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이야기] 여유로움에서 진지함까지
[쿠바이야기] 여유로움에서 진지함까지
  • 최명숙
  • 승인 2009.05.06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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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열린 마음 가득한 쿠바…여유과 웃음, 호의와 친절

▲ 쿠바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든지 어떤 차림새를 하고 있든지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상관없이 누구하고나 스스럼없이 말을 섞고 쉽게 친해진다. (사진 제공 류영호)
지난 몇 회의 글에서 주로 쿠바에서 느낀 실망감을 토로했다. 어떤 분은 나에게 '쿠바에  대해 화가 많이 난 것 같다'고 했다. 분명 그랬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거나 일을 경험할 때 몇 단계 과정을 거치게 되는 건 나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처음엔 서먹하고 생소하다가 조금 지나면 폭 빠져버릴 정도로 좋아했다가 더 깊이 알게 되면서 차츰 드러나는 모습에 실망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 하지만 그 과정들을 거치고 나서 내가 그 사람, 혹은 그 일을 어떻게 대하게 되느냐는 온전히 나의 몫일 것이다.

솔직히 나 자신, 쥐뿔도 없으면서 '작가'라는 타이틀을 걸고 우리 사회와 이 시대, 이 세상을 위해서 뭔가 뜻있는 삶을 살겠다고 잔뜩 힘주고 있어서 그렇지, 그 힘 다 빼고 긴장 풀고 산다면 쿠바도 무척 좋은 곳이다.  

사실 가장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누구하고나 허물없이 대하는 태도다. 언젠가 버스 안에서 어떤 남자가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기에 무슨 얘길 저렇게 열심히 할까 궁금해 하며 보고 있었다. 보통 쿠바 사람들의 대화에선 한 사람이 길게 얘기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내 주의를 끌었던 것 같다. 모두들 자기가 말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주거니 받거니 하거나 동시에 같이 말을 하거나 하는데, 그 때는 한 남자가 계속해서 말을 하고 한 여자는 계속해서 듣기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말이 빨라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나는 다른 데로 주의를 돌렸는데, 조금 후에 그 남자가 내가 서 있던 뒤쪽으로 오더니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까이에서 잘 들어보니 그 남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지하철 승객들이 노방 전도자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엄청난 흥미를 가지고 그 남자와 버스 승객들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솔직히 놀라웠다. 그 남자의 이야기가 계속되자 몇몇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반응을 보였다. 말하는 사람도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자연스럽게 이야기했고 듣는 사람도 지겹게 느끼는 기색 없이 성의 있게 들어주었다. 외치는 자와 귀 막는 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 대 인간이었다.

또 한 번은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는데, 한 남자가 사람들 앞으로 오더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 번 들어본 바가 있어 이번엔 전도자라는 걸 빨리 알아챌 수 있었다. 역시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맞춘 상태에서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귀찮아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이 전도자는 이야기를 하는 도중, 땅콩 파는 아줌마와 지나가는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정류장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일일이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모두들 자기 이름을 말해 주었고, 나에게도 이름을 묻기에 왠지 본명으로 말해야 할 것 같아서 한국 이름으로 말했다. 그는 일일이 이름을 불러가며 축도 비슷한 것을 해주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 남자가 함께 기도를 하자고 하니 모두들 착한 학생처럼 그를 따라 한 문장, 한 문장 읊는 것이 아닌가? 보아하니 거기 있던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처음 보는 노방 전도자와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소리 내어 기도를?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다. 마지막으로 거기 있던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전도자는 땅콩 장수 아줌마에게 땅콩을 하나 사먹고 나서 갈 길을 갔다.

이들의 전도는 부담스러운 것도 과장된 것도 없는 참으로 자연스러운 그냥, '대화'였다. 말하는 사람이 부담 없이 말하기 때문에 들어주는 사람이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건지, 들어주는 사람이 부담 없이 들어주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이 부담을 주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다. 둘 다일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야 말로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마치 개개인이 느끼는 행복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무시해도 좋다는 식은 위험하다. (사진 제공 류영호)
굳이 따져보자면, 상대적으로 방송과 인터넷과 신문으로 전달되는 정보량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개인이 말하는 것을 더 귀담아 듣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할 때 미리부터 귀를 막지는 않는다는 쿠바 사람들의 여유 있는 태도가 좋아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든지 어떤 차림새를 하고 있든지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상관없이 누구하고나 스스럼없이 말을 섞고 쉽게 친해지는 이 사람들의 열린 마음, 그 자체는 귀하다.

내 경험으로도 그렇지만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봐도, 특히 지방의 경우 쿠바인들의 집에 들어가 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폐쇄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리 열악하고 가난한 집이라도 "Aqui tienes tu casa"(당신의 집이라고 생각하세요)라며 선뜻 맞아준다. 난민촌에 가까운 한 집에 들어가 보았다는 어떤 분은 '왜 그런 집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혹시 가난을 과시하여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더란 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어떤 쿠바인이 그런 의도를 드러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외국인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친해지고 싶다는 단순한 욕구가 이들의 현관문을 활짝 열리게 하는 것뿐이다.     

