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순례길"(Life Is Pilgrimage)
"인생은 순례길"(Life Is Pilgrimage)
  • 김영봉
  • 승인 2013.11.0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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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지 묵상 : ① '그 땅에 서다'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지난 10월 성서의 땅을 다녀와 전한 설교 시리즈입니다. 본인의 허락을 맡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1.

   
 
 

▲ 김영봉 목사. ⓒ미주뉴스앤조이 전현진

 
 
'순례'(pilgrimage)는 '여행' 혹은 '관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Pilgrimage라는 영어 단어는 '낯선'(foreign) 혹은 '타국의'(abroad)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멀고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을 순례라 불렀습니다. 옛날에 멀고 낯선 땅에 여행하는 이유는 둘 중 하나였습니다. 장사하기 위해서 혹은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서. Pilgrimage이라는 단어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먼 곳에 여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순례'(巡禮)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여행하는 목적지에 따라 순례가 될 수도 있고 여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고 어떤 마음으로 가느냐입니다. 두 사람이 똑 같이 예루살렘을 다녀왔어도 마음가짐에 따라서 한 사람은 관광으로 끝나고 다른 한 사람은 순례를 한 것일 수 있습니다. 순례는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존재를 만나려는 여행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면 알래스카를 다녀와도 순례가 될 수 있습니다.

순례, 특별히 성지 순례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해 보고 싶은 꿈입니다. 이번에 저와 함께 순례 여정에 오른 분들도 오랫동안 벼르고 벼르셨습니다. 결혼 40주년 기념으로 꿈을 이룬 분도 있었고, 80이 넘은 노부부가 자녀들의 도움으로 생의 마지막 여행처럼 오기도 하셨습니다. 쉽게 그 여정에 오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과거에는 더욱 그랬지만, 오늘날도 순례는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멀고 낯선 곳'으로 가야합니다. 비행기 여행이 편리해진 이 시대에도 적잖은 피로를 동반하는 여행입니다. 일정이 지속되다 보면 건강이 좋은 사람에게도 벅차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도 꼭 한 번쯤은 해보고 싶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우리에게는 그 땅을 한 번이라도 밟아보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더 친밀하게 만나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영으로만 만나 온 주님을 피부로 느끼듯이 가까이 체험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순례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열망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누구나 그 열망을 가지고 삽니다.
   
 
  ▲ 유월절, 예루살렘을 찾은 유대인들. ⓒ미주뉴스앤조이 전현진  
 
2.
순례의 전통은 종교마다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순례가 가장 유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야만 했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한 번 가 보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습니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모든 유대인 남성에게 매 년 세 번 성전으로 순례를 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로마나 스페인 같이 먼 곳에 떨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순례를 하기도 쉽지 않았고, 그 꿈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시편 84편은 이 같은 순례의 갈망을 표현한 시입니다. 시온의 성전, 그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시인의 열망은 뜨거웠습니다. 5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마음이 이미 순례길에 올랐다"는 표현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객지 생활을 하다가 명절이 되어 고향을 찾아가 본 분들은 이 마음을 다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몸은 아직 떠나지 않았는데 마음은 이미 고향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시인의 열망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입니다.

시인은 왜 이렇게도 간절히 순례를 원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10절은 기억할만한 구절입니다.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자신은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독립된 나라를 그토록 열망했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 집의 문지기가 되어도 좋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3절과 4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군의 주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
제 집을 짓고,
제비도
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성전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사는 제비를 부러워하고, 성전 뜰에 심겨진 나무에 집을 짓고 사는 참새를 부러워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산다면, 문지기가 아니라 참새나 제비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그토록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마음은 언제나 순례길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가 순례길에 오르기를 소망하는 것은 순례를 통해 무엇을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 자신을 지으시고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분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오늘의 시편을 하나님께 대한 절절한 사랑의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 (1-2절)

3.
순례는 이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여정에 올라야만 관광이나 여행이 아니라 순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으로 순례를 할 때, 그 순례길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면,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나일 수 없습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으로 인해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순례를 끝내면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 순례길을 함께 했던 교우 중 한 분이 나중에 감상을 나누는 중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성지 순례가 기대가 되면서도 두렵습니다. 순례를 다녀오고 나면 뭔가 달라져야 할 텐데, 내 남편이나 자녀들처럼 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저를 보고 '순례를 다녀와도 별 소용이 없네'라고 말할까 겁이 납니다. 정말 변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변한 것이 없을까 겁이 납니다."

