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콤플렉스에서 벗어 나면
중심 콤플렉스에서 벗어 나면
  • 박지용
  • 승인 2015.06.13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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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순간의 꽃'-

 

가려서 아름답다던 꽃들이 이제는 여기저기 피어있는 아무 꽃이나 아름답게 보인다. 늘 걷기운동을 위해 찾는 공원에서 꽃을 피우는 나무만이 아니라, 잡초도 아름다워 놀랐다. 어떻게 저런 나무에서, 풀에서 아름다움을 피울 수 있을까? 고혹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제 자리에서 주어진 대로 자신의 꽃 피우려는 노력은 박수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모양의 진기함보다 '자기대로' 피워낸 정성이 갸륵하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꽃들, 하찮게 여겼던 꽃들에게 미안하다. 아울러 새로운 정감과 반가움이 교차된다. 오늘은 공원 걷기가 신비로움마저 들어 꽃들에게 인사하기를 잊지 않는다.   

 

은혜 아니면 

 

보이는 게 은혜다. 눈이 있다고 다 보여지는 것 아니다. 아내는 냉장고 안에 있다는 데도, 서랍장에 있다는 데도 찾지를 못해서 뭘 하나 찾으려면 아내를 대동하고 찾아야 한다. 내가 찾을 것을 찾아 준 뒤, 아내는 꼭 한 마디를 한다. "보이는 것도 못 찾느냐." 그런 타박이 싫어 나는 반사적으로 "숨겨 놓았다가 찾아 주는 것 아니냐"고 궁시렁 댄다. "왜 이렇게 안 보이는지..." "왜 이렇게 못 찾는지..." 그럴 때마다 앨런 피즈&바바라 피즈가 쓴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에서 "남자는 좁고 멀리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졌고 여자는 넓고 가까이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졌다."고 상황정리를 해주려 하지만 여전히 미스터리는 여전히 남는다.   

 

'은혜 아니면'이라는 찬양을 들었다. 가사도 곡도 너무 은혜로워 헤어 나오질(?) 못했다. 듣고 또 듣고... 듣고 또 듣고 종일 반복해서 들었다.

 

어둠 속 헤매이던 내 영혼 갈길 몰라 방황할 때에

주의 십자가 영광의 그 빛이 나를 향해 비추어주셨네

주홍빛보다 더 붉은 내 죄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어

완전한 사랑 주님의 은혜로 새 생명 주께 얻었네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십자가의 그 사랑 능력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놀라운 사랑 그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이 부분에서 "예, 그렇습니다"며, 눈가에는 방울이 송송 맺혔다. 은혜에 젖어 곡조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난 음악적 재능이 별로다. 그럼에도 찬양에서 은혜가 보였다. 음악에서 무엇이 보인다고 말하면 헛것을 보았다 하거나 헛소리 한다고 하거나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은혜 아니면' 아, 정말 은혜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 고백만으로도 아름다움에 전율이 흐른다.    

 

중심에 산다는 것

 

산다는 것이 별것 아니다는 말들을 한다. 그런데 그 별것 아닌 것을 위해 별나게 살려고 몸부림친다. 이건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성공도 실패도 단맛도 쓴맛도 보면서... 치열하게 산다. 사실 별것이 별난 것이 되는 아름다움은 은혜가 만들어 주는 특별한 묘미이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역을 주로 하셨다. 예수님 시대에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 못되었다. 사실 유대지방 혹은 예루살렘 중심적 시각에 의한 것이었지만.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나머지를 비하하려는 근성(?)을 버려야겠다. 중심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않는 한 변방이셨던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다. 어디서든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어렵다. 중심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중심임을 알면, 그 어디서나 중심(?) 잡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20세기 신학계의 거장인 칼 바르트는 스위스 자벤빌이라는 시골에서 목회하는 동안 '말씀신학'을위한 대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성경연구에 몰두하여 쓴 '로마서 주석'은 2차 세계 대전으로인해 희망이 보이지 않던 핍절한 세상에 단비같은 걸작이었다. 적잖은 위로를 준다. 저 높은 곳을 향해... 도시로 대도시로... 외치던 시절, 나름 거둔 작은 성공도 있었건만 그땐 은혜가 보일 질 않았다. 아름다움보다 치열함이 더 했다. 이제는 돔 헬더 카마라의 말처럼 제국과 도시보다 광야가 아름답다. 밑바닥에서 어른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일상의 소소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된다. 살아가는 은혜가 이런 것인가보다. 이런 기도를 드려야겠다.

 

"아름다움이 보여지는 은혜가 흐려지지 않게 하소서!"

 

박지용 목사 / 온맘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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