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의 이웃인가요?
나는 누구의 이웃인가요?
  • 한경숙
  • 승인 2009.07.0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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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길

'유럽에서 발견되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공포의 광우병 쇠고기가 원조라는 탈을 쓰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한 동포들의 식탁에 오를 기세에 있습니다.'

언젠가 미주 라디오 방송을 통해 흘러나온 이 소식은 순간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만들었다. 원조라는 탈을 쓰고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원조도 때때로 탈을 쓸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원조는 나 아닌 남, 곧 이웃에게 베푸는 도움의 형태로 도움 혹은 후원이란 말로 대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형태의 도움을 주고받고 삽니다. 그러다 보니 원조는 가끔 갖가지 형태로 베푸는 자의 이익과 계산이 깔린 채 예쁘게 포장되어 이웃집에 배달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 혹, 주는 자는 자신이 베푼 것을 받는 이웃이 있다고 은근히 베푸는 자의 자부심을 느낄지 모르나 받는 쪽 역시 그를 이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웃에 관해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눅10: 25~37). 영생의 문제를 들고 온 한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영생의 필요충분조건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행하라 하셨습니다. 그 율법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는 알았지만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지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굽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이웃을 설명하시면서 율법사에게 대답 대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예수님의 이 역설적인 질문은 이제껏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너무 익숙해 있었던 나에게 '너는 과연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라는 예수님의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 보게 됩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는 '나는 과연 누구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주는 새로운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에게 '저 강도 만난 사람이 당신의 이웃입니까, 아닙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분명할 것입니다. '예, 그가 내 이웃입니다'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그 누구에게라도 '누가 당신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 대답 또한 분명할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내 이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강도 만난 사람에게 '누가 당신의 이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을 할까요. 그 강도 만난 사람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그의 이웃이라고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리 어느 불쌍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도, 그 사람이 나를 자기의 이웃으로 여겨주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나를 그의 이웃으로 여겨 줄까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이웃 사랑의 모습입니다. 제사장은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일이 더 중요하니까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울 짬이 없었겠지요. 레위인도 성전에 가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성전 일을 해야 하니까 시간이 없었겠지요. 예수님은 이런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론이나, 성경의 교리나, 생각이나 기도로 그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행하는 이웃 사랑의 모습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인가'라는 이 질문이 이웃 사랑에 대한 새로운 사고의 전환을 저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미국에 온 이래, 장애인 선교 단체에서 그리고 교회에서의 장애인 사역과 자선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도전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자선이라는 단어도 적당한 단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이웃 사랑 사역이라는 표현을 저는 더 좋아합니다.)

사회사업을 통한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고, '어디든 부르시면 가오리다'라는 선교의 야무진 꿈을 갖고 있던 제가 미국으로 오게 되었을 때, 지금껏 배운 지식과 경험과 알고 있던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리라는 마음을 은근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그것도 뉴욕은 저에게 적잖은 망설임이 들게 했던 곳입니다.

이곳에 와서 처음 사역하던 곳은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발달 장애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장애인 선교단이었습니다. 장애인 천국이란 곳에서조차 그 천국의 기쁨과 안식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신분 문제로, 경제적인 문제로, 가정적인 문제로 혹은 다른 여건들로 인해 순간순간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황들이 빈번히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저는 그들이 제가 속한 선교단을 혹은 저를 자신들의 이웃으로 여겨 주는지 여부보다는 내가 또는 선교단이 그들에게 일정한 형태의 원조를 하는 것 자체로서 사역이 이루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이들과 나눈 말 한마디, 같이 나눈 한 끼의 식사 혹은 볼멘소리로 투정할 때 들어주는 과정에서조차 스스로 행위에 겨워 그들을 나의 이웃이라 먼저 단정하고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당연히 그들이 받았다고 뿌듯해 한 적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나의 의가 먼저 앞섰기 때문이 아닐까요?

필라델피아에서 학업을 마치고 뉴욕으로 다시 갔을 때 성인 여자 정신지체인들 몇몇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이들과 살까? 내가 정말 살 수 있을까? 24시간 이들과 부대끼면서 한 공간에서 살 수 있을까? 나의 사생활은?' 내색은 안 했지만 조금은 염려하고 갈등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곳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오히려 나는 도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내가 손을 벌릴 때마다 그들은 내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시장을 볼 때 음식을 준비할 때, 그리고 연중행사로 인해 손이 부족할 때 그들은 어김없이 옆에서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일손을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내가 혹 학교 공부로 바쁜 시기가 되면 여지없이 그들의 도움이 빛을 발하곤 했습니다.

장애인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필요를 위해 일을 한다는 환경에서, 사역이라는 점에 더 큰 의미를 두었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역한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없었던 게 저의 솔직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적당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항상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함께 살면서 나를 사역의 일부로서 도와준 게 아니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사랑으로 나를 도와주고 있음을 알았을 때 난 그들을 나의 친구로 나의 이웃으로 서슴없이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그들의 친구이며 이웃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바람은 필라델피아연합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데 있어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사랑부와 자선 사역(mercy ministry) 그리고 싱글 마더들의 모임을 통해 만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을 나의 이웃으로 그들의 이웃으로서 서로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홈리스 사역을 하면서 만난 어느 흑인 목사님의 설교에 따르면 사랑은 감정으로 느끼는데 머무르는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행동의 언어라고 합니다.

동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고,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요3: 16) 어디 예수님만 주셨습니까? 땅에 있는 것과 바다에 있는 것과 공중에 있는 생물 모두를 우리에게 주셨으며(창1:28) 하나님이 계신 천국까지도 우리에게 허용하셨습니다.(마7:21) 그리고 하나님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이루어지는 모든 시간 속에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시간을 우리를 위해 다 내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감정으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직접 팔을 걷어붙이시고 우리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월드비전 회장 Richard E. Stearns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설명하는 가운데 제사장과 레위인의 죄는 냉담과 무관심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단지 관여하지 않고 지나쳤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라고 합니다. 또한 오늘날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종종 유엔이나 세계은행(the World Bank), 혹은 고통 받는 고아와 과부에게 자선을 베푸는 빌게이츠 재단(the Bill and Melinda Gates Foundation)같은 세상적인 단체들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World Vision Today, summer 2002. p3) 곤궁한 처지의 형제에게 보인 냉담과 무관심은 여호와 앞에 죄(신15:9)라고 성경에도 분명히 이것은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물으러 온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면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17)는 결론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에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을 감탄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한경숙 /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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