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매와 나비 사이에서
영매와 나비 사이에서
  • news M
  • 승인 2015.05.08 04: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함께 만드는 텍스트'로서의 언론

이 글은 지난 1일 풀러신학교 주최 포럼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정의 은혜 율법'에서 행해진 개별 강의 중 하나입니다. -편집자 주 

 

   
▲ 지난 1일 열린 풀러신학교 주최 포럼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정의 은혜 율법'(황진기 원장(좌), 김기대 목사, 박상진 목사, 허현 목사(우))

정의와 평화를 위해 '함께 만드는 텍스트'로서의 언론
- Media(靈媒)와 Nabi(예언자) 사이에서

필자에게 본래 주어진 제목은 “Korean-American Christian Media for Shalom and Justice” (한인크리스천미디어와 샬롬과 정의) 였다. 이 제목에 충실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주한인언론 지형에서는 정의와 평화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언론뿐 아니라 모든 언론 지형이 지금 좋지 않다. 인터넷 매체의 증가로 전통적인 종이신문은 퇴조하고 있으며, 종이신문의 컨텐츠를 제공하는 인터넷  웹사이트 조차 대안매체(Huffington Post, Facebook, Twitter 등)에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게토'(Ghetto)라고 할 수 있는 한인 기독교 매체들은 전적으로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사 내용의 공정성이라든가 높은 수준의 담론은 기대하기 어렵다.

필자가 편집장으로 있는 <뉴스M>이 이곳 시민사회나 교회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신뢰를 받고 있는 이유도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일 것이다. 비용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유지되는 <뉴스 M>이기 때문에 그나마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고 현대 사회의 화두인 정의와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신문 또한 문제가 되는 그 '자본'의 한계 때문에 지속적인 컨텐츠 제공에 한계가 있다. 자본의 위세를 다시한번 확인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오늘 글에서는 기독매체라기 보다는 현대사회에서 매체의 역할을 중심으로 정의와 평화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1. 매체와 영매

   
 

매체를 영어로는 Media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영매(靈媒)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갖는다.  죽은 자의 영혼과 살아있는 사람이 소통하게 만들어 준다는 의미의 영매처럼 매체는 사건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통의 도구다. 매체의 기본특징이 6하 원칙에 따른(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사실(fact)보도였지만 인터넷 세대 이후 글쓰기에서는 이런 원칙이 정확히 지켜지지 않는다. 때로는 문어체와 구어체가 혼용되는 기사도 있어 옛 종이신문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심한 거부감을 주기도 한다. 기사 쓰기의 원칙만 변한 것이 아니라 매체가 '팩트'만 전한다는 원칙도 바뀌었다. 언론의 성격에 따라 동일한 사건도 언론사의 의견이 가미되어 전혀 다른 팩트로 전달된다.

한국의 대표적인 인터넷 언론 활동가인 김어준은 자신이 만든 신문 '딴지일보'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 신문은 편파적이지만 편파에 이르는 과정은 객관적이다(공정하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공정성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온갖 편협성을 기사에 담는 한국 보수 언론을 향한 일침이었던 것이다.

영매는 단순히 초월과 세속,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망자의 입을 통해 생자의 삶에 개입한다. 이 세상에서 살았던 망장의 삶은 영매의 공수(Message)를 통해 재해석된다. 오늘날 매체는 영매의 이러한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나비와 영매의 차이

예언자의 히브리어는 Nabi로, 그 뜻은 일차적으로 ‘부름 받은 자’이다. 그는 자기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사람이다. 즉 나비들은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다. 브루그만은 특히 부르심을 강조하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 세상 현실 세계에서 수많은 도전과 저항에 직면하지만 누구도 저항하거나 거절할 수 없다. 오늘 사회는 이 부르심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집중해야 한다. 성서가 부르심의 근거를 제공한다면 매체는 그 내용을 담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부르심이라는 예언자적 행위가 함께 갈 수 있는 개념이 바로 정의와 평화다. 이 개념은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개념과 함께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월터 윙크(Walter Wink)가 말한 사탄의 체제 속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시민들, 희생당한 자들의 정당한 요구가 사탄의 체제에 의해 모욕당하고 있다. 보수 교회와 매체가 사회의 물신화를 쌍끌이하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모욕이 대표적인 예다. 유가족들은 '진실 규명'이라는 나비적 가치관으로 말하는데 언론은 '보상금'이라는 사탄적 가치로 왜곡시켜 버린다.

