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없는 예배, 소용없는 예배
소통 없는 예배, 소용없는 예배
  • 김성한
  • 승인 2010.09.13 00:5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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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하나님나라⑨ 예배와 소통에 관한 세 가지

내가 자라온 교단 전통에서 아이콘(ICON, 성화)과 아이콘의 사용은 위험하거나 우상숭배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었다. 예배당 안에서 십자가를 사용하는 것도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이끌 수 있다는 이유로 금기시되는 분위기였으니 아이콘을 교회에서 만나 볼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콘은 아니지만 예배당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에서 꼭 마주쳐야 했던 멋진 남자가 그려진 그림은 아직도 생각이 난다. 장발의 아저씨는 폭풍 속에서 아주 침착한 미소로 배의 키를 잡고 있었다. 동일한 분이 다른 곳에서는 밤에 문을 두드리며 서 계시곤 했다. 

이 모두가 역사적으로는 '성상'에 대한 옹호 그리고 파괴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이콘의 사용을 둘러싼 교회의 의견 차이는 하나의 교회를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누어 놓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아이콘은 우리가 예배하는 예배의 대상이신 삼위 하나님이 깊은 사귐, 소통과 연합 가운데 계신 분임을 잘 보여 준다.  
 
하지만 아이콘에 대한 막연한 저항과 낯섦을 넘어서 새롭게 다가온 아이콘이 있었으니 그것은 러시아의 유명한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의 '삼위일체(Holy Trinity)'였다. 이 아이콘과 함께 예배와 소통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이 아이콘은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러시아 성인인 세르기(1313~1392)를 추모하기 위해 1425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아이콘은 창세기 18장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세 천사의 이야기를 그 배경으로 한다.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불식간에 하나님의 천사들을 영접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삼위 하나님의 연합과 신비를 드러내는 아이콘으로 변화된 것이다.

마르바 던의 도움을 받아서 아이콘을 살펴보자. 우선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의 옷 색깔에 주목하게 된다. 파란색은 신성을 상징한다. 가운데 앉은 이는 인성을 상징하는 붉은색의 옷을 파란색의 겉옷으로 덮고 있다. 그리고 머리 뒤로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가운데 앉은 이가 성자를 상징한다. 성자의 오른편에 앉은 이는 신성을 상징하는 파란색(blue) 옷을 생명을 상징하는 푸른색(green) 겉옷으로 덮고 있다. 그리고 머리 뒤로는 높은 바위산이 보인다. 오른편에 앉은 이가 성령을 상징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자의 왼편에는 파란색 옷을 아주 조금 보여 주며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색깔의 겉옷을 입고 있는 분이 보인다. 그리고 머리 뒤쪽으로는 집이 보인다. 이 분이 성부시다.

손 대접을 할 때 아브라함이 음식을 내어 놓았을 사각 테이블의 삼면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둘러 앉아 있다. 마르바 던은 비어 있는 성자의 맞은 편, 비어 있는 자리에 나아와 삼위께서 나누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영성 생활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성삼위께서 세상의 근심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 누군가의 분투와 승리를 함께 기뻐하시는 이야기, 누군가의 슬픔과 고통에 함께 눈물 흘리는 이야기를 듣고 거기 참여하는 것이 기도요, 영성 생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와 소통

또한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아이콘은 우리가 예배하는 예배의 대상이신 삼위 하나님이 깊은 사귐, 소통과 연합 가운데 계신 분임을 잘 보여 준다. 지난 두 학기 동안 신학교에서 ‘예배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면서 우리가 예배하고 있는 삼위 하나님이 깊은 소통과 연합 가운데 계신 분이기에 예배의 자리는 삼위 하나님과 깊이 소통하는 자리여야 한다는 생각을 깊이 확신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소통하시는 하나님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소통하시는 하나님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소통하시는 하나님이다. 삼위일체라는 신비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소통하시는 하나님이다. 이러한 신비한 연합, 긴밀한 소통, 영원한 사귐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 메시지가 곧 매체가 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통해 이 영원한 사귐의 자리에 초대하시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이 자리로 이끄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깊은 소통과 사귐 가운데 계신 삼위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그 예배 역시 깊은 소통과 사귐을 경험할 것이며 그렇게 예배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둘러 싼 이웃들과 예배에서 경험한 방식으로 소통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와 소통에 관해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다음의 세 가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예배에서 쌍방향의 소통, 참여적인 소통이 일어나는가

예배에서의 소통을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교를 생각한다. 물론 예배에서 설교는 직접적인 소통의 한 모습이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구두 커뮤니케이션(verbal communication)이 주가 되고, 절대 다수를 향한 한 사람의 일방적인 소통(one-way communication)이 될 가능성이 많은 설교가 예배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전부로 여겨진다면 이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앞에 서 있는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앉아야 하는 공간의 배치, 직분을 맡은 사람들만이 회중 앞에 서는 것, 상대적으로 여성보다 남성이 더 자주 회중 앞에 나타나는 것, 음악과 영상의 사용, 다양한 심벌(상징) 사용 등은 예배에서 깊은 소통이 일어나도록, 혹은 일어나지 못하도록 작용한다.