순례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지 순례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소원하는 것이지만, 또한 그것에 대한 묘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성지 순례를 제대로 하고 나면 때론 감당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변화가 일어날까 무서워 성지 순례를 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다고 말씀하는 그 마음이 참 귀합니다.
   
 
  ▲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 ⓒ미주뉴스앤조이 전현진  
 
저는 순례 여정 중에 그분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의 생각은 두 가지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첫째, 순례 후에 변화가 일어날지 말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면 그 만남으로 인해 자연히 변화가 일어납니다. 순례길에서 더 자주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구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쓰다 보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믿음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지면 그로 인해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변화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라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공연한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보다 더 간절히 하나님은 우리를 갈망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진실하다면, 그분은 우리를 새롭게 그리고 더 가까이 만나주십니다.

둘째, 변화는 순례길에서 한 번 일어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순례 여정을 걸으면서 그리고 돌아와 지난 여정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확인한 사실이 있습니다. 진정한 순례는 매일 매일의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순례의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변화는 순례길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순례길에서 돌아와 매일을 순례자처럼 살아갈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순례 여정 중에 기가 막힌 영적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추억으로 남을 뿐입니다. 오히려 영적 자괴감을 낳습니다. 그렇게 기가 막힌 체험을 했는데, 그래서 분명히 변할 줄 알았는데, 일상으로 돌아 온 후 전혀 변한 것이 없음을 확인할 때, 절망감과 낭패감에 빠지게 됩니다. 반대로, 순례 여정 중에 특별한 영적 체험이 없었다 해도, 일상으로 돌아온 후 과거보다는 더 친밀하고 더 절실하게 주님과 동행하기를 힘쓰다 보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시 반복합니다만, 우리의 인생 자체가 순례의 여정입니다.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어디에 살든 매일을 순례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성지 순례를 마치고 와서 "이제 순례가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진정한 순례는 집으로 돌아 온 후에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례를 떠나기 전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어느 권사님께서 책을 한 권 주십니다. 20여 년 전에 출간된 박준서 박사님의 <성지순례>라는 책입니다. 그분은 성지 순례에 대한 열망 때문에 오래 전에 그 책을 사서 읽으셨습니다. "언젠가는 그 땅을 밟으리라"고 소원하셨기에 이민과 이사를 거듭할 때마다 그 책을 챙겼습니다. 하지만 영영 그 때는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중히 간직했던 그 책을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책을 집에 가지고 와서 읽는데, 제 마음이 뻐근할 정도로 아팠습니다. 때묻은 책장을 넘기면서 성지순례가 그분에게 얼마나 간절한 소원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포기하고 그 아까던 책을 저에게 넘겨준 그분의 마음을 생각하니, 얼마나 미안하고 아프던지요! 그 권사님은 지난 화요일에 선교 사역에 남은 인생을 바치기 위해서 남아공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분처럼 성지 순례에 대한 열망은 있으나 그것을 이루지 못하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형편 상, 영영 그렇게 하지 못할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건강 때문에 또 어떤 분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그래서 순례 여정을 떠나는 제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고, 여정 중에 마음껏 좋아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형편에 있는 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지 순례를 하는 사람들을 마냥 부러워하고만 있어야 할까요? 순례 여행 한 번 못하는 자신의 형편을 두고 낙심하고 탄식해야 할까요? 순례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예 신경을 꺼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성지 순례를 통해서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소득은 우리의 인생이 순례길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성지 순례를 마치고 나서 하루하루의 일상을 순례자처럼 살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지 순례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이 순례자임을 자각하고 하루하루를 순례처럼 살아간다면, 성지 순례를 열 번 한 사람보다 더 낫다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본 시편 84편은 순례자의 마음으로 일상을 살던 사람이 쓴 것입니다. 이 시편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순례를 떠나라"가 아니라 "순례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언제나 순례길에 오를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그것만을 목매고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이미 순례길에 오른 사람처럼 혹은 이미 성전에 도달한 사람처럼, 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산다면, 순례가 따로 필요 없습니다.