이 지점에서 기독교 매체에게 요구되는 것은 나비(Nabi)적 상상력이다. 세속적 영매(매체)가 공동체의 번영을 위한 사탄의 체제를 대변하는 소리라면 기독교 매체는 나비적 상상력에 기초해야 한다. 팩트가 아니라 영적 감수성을 회복시켜 주고, 브루그만의 말처럼 왕권의식(royal consciousness)에 대항하는 예언자적 의식(prophetic consciousness)을 고무하는 것이 기독 매체의 역할이다.

지배체제를 옹호하는 왕권의식과 달리 예언자적 의식에는 공동체의 정의와 평화가 자리잡고 있다. 기독매체에게 요구되는 나비적 상상력인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심어주는 일이다. 왕권의식 속에서 무감각해져 버린 현대판 히브리인들의 생각에 새로운 감수성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러한 나비적 상상력을 과감하게 주장하는 것이 매체의 역할이다.

3. 정의 평화를 위한 텍스트를 함께 만들어가는 작업

상황(context)이라는 말을 여기서는 '함께 text를 만드는 것'으로 풀어쓴다. 현대 교회에서 텍스트로서 성서는 메타내러티브(Meta Narrative)보다는 개별 내러티브의 전거(reference)로 사용되어 왔다. 특히 한인 교회와 같은 보수적인 환경에서는 구원 속죄 등의 메타네러티브는 선호되어 왔으나 정의 평화와 같은 메타 네러티브는 오히려 개별 내러티브 속으로 들어가 성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문자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런 추상성으로서의 거대 담화와 구체성으로서의 개별담화가 갖는 모순은 교회를 보수화시키는데 일조한다. 예를 들어 가나안 정착과정에 나타난 히브리인들의 정복사는 개별 승리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사회 피지배층의 해방(정의)이라는 거대담론으로 읽어야 하는데 '전쟁의 승리'라는 개별 담론으로 전환되고 이것은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중동전쟁을 정당화하는 내러티브로 둔갑한다.

이런 간극을 매워야 할 책임이 기독매체에 있다고 보여진다. 기독매체는 다양한 필자군을 발굴함으로써 성서의 메타네러티브가 다양할 수 있도록 여론을 선도해야 한다. 정의, 평화도 그러한 차원이다. 당파적 언론은 그런 (컨)텍스트 만들기에 성공했다. 목회자들이나 신도들은 그런 당파적 매체에서 제공하는 텍스트를 가지고 성서의 텍스트를 분석해 왔다. 복음적 관점에서 매체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매체적 관점에서 성서를 이해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왔던 것이다. 강단에 선 목회자들에게 '조중동'이라 불리는 보수 매체가 복음의 역할을 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언론권의 역할이 중요하게 강조되는 때에 함께 텍스트를 만들어나가는 동지적 관계가 교회나 독자들에게 요구된다.

브루그만은 예언자적 상상력은 주류 공동체와 갈등관계에 있는 하위 공동체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예언자적 목회는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주류 문화에 대항하는 하위 공동체를 길러 내는 목회여야 하는데 솔직히 한인 사회는 본인들이 하위문화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끊임없이 주류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각성시키고 교회와 매체가 함께 텍스트를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우리가 사는 상황(context)을 정의와 평화의 두 바퀴 위에서 작동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발표 김기대 박사, <뉴스 M>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