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고통에 대한 예의
세상의 고통에 대한 예의
  • 박지용
  • 승인 2015.05.29 0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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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수잔 손탁-

얼마 전, 네팔에서 일어난 지진으로인해 수도 카트만두는 도시 전체의 1/4 정도가 폐허가 될 정도로 대참사였고, 지금도 그 고통은 진행형이다. 세계인들이 네팔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교회, 단체, 개인들이 구호금과 물품을 보내며 네팔이 지진에서 다시 일어서기를 돕고 있다. 어떤 나라에서는 의료팀, 봉사팀, 혹은 구호대를 보내어 네팔에서 직접 몸으로 복구를 위해 뛰고 있다. 지구 저 편,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라 외면하지 않고 곳곳에서 작은 도움이라도 나누고자 하는 '선한 사마리아인'들로인해 네팔은 물론이고 그를 바라보는 우리 또한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심각한 무례

 

요즈음 네팔 지진현장의 소식을 관심있게 본다. 하루는 이런 기사를 읽었다. 네팔의 한 온라인 매체를 인용한 기사에, "구호활동을 하러 한국에서 왔다는 이들이 재난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네팔 이재민들에게 비타민 몇 알과 성경을 전달하고 있다"며 "그들은 이런 재난은 예수가 아니라 큰 거인과 같은 힌두교 신들을 믿어서 벌어진 일이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남의 아픔을 헤아리고 보다듬어 주는 일에 전념하지 않고, 기독교 승리주의적 선교행태를 보이는 무례를 범했다니... ... "거기까지 가서..." "꼭 그렇게 했어야 했을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그들이 리차드 마우가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한 말을 귀담아 듣고 갔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다. "기독교가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사는 방법은 승리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겸손과 사랑 그리고 온유함으로 시민 교양’을 유지하는 인내이다."

다원주의 세상에서 공격적 선교를 열심(?)으로 미화하려 들지 말고 무례한 것은 무례로 인정해야 한다. 무례하게 구는 것보다 상대에 대한 예의는 사람 살아가는 사회의 상식이요, 선교와 전도의 기본이기도 하다. 장 바니에는 "예수님은 사람과 집단을 분열시키는 벽을 무너뜨리기 원하신다. ... ... 상대방이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확신이 없다면 화해 혹은 화평도 사회 복지도, 더 나은 세상이 되게 할 어떤 일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당신은 소중한 존재'라는 진정성은 내가 상대에게 보여주는 예의에서 출발한다. 세상의 고통에 대해 예의없이 독선과 무자비한 폭력성은 아무래도 성경해석에 있어 문자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본주의자들에게서 비롯된 것 같다. 그들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재앙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깔끔한 해석(?)을 즐기다 보니 희생자와 남겨진 자들에게 재앙과 아울러 언어폭력(Verbal abuse)과 영적학대(Spiritual abuse)라는 고통이 가중시킨다. 이런 섣부른 단죄가 어느 선교팀에서 뿐만 아니라 어느 설교강단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다.

 

공의로운 사회의 밑거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말하기 전에, 우선 남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 긍휼의 마음은 예의로 나타나게 된다. 사회적 약자나 고통 당하는 자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없이 산다면 그것이야 말로 자신에게 가해진 재앙이다. 지진같은 엄청난 재난을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가까운 이웃으로 눈길을 돌려보면, 저임금으로 삶의 위협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값싸게 살 수 있는 옷이나 음식은 그 어디에선가 저임금을 받고 노동하는 바닥인생들의 고통의 결과이다. 그들의 고통에 대한 예의를 가지고 산다면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데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정의없이 진정한 '샬롬'이 이루어질 수 없다. 세상의 고통에 대한 예의를 가지자. 단지 내가 당하지 않았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함부로 말하거나, 내게 주어지는 값싼 이익 때문에 기뻐하는 가벼운 행동을 하지 말고.

박지용 목사 / 온맘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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