4.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입니다만, '순례'(巡禮)라는 한자말을 누가 만들었는지, 참 기가 막힌 말의 조합입니다. '순'(巡)은 '돌다' 혹은 '돌아보다'라는 뜻이고, '예'(禮)는 '예배'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순례'는 자기 종교의 유적지들을 돌아 다니면서 예배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순례길에서 저희도 몇 번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단어를 조금 달리 해석합니다. 종교 유적지를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예배라는 뜻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행을 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 순례입니다. 여정 자체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길이 순례길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그리고 매일의 일상을 순례자로 살아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분명해집니다.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을 갈망하며 그분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 바로 순례자의 마음입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 안에 계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바로 순례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선 자리에서 늘 순례자처럼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그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주 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임재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지속적으로 깨워 줄 도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지로 순례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주님의 임재를 더 진하게 경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곁에는 '작은 순례길'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일에 예배당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작은 순례길입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온전히 예배를 드리고 나면,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 내가 천국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성지 순례에 임하는 사람의 마음과 같아야 합니다. 그렇게 예배하는 사람은 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훨씬 더 잘 살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에 주님과 나누는 경건 시간도 역시 작은 순례길입니다.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든, 아니면 집에서 혹은 직장에서 큐티를 하든, 하루 종일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시간을 성별하여 주님을 찾는 것을 '매일 순례'라고 부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매일 순례'를 잘 해야만 하루 종일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제가 요즘 '매일 순례'를 할 때마다 드리는 짤막한 기도가 있습니다. '동행 기도'라고 이름 짓고 싶은데, 세 문장으로 된 기도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 계심을 제가 믿습니다.
Lord, I believe that You are within me.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제게 가장 복된 일임을 믿습니다.
I believe that walking with You is the most blessed thing for me.
하오니 오늘도 늘 주님과 동행하게 하소서.
So make me walk with You all day long.

여러분에게도 권합니다. 이 기도를 자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과의 동행이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더 친밀하게 만나려는 열망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작은 순례길입니다. 소그룹으로 모이는 것도, 성경 공부반에 참석하는 것도,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도, 선교지에 나가 땀 흘려 일하는 것도 모두 작은 순례입니다.

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 멀리 순례를 가려 하기 전에 먼저 내 주변에 있는 순례길부터 제대로 챙겨야 합니다. 작은 순례길도 제대로 걷지 못한다면, 멀리 있는 순례길을 제대로 걸을 수 없습니다. 우리 곁에 있는 작은 순례길을 진실하고 참되게 걷는다면, 우리는 순례자로서 매일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면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일어납니다.

5.
시편 84편의 구절 중에 주목할만한 구절이 하나 더 있습니다. 6절입니다. 이 구절의 원어 즉 히브리어의 의미를 NIV 성경이 잘 담아 놓았습니다.

As they pass through the Valley of Baka,
they make it a place of springs.
그들이
바카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그들이
그곳을 샘물 골짜기로 만들었다.
   
 
  ▲ 사해 사본이 발견된 유대 골짜기. ⓒ미주뉴스앤조이 전현진  
 
우리말 성경에서는 '눈물 골짜기'라고 번역한 것을 NIV에서는 '바카 골짜기'라고 번역했습니다. 어떻게 번역하든, 그 골짜기는 중동 지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황량한 골짜기입니다. 이번 순례 여정 중에 중동 지역의 골짜기가 얼마나 황량한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례자가 그 골짜기를 지날 때 그곳에 샘물이 터져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순례자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인생길에서 고난과 역경을 만날 때 그곳에 샘물이 터지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인생길을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늘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뜻을 위해 사는 사람은 사막에 길을 내는 사람이고, 광야에 정원을 만드는 사람이며, 메마른 골짜기에 샘물을 터뜨리는 사람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금 사막을 걷고 있습니까? 메마른 광야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메마른 골짜기를 걷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도록 부름 받았는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더 깊이 만나기를 소망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이 걸으셨던 그 길을 걷는 순례자처럼, 우리가 선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던 주님을 더 깊이 만나기를 소망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가기를 힘쓰십시다. 그렇게 순례자로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힘쓸 때, 때로는 권태로워 보이고 때로는 지루해 보이며 또 때로는 메말라 보이는 우리의 일상에 샘물이 터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내 손에 들어온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물질에 사로잡히지 않고 영원한 것을 위해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그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기에 이 땅의 것에 대해서는 자족할 수 있고 또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순례의 은총이 만나처럼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매일 지속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한 번의 거룩한 순례길 인생을 허락하신 주님,
저희의 마음을 붙들어 주시어
순례자로서 이 세상을 살게 하소서.
주님께 대한 사랑을
저희 마음에 가득 채우소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늘 새롭게 하소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이 순례길을 완주하도록 지키소서.
아멘.

김영봉 목사/ 와싱톤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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