음악회나 공연장을 가보면 연주자나 무용수, 예술가에 대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지지와 찬사를 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알리시아 알론소 같은 쿠바 발레계의 거장이나 음악계 원로의 경우 공연장에 들어서기만 해도 환호를 보내며 기립박수를 쳐대는 것은 보통이다. 나야 그 사람이 어째서 훌륭한지 알 수가 없으니 공연을 보기 전엔 기립도 박수도 하지 않겠다며 까다롭게 굴지만, 너나 할 것 없이 일어서서 박수를 치는 쿠바인들의 모습에서는 느낄 수 있는 건 위대한 예술을 제공해준 데 대한 감사와 존경이라기보다는 조건 없는 호의와 애정이다. 비교해보자면, 적어도 나의 경우, 공연이나 연주를 감상할 때에 '어디 어떻게 하는지 볼까?' 하는 마음으로, 날 감동시킨다면 기립박수가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하겠지만 시원치 않다면 박수조차 쳐주고 싶지 않다는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지만, 이들은 그 공연이 훌륭하든 형편없든 상관없이 처음부터 기립박수를 쳐주기로 작정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열린 마음과 태도는 쿠바에서 배우고 싶은 것 중 하나다. 나와 상관없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주는 여유는 우리가 모두 본받았으면 싶다. 욕심을 부려보자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 낯선 사람과 웃으며 대화하고 조건 없이 칭찬을 쏟아 부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환대하는 행동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느긋한 삶의 방식 즉 반쯤은 자포자기한 삶의 미학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을 넘어선 진짜배기 여유에까지 이르렀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는 것이다.

▲ '모두가 행복하기 전엔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 있다. 모두가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도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 제공 류영호)
만일 여유라는 것이 단지 '좋은 기분'을 위한 것 이상의 어떤 알맹이도 없는 것이라면, 이들의 여유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이러거나 저러거나,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무신경함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래서 누군가와 자연스럽고 사이좋은 대화를 나눴을지라도 헤어지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떤 자극도 변화도 없고, 환영하고 칭찬해주는 것도 그저 서로 기분 좋으라고 해준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라면, 그 여유는 온전한 여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또 어떠냐고. 꼭 무슨 변화가 있어야 하고 꼭 어떤 발전이 있어야 하는 것이냐고. 그냥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지 뭘 그렇게 따지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렇게 묻는 사람이 적어도 성경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나는 단호하게 '행복'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줄 것이다. 성경은 '행복론'이 아니며, 예수님은 '행복을 느끼는 법'을 가르치러 오신 분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오늘날 가치관 중 하나가 '행복'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야 말로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작은 일에서 행복 찾기 같은 삶의 지혜들이 각광받는다. 이런 종류의 지혜들은,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생활 주변에서 기쁨을 느끼고 큰 것을 욕심내지 않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가르친다. 맞다. 행복이란 거기에 있다. 틀렸다는 것도 아니고, 잘못이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치 개개인이 느끼는 행복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무시되고 간과되어도 좋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 마음을 열어보자. 낯선 이들과 활짝 핀 웃음으로 인사를 주고받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 느껴보자. 그런 다음, 조금 더 열어 아픔과 고통에 이르기까지 열자. 보고 싶지 않은 참혹한 현실에까지 마음을 열고 눈을 뜨자. (사진 제공 류영호)
사실 쿠바에 와 있으니 한국은 점점 멀어진다.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진실은 왜곡되고, 악은 권력의 보호를 받고, 정의는 억압받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잘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일부러 신경 써서 찾아보지 않으면, 속상할 일도 통분할 일도 없다. 속 편하게 잘 지낼 수 있다. 그런 괴로운 소식들을 듣는다고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괜히 들어서 뭐하겠는가? 주름이나 더 생기고 흰 머리나 늘면 늘었지, 뭐 좋은 일이라고 쓸데없이 속을 끓이겠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픈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도 일생 속 끓이다 가시지 않았을까? 행복하게 사는 법을 몰라서 그러셨을까? '모두가 행복하기 전엔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 있다. 모두가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도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내 집안만 천국처럼 꾸며놓고 내 가정만 화목하게 유지하면서, 내 이웃이 어떻게 고통 받는지, 우리 사회가 어떻게 불의해져 가는지 관심이 없다면, 아니, 관심을 가지면 내 마음이 불행해지기 때문에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도 행복도 결국은 거짓에 기초한 행복일 것이다.

여유와 웃음, 호의와 친절, 환대와 칭찬은 소중한 덕목이다.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기분 좋은 일에만 열려있는 것은 아닌가? 사소하고 개인적인 차원의 것들에만 열려있는 것은 아닌가? 나를 슬프게 하는 일, 속상하게 만드는 일에도 내 마음은 열려있는가? 더 큰 세상, 더 큰 차원의 일에까지도 내 마음이 열려있는가? 하고 말이다.

일단 마음을 열어보자. 낯선 이들과 활짝 핀 웃음으로 인사를 주고받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 느껴보자. 먼저 말을 걸고 칭찬하고 대접하면서 기쁜 일, 즐거운 일을 만들자. 산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걸 느껴보자. 그런 다음, 더 열어, 조금 더 열어, 아픔과 고통에 이르기까지 열자. 될 수 있으면 보고 싶지 않은 참혹한 현실에까지 마음을 열고 눈을 뜨자. 내가 가진 여유가 진정 한계가 없는 것이라면 결국 그 여유는 진지함에 이르게 될 것이라 믿는다.   

최명숙 / 희곡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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