정하는 이런 ‘선교적’ 본질을 깊이 인식하고 그 본질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면, 그리고 우리의 ‘선교’ 활동 역시 이런 선교적 본질의 자연스러운 표출이었다면,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 받고 있는 많은 비난과 비웃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주 듣는 선교 현장에서의 불미스러운 ‘추태들’ 역시 없었을 것이다. 선교적 본질을 망각하고 살다 보니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고, 선교적 본질에 대한 깊은 숙고 없이 선교하겠다고 나서니 오히려 부작용만 난무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한국 교회는 너무 자폐적이다. 교회 자체가 성도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어 버렸다. 소위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매개 수단이어야 할 것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우상화되었다는 말이다. 옛날 이스라엘이 성전을 우상화했던 것처럼 말이다. 교회 생활이 신앙생활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자폐증의 전형적 증상이다. 훈련소에서 한 열심을 전쟁의 승리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이 교회 안에 있다.
 
자폐적일수록 외부 세계와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이런 자폐적 이기성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큰 ‘세력’이 되어 버린 대형 교회에서 더 잘 드러난다. 덩치가 크면 그만큼 파장도 크다는 것은 상식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큰 덩치들에게 그에 어울리는 책임을 주문한다. 최근 이슈가 된 사랑의교회 예배당 건축의 경우가 그렇다. 사람들은 교회에게 덩치가 큰 만큼 책임 있는 행동을 하라고 촉구하는데, 정작 교회는 “우리가 잘못한 것이 뭐냐?”고 따진다. 이런 식의 대응은 “내가 당신들을 섬기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롭겠습니까?” 하는 물음이 아니라 “내가 필요해서 내 돈으로 건물 짓는데 왜 감 놔라 배 놔라 하느냐?”는 식의 배짱이다.

성경적 관점에서 이는 교회의 선교적 존재됨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세속적 발상이고, 더 나아가 세속적인 수준에서조차 그 큰 덩치 속에 내포된 사회경제적‧정치적 위력을 애써 모른 척하는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를 처음부터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복음주의권의 대표 주자를 자처하는 교회의 의식 수준이 그 정도라는 것이 우리를 절망스럽게 한다. 어쩌면 그런 행태가 자주 반복되어 이제는 그것이 왜 문제인지도 느끼지 못하게 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담임목회자 지위 세습이 더 이상 큰 이슈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한국 교회가 가진 자폐성의 가장 큰 폐해는 교회의 임무 수행을 어렵게 한다는 데 있다.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제자들이 제자들처럼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 교회는 나름 제자 훈련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제자 훈련이란 ‘아류 목회자 만들기 운동’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목회자가 할 일들을 나누어 주고, 그것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훈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예수의 제자답게 살아가도록 돕는 훈련과 거리가 있다. 오히려 교회 가서 제자 훈련 받느라 일상에 방해받기도 한다.

다시 전쟁 비유를 쓰자면, 이는 실전에 배치될 병사들을 불러다 훈련소 조교로 만드는 것과 같다. 이런 훈련은 전략 강화가 아닌 패망의 지름길이다. 그런 상황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을 두 부류다. 무조건 자기가 맡은 훈련소가 잘 되기를 바라는 훈련 소장의 근시안적 성취욕과 무서운 실전보다는 안전한 훈련소를 선호하려는 병사들의 유약한 이기심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많은 경우 제자 훈련이란 세상의 필요는 무시한 채 교회만 잘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의 근시안적 성취욕과, 무서운 세상과 직면하여 싸우기보단 안전한 예배당 안에서 할렐루야만 외치고 싶은 성도들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어권 학자들이 종종 말하곤 하는 소위 ‘거룩하지 못한 결탁’(unholy alliance)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제자 훈련에 가장 열심이던 교회가 지금 가장 따가운 시선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거룩하지 못한 결탁, ‘제자 훈련’
 
이런 상황에서 '이건 아닌데' 하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성도들이 늘어 가고 있다는 것은 한 줄기 희망의 빛이다. 교회 생활로는 해소되지 않는 생명의 역동을 느끼는 이들의 ‘거룩한 불만’이 제자들의 교회를 일구어 내는 새로운 물줄기가 될 것이다. 사실 기존의 흐름을 목소리 높여 비판하는 것도 당사자들이 생각을 바꿀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거룩한 불만을 가진 이들의 관점 형성을 도우려는 의도가 더 크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시공에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함의 소명이 드러나고(벧전 2:9), 이 거룩한 부르심을 공유한 자들(히 3:1)이 함께 예배하고 생명을 주고받는 공간으로서의 모임(교회)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제자다운 면모를 갖추어 갈수록, 교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 역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교회에 대한 고민이란 실상 우리 삶의 무력함에서 파생된 부산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이런 갈급함을 돕는 것이 제대로 된 의미의 제자 훈련일 것이다.

권연경 / 안양대학교 신학과 교수

* <복음과상황>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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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무 2010-05-12 10:08:24
너무나 공감이가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이런 교수님이나 이러한 생각과 믿음을 가진 소수의 남은자들을 통하여 복음과 진리를 수호하실 것이고, 하나님 나라는 교회라는 굴레를 넘어 모든이들에게 골고루 이루어 나감을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