앞선 몇 편의 글에서 제기했던 공간, 테크놀로지의 사용, 예배를 섬기는 이들의 자기 인식 등이 예배 가운데 일어나야 할 소통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나는 (설교뿐만 아니라) 예배 전체가, 예배로 부름 받은 이들에게 주어진 커다란 이야기를 함께 기억하고 소통하는 공동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묻고 싶은 큰 질문은, 도대체 예배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소통하고 있는가이다.

(2) 예배 공동체여, 내부의 소통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

"매체가 메시지"라는 말처럼 예배하는 이들에게 익숙한 소통의 방식 자체는 분명한 메시지로 작용한다. 예배를 통해 나누는 이야기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통의 방식이 예배하는 이들 스스로의 모습을 형성한다. 오늘날 교회는 이미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교회는 교회 내부의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조심스러운 진단이지만 피상적인 관계와 일방적인 소통 혹은 소통의 부재에 익숙한 성도들은 갈등 상황을 맞았을 때 그 갈등을 평화적으로 조정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경험이 없다. 그래서 주변에서 보게 되는 갈등이 있는 교회의 대부분은 그 끝이 막장 드라마로 치닫는다. 교회 스스로 갈등을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감당해야 할 더 큰 직분인 화목케 하는 자의 직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예배가 일방적인 선포와 가르침보다 함께 참여하는 소통이 일어나는 자리가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가?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성도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다면 어떤 변화가 나타날 것인가? 예배 가운데 누리는 개인적인 친밀감에 대한 갈망이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고 함께 예배하는 이들과 누려야 할 실체를 가진 감정이 된다면 어떤 변화가 나타날 것인가?

(3) 예배 공동체여, 외부와 어떤 소통을 하나

우리는 예배당 바깥에서도 예배하는 방식으로 우리 이웃들을 대한다. 우리가 가진 이야기들이, 그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들이 이웃들에게 전해야 할 이야기의 내용과 방식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이웃들은 전혀 다른 문화와 상황에 놓여 있지만 교회는 너무 자주 교회가 익숙한 언어를 그들도 당연히 이해하고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도심에 위치한 어느 교회의 예배당 전면을 덮고 있는 커다란 걸개그림을 본 적이 있다.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양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있는 인자한 목자의 모습이었다. 걸개그림 한 쪽에는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선 그림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 바깥의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어 보이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부조화가 거기 있었다. ‘풀밭, 양 떼,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목자, 예수님, 당신, 사랑…’ 좀처럼 풀기 어려운 암호 같지 않은가? 궁금증을 유발하려는 고도의 전략이 아니라면 실패한 것 같다.

더 나가서 예배는 예배 자체로 완결되지 않는다. 예배는 나머지 6일간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6일간 삶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요청이다. 그렇기에 교회로 모여 함께하는 예배에서 어떤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소통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삼위 하나님께서 취하신 성육신의 대화와 소통을 위한 노력이 없다면 소통은 실패할 것이다.

"나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라는 책에서 헨리 나웬은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아이콘을 소개하는 챕터를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루블료프의 아이콘이 이 무섭고 가공할, 가증스럽고 폭력적인 세상 한가운데 살면서도, 저 사랑의 집안으로 언제나 더욱 깊숙이 들어가며 사는 길을 가르쳐 주게 되길 기도한다."

그의 말을 이렇게 받고 싶다.

"나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이 무섭고 가공할, 가증스럽고 폭력적인 세상 한가운데 살면서도, 삼위 하나님의 깊은 사귐과 연합을 누리며 함께 예배하는 이들이, 그리고 우리를 둘러 싼 이웃들이 저 사랑의 집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며 사는 길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길 기도한다."

김성한 / 한국 IVF 미디어 총무 간사 

* 이 글은 <복음과상황>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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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dream 2010-09-22 06:14:06
좋은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교회의 미래에 하나님 나라적인 방향성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